184화 – 이거였어, 천창현이 노린 게
검은 물길이 천창현을 집어삼키기 직전, 깨진 창문으로 칼바람이 불어와 물길을 갈랐다.
덩달아 촉수에서 풀려난 우리와 친구들이 난입한 이들을 쳐다봤다.
“육재희 부길드장? 아니, 길드장으로 승진했다고 했나.”
“강희수 헌터도 왔잖아?”
난장판이 된 주변을 돌아보던 육재희와 강희수가 천창현과 눈이 마주치자 눈썹을 찡그렸다.
이게 무슨 난리인지. 머리카락 한 올 보이지 않게 꽁꽁 숨어 있던 자가 시내 한복판에 자리한 병원에서 화려하게도 저질러 놨다.
속으로 한숨을 삼킨 육재희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미안하게 됐습니다, 한우리 길드장. 천창현 헌터에게 용건이 있어 부득이하게 끼어들게 되었습니다.”
“별로 좋지 못한 시점이었다는 건 잘 알 텐데요. 뭡니까? 급한 일 아니면 다음에 찾아오시죠.”
“글쎄요. 지금 놓치면 다시 만나기 힘들 것 같아서 말입니다.”
황해도에서 합을 맞췄던 두 사람이었지만 지금은 냉랭한 기운만 감돌았다.
우리와 친구들은 갑작스러운 육재희의 등장에 당황했다.
다 된 밥에 코를 빠트리다니, 오늘 작전을 위해 쏟아부은 시간과 돈이 얼만데 짜증이 치밀었다.
육재희가 나타나면서 상황이 복잡해졌다.
“하하하……. 나 하나 잡겠다고 대한민국 1위, 2위 길드의 길드장씩이나 되는 분들이 직접 출두하다니. 출세했네.”
“닥쳐라, 배신자.”
“배신자라는 말은 틀렸어. 나는 단 한 번도 골드스타 길드에 충성한 적 없거든.”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웃음을 흘리는 천창현에게 강희수가 일갈했으나 그는 더 독한 말을 내뱉을 뿐이었다.
와, 저거 골 때리는 새끼네.
솔이 감탄하듯 중얼거린 말에 모두가 말없이 공감했다.
육재희가 알 수 없는 눈길로 천창현을 바라봤다.
“원래 골드스타의 길드원이었으니 천창현 헌터는 저희가 데려가겠습니다.”
“저자가 하는 말 못 들었습니까? 한 번도 길드에 충성한 적 없다지 않습니까. 거절하죠. 저희도 시급해서요.”
“도천은 그와 아무런 연관이 없지 않습니까?”
“설명해야 합니까?”
우리와 육재희가 첨예하게 대립했다. 한 남자를 사이에 둔 두 남자의 대치는 다른 때라면 꽤 흥미진진한 볼거리였으나 아무도 말을 얹지 않았다.
“천창현 헌터가 무슨 짓을 저지르고 다녔는지 알고 있습니까? 지금 그를 데려가면, 골드스타에 모든 책임을 물겠습니다.”
“…….”
“육재희 부길드장! 우리를 방해하면 당신도 무사하지 못할 겁니다!”
“한서리 부길드장은 왜……?”
육재희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했다. 도천도 그렇지만 그녀의 존재는 정말 하늘에서 떨어진 봉황처럼 뜬금없었다.
천창현과 한서리 사이에 정확한 연관성을 찾지 못한 육재희에게 우리가 진실을 고했다.
“천창현이 이매 길드장을 살해한 범인입니다.”
“……!”
“그리고 한서리 부길드장 역시 살해하려고 했죠.”
육재희가 깨달은 얼굴을 했다. 진입하기 전 보았던 푸른 불꽃이 만들어 낸 형상은 분명 이매였다.
잘못 본 것이라 생각했는데. 설마 죽지 않았던 것인가?
그럼 천창현은 왜 이매를 죽였을까. 도천 측에서는 그 이유를 알고 있는 듯했다. 그걸 알아내야 했다.
“그렇다 한들 도천은 외부인 아닙니까?”
“아, 답답한 소리 하네! 저 인간이 지금 얼마나 위험한 짓을 하려는지 몰라서 그러…… 읍!”
미리내가 솔의 입을 단단히 틀어막았다. 조용히 해야지 솔아. 복화술로 속삭이는 미리내는 환하게 웃고 있었지만 어딘가 무서웠다.
미리내가 육재희의 기색을 살폈다. 강림석과 세계의 포식자들에 관한 건 일급 기밀이었다.
육재희가 뭔가 눈치챘을까 싶어 긴장하는데 그가 표정 변화 없이 나직하게 강희수를 불렀다.
“강희수 헌터.”
“예.”
강희수는 온갖 속박 스킬로 전투 불능이 된 천창현에게 다가가 이능 구속구를 채웠다.
그가 하는 걸 보고 우리와 친구들이 움찔했으나 막지는 않았다. 어차피 해야 했던 일이므로.
천창현은 의외로 순순한 태도였다.
“여기서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자리를 옮기죠.”
육재희가 달빛이 새어 들어오는 무너진 벽을 고갯짓했다.
환영이 걷히며 드러난 불 꺼진 병동에 심상치 않은 폭발음이 들리자 사람들이 모이고 있었다.
빠르게 치고 빠질 생각이었던 우리와 친구들은 난감함을 감추지 못했다.
미리 경찰 측에 연락해 두었기 때문에 늦게 출동하겠지만 그렇다고 여유가 있는 건 아니었다.
“천창현 헌터의 거취는 얘기가 끝낸 뒤에 결정하도록 하죠.”
“육재희 부길드장, 천창현을 빼돌릴 생각이라면 각오하십시오!”
“진정하세요, 한서리 부길드장님.”
인찬이 서둘러 한서리를 붙들었다.
원수를 눈앞에 두고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그녀의 마음은 십분 이해하지만 이미 얽혀 버린 이상 육재희도 무관하지 않았다.
서슬 퍼런 눈을 한 한서리를 쳐다본 육재희가 대답했다.
“절대 그럴 일 없을 겁니다. 약속드리죠.”
우리가 마지못해 핸드폰을 꺼내 어딘가에 전화를 걸자 공간이동 스킬을 가진 길드원이 나타났다.
그는 무너진 잔해와 붙잡힌 천창현을 보고 콧잔등을 설핏 찡그렸다가 제 할 일을 하기 위해 두 명씩 데리고 움직였다.
공간이동 스킬에 몸을 싣기 전.
“유하야, 왜 그래?”
“아니, 천창현 그 사람 붙잡혔는데도 웃고 있어서.”
“뭐? 잘못 본 거 아니야?”
인찬이 소름 끼친다는 듯 팔뚝을 쓸어내렸다. 유하는 천창현이 있던 자리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잘못 봤을 리 없었다. 찰나지만, 그는 분명 웃고 있었다.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네.”
찝찝한 기분을 안고 유하가 걸음을 옮겼다.
***
“우리야, 정말 육재희 길드장의 협조를 받을 거야?”
“어쩌겠어. 이미 엎질러진 물인데.”
새벽 내도록 바빴던 우리가 마른세수를 하고 허탈하게 대답했다.
생각 같아서는 잠깐 눈이라도 붙이고 싶은데 수습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았다.
지금도 아버지인 한도준과 비서실장에게서 전화가 불나게 오고 있었다.
끄응.
티 날까 봐 거절 버튼을 누르지도 못하고 소심하게 핸드폰을 뒤집어 놓는 그를 미리내가 애잔하게 봤다.
“저쪽도 명분이 있잖아.”
“천창현이 데리고 사라진 길드원들을 찾는다는 거?”
“어. 자기네 길드원 찾는다는데 거기다 대고 뭐라고 해.”
육재희는 나름대로 합당한 이유를 대며 천창현의 일에 간섭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솔직히 제 발로 나가 범죄에 가담한 이들을 뭐 하러 찾나 싶은데 인력난이라고 대답하니 할 말이 없었다.
아무튼 그래서 도천에서 천창현을 억류하겠다고 하자 자세한 내막을 알아야겠다며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한서리와 이매의 일만으로는 육재희를 납득시킬 수 없었다.
결국 하는 수 없이 천창현이 이매를 죽인 진짜 이유부터 강림석, 이 세계를 위협하는 존재에 대해 설명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세상이 멸망할지도 모른다는 말을 들은 육재희는.
‘그런 거라면 협력하죠.’
예상외로 퍽 단조로운 반응을 보였다. 오히려 설명을 한 우리가 당황할 정도였다.
‘제 말을 믿으십니까?’
‘던전이 생겨난 이후로 세상은 늘 멸망의 위협에 시달렸습니다. 이제 와 외부의 적이 나타난대도 이상할 건 없죠.’
‘아니, 그래도…….’
‘그리고 한우리 길드장이 구태여 시간 써 가며 그런 거짓말을 할 것 같지 않군요. 감수성이 풍부할 나이도 지났고.’
그래서 믿는다는 거야, 안 믿는다는 거야.
욕인지 아닌지 모를 말을 남기고 육재희는 다시 오겠다며 일단 돌아갔다.
“천창현은 아직 아무 말도 없지?”
“응. 정신계 헌터가 붙어서 심문하고 있는데 잘 안 통하네.”
“무슨 말이든 하게 만들어. 누가 이기나 어디 해 보자고.”
그리고 일주일의 시간이 흐른 뒤. 사건이 터졌다.
헌터 다섯 명이 동시 폭주하며 도심을 혼란으로 물들였다. 그중에는 B급 헌터도 있어서 막대한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
양설과 왕호연에게 연락해 사정을 알아보니 천창현이 붙잡힌 그 날을 기점으로 약국이 문을 닫았다고 했다.
갑작스럽게 약물의 공급이 끊기자 중독자들이 미쳐 날뛰기 시작했고 긴장이 고조되고 있는 와중, 어느 늦은 밤.
잡화점으로 위장했던 마약 판매점을 괴한의 무리가 습격했다.
그들은 전부 일반인으로, 중증 중독자들이 부작용으로 인한 갈증과 불면증, 이명을 이기지 못하고 잡화점을 털러 온 것이었다.
습격한 무리 중에는 K미디어 대표 최인호도 있었다.
이로 인해 ‘나비’가 수면 위로 드러나면서 미디어를 뜨겁게 달구었다.
‘나비’는 생각보다 더 깊게 사회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고 그 후폭풍이 몰아치고 있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길드로 지원 요청이 계속 들어왔고, 미리내와 길드 소속 힐러들은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사태를 수습해야 했다.
뉴스 클립을 보던 우리가 미간을 문질렀다.
“이거였어, 천창현이 노린 게.”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던 거네. 사람이냐?”
“탈주한 천창현 팀이 움직이는 건가?”
“그렇다고 봐야지. 만약 자신이 붙잡히면 어떻게 움직일지 매뉴얼을 남긴 거겠지.”
우리와 유하, 인찬이 동시에 탁자에 엎드렸다. 첩첩산중이었다.
“앞으로 어떻게 나올 것 같아?”
“협박하겠지. 사람들을 살리고 싶으면 천창현을 돌려보내라, 이렇게.”
“풀어줄 거야?”
“풀어주겠냐. 미치겠네.”
그때 사무실로 들어온 은새가 암울한 분위기를 풍기는 친구들을 보고 눈을 깜빡였다.
“얘들아, 나 오다가 이런 거 받았어. 음, 누가 주워 줬다고 해야 하나?”
“뭔데?”
“뭐야. 길거리에서 나눠 주는 전단지 아니야?”
눈동자를 굴려 은새가 들고 있는 뭔가를 본 친구들의 눈빛이 일변했다.
[사람들을 살리고 싶으면 아래 장소로 유은새 헌터 혼자서 와 주세요. 절대 다른 사람한테 알리면 안 됩니다.]
화려한 나비 문양이 그려진, 발신인이 없는 초대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