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화 – 당신은……?!
“바, 방금 그거 뭐였어?”
비현실적인 광경을 목도한 헌터들이 얼빠진 소리를 냈다. 서로를 쳐다봤으나 답을 줄 수 있는 이는 없었다.
심연이 사라진 자리.
하야트는 사라졌지만 그가 내지르는 끔찍한 비명은 허공에 공허히 울려 퍼졌다.
으악, 으아아악, 악…….
솜털이 곤두설 만큼 처절한 소리였다. 도시 몇 개를 파괴하고 사람들을 학살할 정도로 잔인한 남자가 이런 소리를 낼 거라고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모습은 보이지 않는데 비명 소리만 유독 선명해서 괜한 상상을 불러일으켰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베, 벨키오르 님. 그 사람은 어디로 사라진 거예요?”
“이면 세계. 그 정도만 알고 있으면 된다. 모든 것에는 앞과 뒤가 있듯, 보이는 것만이 전부는 아니니.”
“그럼…… 이 소리는 언제까지 들려요?”
“곧 문이 완전히 닫힐 거다. 그러면 저자는 영원히 헤어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겠지. 영혼이 닳아 없어질 때까지.”
마치 하야트가 눈에 보이는 것처럼 벨키오르가 눈매를 가느스름하게 좁혔다.
그는 많은 설명을 하지 않았지만 눈빛만으로 오싹해져 와 은새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모르긴 몰라도 벨키오르가 단언했던 만큼 최악의 지옥이 펼쳐질 게 눈에 훤했다.
어느새 세상을 뒤덮었던 인과율은 공기 중으로 녹아들듯 사라졌고, 어스름한 하늘을 밝히며 동이 터 오고 있었다.
“하야트 님!”
그리고 살아남은 언노운은 낭패라는 얼굴을 했다. 믿었던 하야트의 몰락에 그들은 낙동강 오리알 신세로 전락했다.
하야트의 능력으로 이 세계에 건너왔으니 그가 없으면 되돌아갈 수조차 없었다.
결국, 그들은 억류되어 자신들이 저지른 일에 대한 온당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벨키오르는 은새를 추어올리고 마력을 일으켜 그들의 몸을 속박했다. 거의 죽기 직전인 바스코나 밀라니온은 목숨만 붙여 두었다.
그들도 하야트를 따라다니며 드래곤을 살해하는 데 일조한 건 마찬가지이지만 은새 덕분에 인간사회에 대한 상식을 습득한 벨키오르는 헌터들에게 ‘성과’가 필요하다는 걸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어차피 저들이 죽으면 가게 될 곳 또한 심연이었다. 그들의 영혼에 쌓인 업은, 사라지지 않았으니까.
“많이 지쳐 보이는군. 그대도, 저 인간들도.”
갑작스레 종료된 전투에 지상의 헌터들이 얼떨떨해하고 있었다. 그들은 살아서 본 일출에 다양한 소회를 느끼는 듯했다.
긴장이 풀린 유하가 휘청거리는 걸 미리내가 부축하는 게 보였다.
“그래도 한고비 넘겼네요……. 벨키오르 님도 할 일이 끝나신 거죠?”
“그래.”
“벨키오르 님이 타 주시는 코코아가 먹고 싶어요. 집에 있는 별이랑, 봄이. 아이들도 보고 싶고요.”
“돌아가면 얼마든지 타 주지.”
황해도 지역으로 떠났던 헌터들이 돌아오자 자칫 큰 재앙이 될 뻔했던 이들을 처단한 것에 대한 찬사가 줄을 이었다.
게다가 몇몇은 생포에 성공했으니 그야말로 축제 분위기였다. 언노운은 특수 범죄자로 수감되어 재판을 받게 될 것이었다.
다만 헌터들은 전투 후반부 상황에 대해 말을 아꼈는데, 벨키오르가 그들의 기억을 조작했기 때문이었다.
하야트가 지껄인 말들과 벨키오르의 정체, 그리고 가시화된 인과율 등은 인간이 알아서는 안 될 영역이었다.
헌터들은 대강 엄청난 일이 있었고 자신들이 힘을 합쳐 언노운을 무찔렀으며 우두머리는 시체도 찾지 못할 만큼 처참하게 사살당했다 정도로만 기억했다.
그래서 결국 언노운이 찾던 ‘시작의 드래곤’이 무엇이었는지는 미궁에 빠져들었다. 각종 커뮤니티에서 추측성 글이 올라왔으나 정답은 없었다.
복귀한 헌터들은 힐러의 치유를 받고 대부분 귀가했으나 일부는 병원 신세를 졌다.
은새도 과도하게 이능을 사용했다는 이유로 정밀 검사를 받느라 며칠 입원했다가 드디어 강원도 집으로 돌아왔다.
“얘들아!”
“뉴나!”
삐잇!
감격적인 상봉이었다. 언제나 그렇듯 별이와 봄이가 가장 먼저 달려와 은새에게 안겼고, 황새와 백합이, 쪼쪼가 뒤이어 그녀를 둘러싸고 환영 인사를 했다.
떨어져 있던 기간을 보상받으려는 것처럼 은새에게 찰싹 달라붙은 별이가 눈썹을 축 늘어뜨리고 칭얼거렸다.
“누나, 아픈 건 괜찮아요? 누나 보러 가구 시펐는데, 아빠가 못 가게 하구. 힝.”
“아팠던 거 아니야. 검사받느라 입원했던 거지. 우리 별이, 며칠 못 봤을 뿐인데 쑥쑥 컸네? 봄이도.”
그녀의 입원 소식에 기자부터 시작해 팬들까지 온갖 사람들이 병원에 몰려들어서 외부인의 출입을 엄금했다. 대한민국 최초의 SS급 헌터의 출진이었던 만큼 그녀의 활약을 듣고자 하는 이들이 많았다.
솔직히 마법으로 몰래 오갈 수도 있었지만 회복에 집중하라며 벨키오르가 만류했다. 직접 회복 마법을 걸어 줬기에 은새가 아픈 곳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랬다.
덕분에 요 며칠 외부와 격리된 1인실에서 벨키오르와 단란한 시간을 보냈다.
은새는 그새 묵직해진 아이들을 둥개둥개 얼렀다. 애들은 눈 떼면 큰다더니 지켜보지 못한 시간이 조금 아쉬웠다.
까악깍.
쉭.
“황새 너, 집 살피러 와 준 길드원한테 다 들었어. 나 없다고 냉장고도 마음대로 뒤지고 산책 나가면서 창문 안 닫아서 집을 얼음장으로 만들었다며? 욕실 바닥을 물바다로 만들어 놓고. 혼내는 사람 없다고 아주 멋진 시간을 보냈나 본데. 백합이 너는 공범이고.”
두 마수가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며 못 들은 척을 했다.
“어휴, 정말. 쪼쪼야, 네가 애들 돌보느라 고생 많았다.”
은새가 쪼쪼의 목을 쓰다듬어 줬다. 고불고불한 청백색 털이 손가락에 감겼다. 빗질 좀 해 줘야겠네.
유독 잠이 많아져 어느새 고롱고롱 조는 봄이를 안아 들고 은새가 방으로 들어갔다.
그녀를 집에 데려다준 뒤 벨키오르는 원래 세계로 가 신들에게 사후 보고를 했다. 그런데 되돌아온 벨키오르의 표정이 묘했다.
불쾌한 듯, 애매모호한 표정.
“벨키오르 님, 왜 그러세요? 뭐가 잘 안 됐어요?”
“아니. 잘 끝내고 왔다.”
마수들과 다 함께 고구마를 구워 먹고 있던 은새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금방 감정을 숨긴 벨키오르가 거뭇거뭇해진 그녀의 손을 손수 닦아 주었다.
그리고 대신 고구마를 까서 그릇 위에 올려 두었다. 까 놓는 족족 마수들이 입에 집어넣었다.
신계에서 나온 벨키오르는 신역에 들렀다가 곧장 돌아오려고 했다. 그런데 그가 그럴 걸 알고 있었던 것처럼 아케이아가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수고했어, 벨키오르. 반려는 무사하지?’
‘내 앞에 무슨 염치로 나타난 거지?’
아케이아에 대한 감정이 좋을 수 없는 벨키오르는 불쾌감을 여실히 드러냈다. 하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반려의 위험을 숨긴 건 미안해. 하지만 반드시 일어나야 할 일이었어. 그리고 결과가 나쁘지 않았잖아.’
‘반드시라는 건 없다, 아케이아. 모든 게 예지대로 흘러갈 거라고 자만하지 마. 조금만 어긋났어도 내 반려의 운명은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일순 멈칫한 아케이아가 하얀 눈동자로 물끄러미 벨키오르를 쳐다봤다. 눈가가 미세하게 휘어졌다.
‘마음 풀리면 언제든 내 레어로 와. 도움이 필요해도. 기다릴게.’
아케이아가 먼저 레어로 초대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걸 아는 벨키오르는 떠름한 기분이 들었다.
미안해서? 말은 미안하다고 하지만 그녀가 진심으로 그런 생각을 할 리 없었다.
“누나앙~”
벨키오르는 은새의 무릎 위에 앉아 애교를 피우는 별이에게 무심한 얼굴로 고구마를 하나 쥐여 주었다.
***
금방 퇴원한 은새와 달리 우리와 인찬은 아직도 병원 신세였다.
“그래도 이 핑계로 푹 쉬니까 좋다.”
“태평한 소리 하지 마. 업무가 산처럼 쌓였다고.”
병문안을 온 미리내가 사 온 귤을 꺼내 주며 우리를 타박했다. 하지만 늘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는 그가 이 기회에 쉬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인찬아, 너는 좀 어때?”
“으응……. 많이 좋아졌어.”
두 사람 다 이능 회복이 잘 안 되고 있었다. 시간이 해결해 줄 문제라 덕분에 미리내가 왔다 갔다 고생 중이었다.
그녀는 잔소리를 가장한 걱정을 한바탕 쏟아 낸 후 길드로 돌아갔다.
멋없는 펑퍼짐한 병원복을 입고 한량 백수처럼 종일 병실에 누워 있던 우리는 새벽녘, 잠에서 깨어 휴게실로 갔다.
잠은 더 이상 안 올 것 같았고, 아침 식사가 나오기 전까지 적당히 시간을 때울 요량이었다.
‘녹차 라떼나 마실까…….’
하지만 정작 자판기 앞에 선 우리는 녹차 라떼와 이온 음료 중 고심했다. 녹차 라떼는 입안이 텁텁해서 밤에 먹기는 좀 그렇지.
그런데 정전이라도 난 듯 갑자기 휴게실의 불이 꺼졌다.
“뭐야? 불이 왜 꺼져.”
우리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S급의 시력에는 아무런 제약이 되지 않았으나 유독 컴컴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스위치를 찾아 돌아다니는데 문득 솜털을 곤두세우는 한기가 끼쳤다. 그가 일상적으로 접하는 살기와 달랐다.
‘설마?’
귀신……?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우리는 닭살이 돋은 팔뚝을 쓸어내렸다. 마수나 살수라면 모를까, 귀신은 그도 싸워 본 경험이 없었다.
병원을 배경으로 한 괴담이 순간적으로 몇 개쯤 떠올랐다.
‘아니야, 아니겠지.’
바짝 긴장한 우리가 신경을 곤두세우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는데 그가 있는 공간에서 웬 낯선 기파가 느껴졌다.
“누구냐!”
금세 무기를 꺼내 든 우리가 무언가를 발견하고 눈동자가 커졌다.
“당신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