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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키운 마수가 드래곤을 물고 왔다 (177)화 (177/190)

172화 – 역린

“이게 무슨!”

지금까지와 다르게 라크웰이 명백한 동요를 보였다. 파편이 되어 부서진 대검은 원래의 형체를 찾아보기 힘들었다.

무기로서 완전히 가치를 잃은 창대를 허망하게 바라보던 라크웰의 이마에 핏대가 섰다.

그 모습을 본 우리는 의외로운 감정을 느꼈다. 험하게 써서 몰랐는데 꼴에 제법 애착을 지닌 무기였던 듯싶었다.

“내 검에 무슨 짓을 한 거냐!”

“같은 방식은 시시하다고 해서. 변칙을 줘 봤지. 그런데 꽤 잘 먹혀들었나 봐? 표정을 보아하니.”

목구멍을 비집고 올라오는 핏물을 꿀꺽 삼킨 우리가 비릿하게 웃었다. 드디어 한 방 제대로 먹였다는 생각에 실실 웃음이 새어 나왔다.

계획을 세울 때 우리는 라크웰을 해치우기 전 그의 무기부터 없애고자 했다.

치명타에 가까운 부상을 입어도 남자의 의욕은 꺾이지 않았다. 오히려 전투가 치열해질수록 흥분하는 게, 정신력 싸움으로 가면 필패였다.

그래서 목표를 바꿔 그의 무기를 노렸다. 무기 사용자라면 누구든, 무기를 잃는 순간 크게 동요하고 만다.

전투력 하락도 꾀할 수 있으니 그런 의미에서 김우종의 능력은 큰 도움이 됐다. 어지러운 전장에서 무력이 충돌할 때의 결을 읽고 베어 내는 능력.

그것은 무기에도 적용되었다. 같은 자리만 계속해서 충격을 가한다면 아무리 단단한 물질이라도 결국 균열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

생각보다 오래 걸렸지만 그래도 성공했다. 축적된 데미지로 인해 라크웰의 검은 버티지 못하고 깨져 버렸다.

“이 새끼가!”

“윽!”

포환처럼 날아온 라크웰이 우리를 향해 흉기나 다름없는 주먹을 휘둘렀다. 그가 회피하자 어깨의 부상 부위를 틀어쥐고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었다.

파고드는 악력에 우리는 채 비명이 되지 못한 소리를 속으로 삼켰다.

“훅, 훅!”

눈이 뒤집힌 라크웰은 그야말로 아무것도 뵈는 게 없는 듯했다.

“네놈이, 이 새끼가!”

“큭, 너…… 같은 새끼 잘 알아. 너 말고 다른 인간은 다 버러지로 생각하지? 그러니 내가 꿈틀하니까 열받은 거지? 누군가 네놈을 위협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닥쳐!”

라크웰의 눈동자에 분노가 지글지글 들끓었다. 우리는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는 척, 몸을 비틀어 쓰러진 육재희를 등으로 가려 라크웰의 시선이 닿지 못하게 했다.

죽었는지 살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에게 분풀이라도 하게 될까 봐.

크르렁!

그때 은새의 나이스 어시스트로 하늘이가 라크웰을 급습해 팔뚝을 물어뜯었다. 알아들을 수 없는 욕을 짓씹으며 그가 거칠게 뿌리쳤다.

간신히 라크웰의 손에서 풀려난 우리는 포션을 마실 시간도 없이 안 움직이는 팔로 검을 들었다.

다시 연꽃이 허공을 수놓으며 시야를 교란시켰다.

“무기가 없어도 네놈 따위가 나를 어떻게 할 수 있을 것 같으냐!”

라크웰은 어마어마한 괴력으로 검무를 파훼해 갔다. 그런데 불현듯 시야가 캄캄해졌다.

“……뭐지?”

“하, 너무 오래 걸렸네. 괴물이야?”

라크웰의 이상을 감지한 우리가 검무의 속도를 늦췄다. 실은, 다신 검을 들지 못하게 되는 건 아닐지 두려울 만큼 무리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라크웰은 조금 전과 다르게 반응 속도가 눈에 띄게 느려졌다. 몇 번은 짐승 같은 감으로 우리의 공격을 피했지만 결국 유의미한 타격을 허용하고 말았다.

우리는 훌쩍 떨어져서 혼란스러운 표정을 한 라크웰의 기색을 살폈다. 지금 그는 시야가 암전되고 본인의 목소리마저 사방을 울리듯 아득히 멀게 들릴 터였다.

꾸준히 흡수된 암혈이 라크웰의 신경 체계를 완전히 망가뜨린 것이었다. 마치 검은 방에 가두어진 것처럼.

시각, 청각을 잃는 것부터 시작해 나중에는 자신이 어떻게 움직이는지조차 인식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어두운 밤, 망망대해에서 태풍을 만나 침몰해 가는 배처럼.

“독…… 독이구나!”

“그래, 네가 무시했던 그 독.”

“불가능하다, 이 내가 독에 당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기간티아의 독도 통하지 않았던 나인데!”

원래 우리의 고유 능력인 암혈은 이 정도 위력을 낼 수 없었다. 하지만 한계를 넘어서는 인찬의 싸움을 보고 그 역시 자극받았다.

쿨럭.

검게 죽은 피를 뱉어 낸 우리가 땅을 박차고 튀어 나갔다. 땅으로 죽죽 끌어당겨지는 것처럼 내딛는 걸음걸음마다 무거웠다.

그래도 필사적으로 달렸다. 벽을 깨부수는 데 필요한 한 걸음.

보이지 않아도 느껴지는 게 있는 듯 라크웰이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이미 우리의 칼끝은 그를 향해 쇄도하고 있었다.

암중봉연 몽매(夢寐).

여태 우리가 펼쳤던 검술과 비슷하면서도 궤가 다른 화려하게 피어나는 검은 연꽃이 숨 막히도록 짙은 향기를 뿜어냈다.

사악!

툭, 데구루루…….

싸하게 내려앉은 정적. 분명 다른 이들의 전투는 계속되고 있었으나 우리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땅을 구른 라크웰의 머리가 더는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되었을 때 서서히 꿈에서 깨어나듯 세상이 소리를 되찾았다.

우리는 선 채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

***

하야트는 벨키오르의 검에 몇 번이고 사지가 잘렸다 재생되면서 지독한 굴욕감을 맛보고 있었다.

“컥!”

박살난 어깨가 채 재생되기도 전에 폐부에 들어박힌 검이 끔찍한 고통을 선사했다.

“천박한 리치 같군.”

살기를 담아 노려보는 하야트에게 벨키오르가 경멸하듯이 말했다. 그는 언뜻 평소와 다름없어 보였으나 은새가 위협당한 일로 서늘하게 분노하고 있었다.

자신이 조금만 늦었으면 은새가 어떻게 됐을지 생각만 해도 피가 차갑게 식었다. 그래서 답지 않게 손속이 거칠어졌다.

“고작 신들의 개 노릇을 하는 주제에 고고한 척하지 마라!”

“뚫린 입이라고 아무 말이나 내뱉지 마라. 그럴수록 네 원죄만 깊어지는 것이니.”

“원죄?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잡아먹는 게 어떻게 원죄가 될 수 있지? 자연을 관장하는 것들이 그 말에 담긴 모순을 정녕 모르는 것이냐!”

“네놈이 행한 짓은 자연의 섭리를 어지럽히는 일이다. 내가 아니었어도 조만간 단죄가 따랐을 터.”

서릿발 같은 시선을 마주한 하야트는 본능이 보내오는 경고를 무시했다.

드래곤의 권능을 몇 개나 흡수했는데도 이만한 무력 차이가 나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게다가 상대는 본체로 현신한 것도 아닌데.

‘망할 신들이…….’

그자들이 ‘선고’인지 뭔지를 하면서 시작의 드래곤에게 특수한 힘을 부여한 게 틀림없었다. 하야트는 이것이 절대 순수한 벨키오르의 무력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그가 죽인 드래곤의 수가 많았다. 같은 드래곤인데 이 정도로 차이가 난다고?

하야트가 파랑의 권능을 담아 검을 휘둘렀다. 밤하늘을 뒤덮는 거센 파도가 벨키오르를 집어삼킬 듯 범람했다.

그러나 일격으로 파도를 가른 그는 물 한 방울도 튀지 않은 멀끔한 모습으로 다시 나타났다.

파도가 지상에 영향을 미칠 기미를 보이자 벨키오르는 공간을 비틀어 상쇄시켰다. 덕분에 지상의 헌터들은 하늘에서 벌어지는 전투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됐다.

“하! 인간을 반려로 맞이했다더니 웃기는 짓을 하는군. 인간을 혐오한다고 알려진 시작의 드래곤이 저들에게 관용을 베푼다고 하면 그 누가 믿겠나?”

“…….”

“그 인간 여자가 그리 대단한가? 오만한 드래곤에게 심경의 변화를 일으킬 만큼?”

벨키오르는 대꾸할 가치를 못 느꼈다. 그는 인간을 혐오하지 않았다. 그저, 인간의 생태와 맞지 않아 거리를 두었을 뿐.

“아니면 그 잘난 유희인가?”

“뭐?”

“유희라면 하등한 인간을 사랑하는 척하는 것도 어렵지 않겠어. 이기적인 드래곤이 진심으로 인간에게 정을 줄 리 없으니까.”

이 말만은 도저히 그냥 들어 넘길 수 없었다. 도발하는 걸 알아도 드래곤에게 반려에 관한 사항은 역린이나 마찬가지였다.

은새는 저따위 말을 들을 존재가 아니었다.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지? 처음부터 제정신으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광증이라도 도진 건가?”

“내 말이 틀렸나? 저 여자에게서 자식을 봐도 인간도, 드래곤도 아닌 반쪽짜리겠지! 효용 가치가 없는 부산물을 드래곤들이 동족으로 인정이나 하겠나!”

하야트가 악에 받쳐서 소리를 내질렀다.

미간을 찌푸렸던 벨키오르가 서릿발처럼 차디찬 눈빛을 했다. 은새가 아닌 이자와 이런 주제로 말을 섞는 게 불쾌했다.

“네놈이 아비에게 버림받은 반쪽짜리라 그런 식으로밖에 생각할 수 없는 모양이군.”

“……!”

“반려에게서 태어난 아이라면 어떤 모습이라도 사랑스러울 터. 드래곤에게 해츨링은 가진 능력이 크든, 작든 보호해야 할 개체다. 아마 그 아이는 나와 내 반려의 애정을 충만히 받으며 자라겠지. ‘효용 가치가 없는 부산물’인 너는 모르겠지만.”

“입 닥쳐!”

하야트의 눈앞에 뒤도 안 보고 떠나는 무정한 아비의 모습이 그려졌다. 신의 정을 품었다는 이유만으로 가문에 유폐되어 하루하루 말라 가던 어미도.

둘 중 누구도 부모라고 할 수 없었다. 똑같은 반쪽짜리인데 처지는 극명했다. 상상만으로 불같이 분노가 치솟았다.

“으아아아!”

하야트의 검 끝에서 여러 갈래로 뻗어 나온 오러가 대기를 찢었다. 신력과 드래곤의 권능을 남용한 몸이 으스러졌다가 다시 재생되면서 끔찍한 통증을 유발했다.

그럼에도 하야트는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미친 듯이 검을 휘둘렀다. 반드시 시작의 드래곤을 죽여 생명의 권능을 취하고, 부족한 신격을 채워 신계에 올라 제 아비를 비웃어 줘야 했다.

금빛 마법진이 번쩍번쩍 휘감기며 하야트의 검로를 방해했고, 그의 발악에도 명백한 힘의 우위는 벨키오르에게 있었다.

콰과과!

암석 바위에 처박힌 하야트의 목걸이에서 빛이 나더니 스르륵 빠져나온 드래곤의 권능이 벨키오르에게 날아갔다.

그렇게 하나, 둘…….

‘아뿔싸!’

신력을 극한으로 운용했기에 더 이상 드래곤의 권능을 붙잡아 둘 여력이 없었다. 하야트가 다급하게 지상의 전황을 살폈다. 권능을 더 빼앗기기 전에 전력을 보충해야 했다.

그런데 알아서 잘 싸우고 있을 거라는 예상과 달리 라크웰과 쿠랄은 이미 죽었고, 센도라는 뇌전룡의 위엄을 가감 없이 떨치는 목화시를 상대로 고전하고 있었으며, 바스코는 하얀 일화를 피워올린 솔에게 절명하기 직전이었다.

마수들에 둘러싸인 밀라니온은 살아날 방도가 없어 보였다.

‘저 멍청한 것들이!’

그때 하야트의 눈에 조룡 마수를 타고 마수들을 지휘하는 은새가 들어왔다. 순간, 붉은 눈동자에 이채가 감돌았다.

하잘것없는 인간인데, 그녀만 특별하게 느껴져서 배알이 뒤틀렸다. 제 어미나 저 여자나 다를 바가 없을 텐데 어째서!

벨키오르의 마법이 닿기 전 하야트의 신형이 사라졌고, 억센 팔이 은새의 목을 틀어쥐었다.

깜짝 놀란 검은 눈동자가 그를 돌아봤다.

“모두 멈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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