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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키운 마수가 드래곤을 물고 왔다 (179)화 (179/190)

178화 – 그러니 저도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자세한 설명을 요구하는 시선에 왕호연이 입을 뗐다.

“블랙이 처음 나타난 건 약 반년 전이라고 합니다. 그 세계가 원래 그렇듯 어느 날 갑자기 홀연히 모습을 드러낸 그는 상식을 벗어난 무력으로 단기간에 기존에 있던 세력을 와해시키고 중심이 되었습니다. 그다음은 온갖 불법적인 사업에 손을 대 부를 축적했고요.”

듣기로는 반년 새 그자가 쓸어 담은 돈이 한강을 다 메울 정도라더군요.

그가 농담 같은 말을 했다.

“손속 더럽기로 유명한 자들도 그 사람 밑으로 들어가 지금은 뒷세계의 왕이나 다름없다고 합니다. 블랙의 인상착의와 행동양식이 천창현과 상당 부분 유사해 저희는 두 사람을 동일 인물로 보고 있습니다.”

“솔직히 말이 안 되잖아? 중국이나 한국이나 뒷세계 생리는 비슷할 텐데, 인간이 어디까지 악랄해질 수 있는지 시험하는 곳에서 숴우 링(首领, 우두머리)을 먹었다? 보통 놈이 아니지. 가요보다 사람 비명 소리를 더 많이 듣는 놈들이 투표해서 대장을 뽑지는 않을 거 아냐.”

아, 한국은 또 다르려나?

양설이 사탕 막대를 질겅질겅 씹으며 킥킥댔다.

우리는 심각해졌다. 전국에서 일어나는 방화 사건과 헌터 납치, 신종 약물 ‘나비’까지.

그 모든 게 천창현이 사라지고 난 뒤 일어난 일이었다. 만약 정말로 그와 연관이 있다면.

“블랙이라는 자에 대해 더 알아볼 수 있습니까?”

“위험합니다.”

왕호연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이만큼 알아낸 것도 상당히 무리한 것입니다. 더 깊이 들어가면 이쪽의 정체가 발각되거나, 아무튼 불가합니다.”

“아니야, 할 수 있어.”

“설아!”

왕호연이 낮은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그러나 양설은 태평하게 말했다.

“길드장님이 그러라고 우리 월급 주는 거잖아? 이런 일 한두 번 해 본 것도 아니고. 우리에게 거는 기대가 있을 텐데 실망시켜 드리면 안 되지.”

“…….”

우리가 난감한 기색을 했다. 실마리를 잡았으니 다른 사람을 투입해도 되겠지만 그로서는 하던 사람이 계속해 주는 편이 나았다.

천창현이 그토록 뒷세계에 익숙하다면 이쪽도 그에 걸맞은 선수를 보내는 게 위험 부담을 줄일 수 있었다.

양설과 왕호연을 데려올 때 이 부분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었으나 그들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양설 헌터, 왕호연 헌터. 힘든 일이라는 건 잘 알지만 저희는 그자를 꼭 찾아야만 합니다.”

“길드장님.”

“지원은 얼마든지 해 주겠습니다. 정 어렵다고 판단되면 물러나도 되지만 못 하는 게 아니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비용 청구되지?”

양설이 쓰레기를 놓아둔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의 표정이 밝아졌다.

“얼마든지 하세요.”

“좋아. 금액 보고 나중에 후회하지나 마.”

“설아…….”

왕호연은 탐탁지 않다는 반응이었지만 끝내 안 한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두 사람 다 몸조심하세요.”

그 말밖에는 할 말이 없어 우리는 떠나는 그들을 배웅했다.

***

은새는 강원도 집이 아닌 길드 근처에 위치한 레지던스로 퇴근했다. 시국이 불안정하다 보니 별이, 봄이를 포함한 소형 마수들과 이곳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도다리와 하늘이 같은 대형 마수들은 길드에서 지냈다.

씻고 나오자 벨키오르가 기다렸다는 듯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코코아를 그녀의 손에 쥐여 주고 촉촉이 물기를 머금은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자잘한 입맞춤은 뺨과 코를 거쳐 입술까지 도달했다. 은새가 쿡쿡 웃으며 고개를 뒤로 빼려는 걸 벨키오르가 뒷목을 잡아 부드러이 입술을 겹쳤다.

“간지러워요.”

“좋은 향기가 나.”

“이 향이 마음에 드세요? 제품 바꿀까요?”

“딱 보기 좋게 붉어져서 깨물면 단물이 흐를 것 같군.”

그녀가 사용한 제품은 사과 향이었다. 벨키오르가 은새의 살갗을 아프지 않게 깨물자 안 그래도 붉던 그녀의 피부가 홍옥처럼 물들었다.

“그런 말을 어떻게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하세요?”

“왜?”

맞다. 이분 이런 쪽으로 별 자각이 없으시지…….

벨키오르는 모처럼 둘만의 단란한 시간을 만끽했다. 접촉이 깊어지려는 그때, 어딘가 시선이 느껴졌다.

안쪽 방에서 쿠션으로 둥지를 틀고 잠들어 있는 봄이를 제외한 별이와 황새, 백합이가 두 사람을 빤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은새가 화들짝 놀라 벨키오르의 어깨를 밀어냈다. 이유를 몰라 버티던 그는 다급한 그녀의 손길에 마지못해 밀려 주었다.

“얘들아!”

“누나! 우리 이거 해여!”

해맑은 표정으로 별이가 들고 온 것을 내보였다. 두 사람이 뭘 하고 있었는지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기색이었다.

“어, 어…… 그래. 그게 하고 싶어?”

“네!”

깍깍!

쉬이익.

그건 같이 외출했다가 별이의 눈에 띄어 구입한 어린이용 매니큐어 세트였다. 은새가 빠른 손놀림으로 헝클어진 머리와 차림을 정돈했다.

그걸 못마땅하게 보던 벨키오르가 나지막하게 별이를 불렀다.

“별.”

“왜요, 아빠?”

“꼭 지금이었어야 했나?”

“후웅?”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별이가 머리를 갸웃했다. 아이는 은새의 손을 잡아끌어 거실로 데려갔다.

은새가 가면 벨키오르는 자동이었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탁자에 매니큐어를 늘어놓고 뿌듯하게 웃던 별이는 고심하다가 하나를 집어 들었다.

“누나, 누나! 나 이 색 바르고 싶어요~”

하필 별이가 고른 건 반짝이가 들어간 보라색이었다.

짧은 등장이었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하야트가 생각나 은새는 어색하게 눈동자를 굴리다가 별이의 마력을 닮은 노란색 매니큐어를 가리켰다.

“별이야, 한 가지 색으로만 칠할 거야? 나는 이 색도 예쁜 것 같은데.”

“응? 그런가아……?”

끙끙거리며 고민하던 별이는 열 손가락에 매니큐어 전부를 바르기로 결정했다.

은새는 해바라기처럼 손을 활짝 편 별이의 손톱을 알록달록하게 칠해 주었다. 황새와 백합이도 바르겠다고 나서서 황새는 발톱에, 백합이는 스티커를 비늘에 붙여 주었다.

“히히, 누나랑 아빠두 해요!”

“응? 아빠도?”

은새가 벨키오르를 돌아봤다. 그녀 본인은 상관없지만 벨키오르가……?

콧잔등을 설핏 찡그렸던 벨키오르는 지속된 별이의 요청에 순순히 양손을 내어 주었다. 아이가 서툰 손길로 그의 가지런한 손톱에 색을 입히기 시작했다.

진지한 부자의 모습에 은새가 참지 못하고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푸핫.”

“왜 웃지?”

“그냥, 보기 좋아서요.”

벨키오르는 매니큐어가 엉망진창으로 삐져나온 손톱을 곁눈질했다. 이게?

“아뇨. 붕어빵처럼 똑 닮은 아빠와 아들이 나란히 몰두하고 있는 게요.”

“다 됐다! 누나, 다 했어요! 잘했죠~”

별이는 아빠의 손톱을 다 칠한 게 만족스러운지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벨키오르는 현란한 색을 입은 본인의 손톱을 내려다보다가 슬쩍 외면해 버렸다.

그게 또 웃겨서 은새는 하하, 소리 내어 웃었다.

한참을 뛰어논 별이와 마수들의 낮잠 시간이 되고, 은새가 틀어 놓은 뉴스만 집 안에 조용히 울려 퍼졌다.

벨키오르에게 기대 뉴스를 보고 있던 은새가 심각하게 질문했다.

“지금 이 세계에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포식자들과 관련이 있을까요?”

“아마 그럴 거다.”

“네?”

긍정의 대답이 돌아올 줄은 몰랐던 은새가 몸을 일으켜서 그를 바라봤다. 그녀의 시선을 마주한 채로 벨키오르가 말했다.

“씨앗이 ‘문’을 열기 위해 태동하고 있다. 다만 성급하군.”

“무슨 뜻이에요?”

“아직 시기적으로 무르익지 않은 걸 앞당기려 하고 있어. 단계를 밟지 않고 무리하게 강행하려 하니 기계로 따지면 오작동을 일으키는 것이지. 던전, 그러니까 외부 세계와 연결된 통로가 폐쇄된 것도 그 일환이다.”

은새의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렸다.

“그럼 이 세계는……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거죠? 던전이 아예 사라질 가능성도 있나요?”

“포식자가 완전히 이 세계에서 손을 떼면 어쩌면 그도 가능하겠지. 최소 백 년 정도의 시간이 걸릴 거다. 하지만 지금은 반대로 던전이 폭주할 것을 염두에 둬야 한다. 비정상적인 흐름은 문제를 일으키기 마련이니까.”

“그런…….”

벨키오르는 불안해하는 은새를 잠자코 지켜보았다. 사실, 걸리는 게 더 있었으나 은새에게 걱정거리를 얹어 줄 수는 없었기에 말을 아꼈다.

확실한 것도 아니었고.

‘위그드라실에게 다녀와야겠군.’

그런 생각을 하며 벨키오르가 은새의 의중을 물었다.

“은새, 그대는 어떻게 하고 싶지?”

“네?”

“설사 최악의 상황이 벌어진다고 해도 그대만은 안전할 것이다. 내가 모든 위험으로부터 지킬 테니까. 하지만 다른 이들은 아니지.”

“저는…….”

은새가 말꼬리를 흐렸다.

“그대에게 이 세계를 구원할 소명은 없다. 냉정하게 들릴지 모르나 그대의 힘은 미약해. 포식자들에게 대항할 수 없다. 씨앗을 찾아 없애는 게 현재로서는 가장 현실성 있는 방법이다. 하지만 만약 실패한다면?”

“하지만 이 세계의 인간은 저만 있는 게 아닌걸요.”

곰곰이 생각에 잠겼던 은새가 의외로 산뜻하게 답을 내놓았다.

“모두가 이 세상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요. 이건 포식자가 이 세계를 노리고 있는 것과는 별개로, 격변의 시대가 왔을 때만 해도 그랬어요. 일상을 지키고,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고. 인류를 지키기 위해 싸웠어요. 그러니 저도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그렇군. 그대의 뜻을 존중한다.”

두 사람은 한동안 시선을 맞추었다. 너무 진지하게 대답했나 싶어 은새가 멋쩍어하는데, 갑자기 벨키오르가 몸을 일으켰다.

“어디 가세요?”

“잠시 그대의 집 뒷마당에 있는 세계수 분목을 보고 오지.”

“어? 왜요?”

벨키오르가 소중한 것을 대하듯 은새의 뺨을 쓸어내렸다.

“왠지 지금보다 더 성장시켜 두어야 할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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