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화 – 최악의 지옥을 선사해 주마
주변을 환하게 물들일 번개가 내리쳤다.
죽은 백찬민 이전에 뇌전룡이라 불리던 목화시가 번개를 손에 쥐고 센도라와 격돌하고 있었다.
양희진이 물 속성 스킬로 보조하며 감탄했다.
‘우리 길드장님 역시 대단해! 한우리 오빠나 다른 헌터들한테 결코 밀리지 않아!’
혜화 길드는 도천이나 골드스타 길드에 비해 명성이 다소 떨어졌지만 목화시 길드장만은 예외였다.
그녀는 혼란스러운 시대에 살아 있는 전설이라 불렸던 이였다. 중년의 나이임에도 뛰어난 신체 능력과 젊은 헌터들을 이끄는 노련한 카리스마로 수많은 업적을 남겼다.
이후 같은 전격 계열인 백찬민이 등장하면서 그의 쇼맨십으로 묻히는 감이 있었으나 당시의 목화시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그녀를 제일로 쳤다.
길드를 세운 뒤에는 영광은 젊은이들의 것이라 말하며 일선에서 물러났지만 여전히 중요 공략에는 참여했다.
그런 목화시의 명성이 이곳에서 다시 재현되고 있었으니 양희진은 심장이 뛰었다. 그녀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을 꼽으라면 단연 ‘뇌전룡 목화시’였으므로.
그때 문득, 양희진의 시야에 마수들과 함께 라이칸스로프를 상대하던 은새가 그녀의 키만 한 새하얀 장검을 꺼내는 게 보였다.
‘저건 카마엘의 검이잖아?’
톈진에서 악마종 푸르푸르를 처단한 그 검이었다. 마수들이 밀라니온을 붙잡고 있을 때를 노려 은새가 회심의 일격을 날리려던 그때였다.
그녀의 검이 밀라니온에게 채 닿기도 전, 허공에서 튀어나온 손이 은새의 목을 틀어쥐었다. 미처 반응할 새도 없이 벌어진 일이었다.
“은새 언니!”
“모두 멈춰라!”
양희진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어느새 나타난 언노운의 우두머리가 사나운 살기를 내뿜었다.
그의 포효에 지상의 헌터들이 돌아봤다가 사로잡힌 은새를 발견하고 사색이 됐다.
저 사람이 왜 여기 있지? 아니, 아까부터 왜 자꾸 유은새 헌터를 노리는 거야?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저 남자랑 싸우던 그분은 어디 갔어?
끼에에엑!
컹!
눈앞에서 은새를 빼앗긴 그녀의 마수들이 날뛰었다.
“이 멍청한 것들! 너희가 할 일을 잊은 거냐? 모여 있기만 했어도 이따위로 당하지는 않았을 텐데!”
“죄송합니다, 하야트 님.”
완드로 몸을 지탱하고 선 센도라가 고개를 푹 숙였다. 하야트가 없으면 개중 가장 머리가 잘 돌아가는 그가 통솔자나 다름없었기에 할 말이 없었다.
바르작거리는 은새를 억누르고 하야트가 몸을 틀어 벨키오르에게 외쳤다.
“움직이지 마라, 시작의 드래곤! 손 하나라도 까딱하는 순간 이 여자는 내 손에 갈가리 찢겨 죽는다.”
“…….”
“소중한 반려인데 그 꼴을 보고 싶은 건 아니겠지?”
“윽!”
우악스러운 손길에 은새가 눈매를 일그러트렸다. 하야트에게 붙잡힌 곳이 불안하게 맥박쳤다.
위험한 상황이었다. 벨키오르의 보호 마법은 전부 깨져 버렸고 이 자세로는 공격해도 역공당할 확률이 높았다.
인질이 되었을 때 인질범을 자극하지 말라는 매뉴얼을 떠올린 은새가 숨소리를 죽이고 기감을 곤두세웠다.
등장했을 때와 달리 하야트는 정상으로 보이지 않았다. 초재생 능력도 한계에 달했는지 부상이 그대로였고 쉴 새 없이 피를 토했다.
‘벨키오르 님은?’
거리가 멀어서 그의 모습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겉보기에는 하야트보다는 상태가 나아 보였다.
무슨 표정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으나 그가 크게 동요하고 있다는 것만은 느낄 수 있었다.
“생명의 권능과 더불어 드래곤의 권능을 모두 내놓고 자결해라! 그러면 이 여자의 목숨만은 살려 주지.”
“…….”
“내 말이 안 들리는 건가!”
그때까지 숨은 쉬고 있는 것인지 굳어 있던 벨키오르의 손이 움찔했다. 이전과 비교도 안 되는 서늘한 분노의 불길이 금색 눈동자에 점화되었다.
고려해 볼 것도 없는 말이었다. 권능을 넘기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자명한데 세계의 균형을 이루는 한 축으로서 그럴 수는 없었다.
그보다는 저자가 원하는 대로 해 준다고 해서 은새를 죽이지 않을 거라는 보장이 없었다. 은새라면 본인의 생명이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누군가의 희생을 바라지도 않을 것이었고.
벨키오르는 인과율이 집행될 때 이 세계와 지상의 인간들에게 미칠 여파를 줄이기 위해 단계를 밟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모든 걸 각오하고서라도 단번에 쳐죽이는 게 나았다.
오만방자한 반쪽짜리를 당장이라도 오체분시하고 싶었으나 은새가 휘말려 다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만으로 벨키오르는 망설여졌다.
그는 참담한 심정으로 은새를 바라봤다. 황당하다는 듯, 긴장한 얼굴이 망막에 아로새겨졌다.
은새가 가장 안전할 수 있는 방법은.
“유은새!”
그때, 살얼음판 같은 적막을 깨고 누군가 소리쳤다. 유하가 팽팽하게 시위를 당긴 채 활을 겨누고 있었다.
화살촉이 향한 방향은 하야트와 은새였다.
“김유하 헌터, 뭐 하는 거예요! 당장 활 내려요!”
“김유하, 미쳤어?!”
“김유하 헌터, 위험해요!”
경악한 헌터들이 유하를 말렸으나 그는 자세에 흔들림이 없었다. 단지 무서울 정도로 집중한 얼굴로 하야트를 노려보고 있었다.
‘유하가 왜?’
은새가 당혹스러운 시선을 내렸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유하가 느릿하게 입을 달싹였다.
움직이지 마.
입모양을 알아본 은새는 유하가 무슨 생각인지 곧장 알아차렸다. 그의 훈련을 자주 지켜봤으니까.
‘하지만…….’
은새가 떨리는 숨을 참았다. 마음 한구석에서 불안감이 요동쳤지만 유하의 필사적인 눈빛을 보니 결국 고개를 살짝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지금 누구보다 긴장되는 건 유하 본인일 테니 자신은 그저 믿어 줄 수밖에 없었다.
친구가 자신을 다치게 하지 않을 거라는 믿음. 그리고 부담감을 안고서도 나서 준 것에 대한 고마움.
은새가 속눈썹을 내리깔았다. 더 나은, 안전한 방법이 있을지 몰라도 시간을 끌어서 좋을 게 없었다.
유하는 심장이 바로 귀 옆에서 뛰는 것처럼 쿵쿵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땀이 차올라 당장이라도 손을 미끄러트릴 것 같았다.
뻣뻣하게 굳은 몸이 경련이라도 일으킬 듯이 저릿저릿했다.
“네놈! 이 여자가 죽어도 상관없는 거냐!”
“미친 새끼야, 내 친구 구하려고 이러는 거거든!”
긴장감 때문에 유하가 악을 질렀다. 저 보라돌이 자식 때문에 이게 뭐 하는 짓인지 모르겠다. 하여튼 생긴 것부터 마음에 안 들었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할 줄 아는 욕을 염불하듯 속으로 외웠다.
‘실패하면 은새가 죽거나 다친다.’
할 수 있을까? 유하는 스스로에게 질문했다.
숱하게 연습했다. 감도 잡았고, 성공률도 괜찮았다.
하지만 실패하면. 어긋난다면? 혹시 이능 제어에 실수가 있다면.
“젠장…….”
자근자근 짓씹은 유하의 입술에 핏방울이 맺혔다. 이제 하는 수밖에 없었다. 해내야 했다.
쐐애애액!
유하의 손을 떠나간 화살이 어느 때보다 맹렬한 기세로 쇄도했다.
하야트는 당연하다는 듯이 은새를 방패로 내세웠다. 그녀가 눈을 질끈 감았다.
퍽!
“꺄악, 유은새 헌터!”
“은새야!”
미지근한 피가 튀고 비릿한 혈향이 풍겼다.
은새가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컥!”
스미듯이 그녀의 몸을 통과한 화살이 하야트의 가슴에 틀어박혔다. 그의 목에 걸려 있던 모아누의 조각이 산산이 부서졌다.
추락하는 은새를 공간을 접어 달려온 벨키오르가 받아 안았다.
“은새! 다친 곳은? 괜찮은가?”
“주, 죽는 줄 알았어요…….”
은새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믿는다고 했지만 두려움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죽었다 살아났다는 생각에 심장이 벌렁벌렁했다.
“네놈은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었다. 영혼에 쌓은 업이 아니고서도 내 모든 권능을 발휘해 최악의 지옥을 선사해 주마.”
은새를 무사히 품에 안은 벨키오르가 참았던 분노를 터트렸다. 간신히 정신을 부지한 은새의 시야에 불현듯 웬 실타래 같은 것이 보였다.
드문드문 보이던 그것은 이내 온 세상을 뒤덮어 갔다. 그것은 소름이 돋을 만한 장관인 동시에 세계의 비밀을 엿본 것처럼 숨을 못 쉴 만큼 엄청난 압박감이 느껴졌다.
“베, 벨키오르 님? 이게 뭐예요?”
“인과율. 모든 현상의 시작과 끝이다. 저자는 이 세계에 속한 존재가 아니지만 동시에 이곳에서 저지른 죄악 때문에 양쪽 세계에서 단죄를 받을 것이다. 중첩된 인과만큼 고통의 추는 무거워지겠지.”
벨키오르가 더없이 싸늘한 눈빛을 했다.
온 세상을 뒤덮은 실타래는 흉물스러울 만치 하야트의 몸을 꽁꽁 묶고 있었다. 마리오네트처럼 묶인 그는 자신의 최후를 짐작한 것처럼 발악을 했다.
“이렇게 끝낼 순 없다! 나는 죽지 않아! 나는 하늘의 신 모아누의 서자이며 인간의 태를 벗을 초월자란 말이다. 섭리 따위가 내 운명을 좌우할 수는 없어!”
[인간도 신도 되지 못한 존재여, 무고한 생명을 해친 죄로 너는 가장 비참한 말로를 맞이하겠구나. 인과율이 내리는 형벌은 결코 가볍지 않을 것이며 너는 벌레만도 못한 삶을 죽지 못해 이어 가겠지.]
[네 놈의 죄가 이미 무겁구나. 아주 처절하고 비참한 최후가 기다리고 있겠어. 사지 육신이 갈가리 찢기고 영혼은 업화에 휩싸여 티끌의 재도 남기지 못하고 소멸하겠지. 그 꼴을 내 눈으로 보지 못하는 게 아쉽군.]
그동안 죽였던 존재들이 마지막 순간 내뱉은 저주가 하야트의 귓가에서 울려 퍼졌다. 부릅뜬 눈이 벨키오르와 은새를 적시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팽팽하게 당겨진 실은 하야트의 육체를 갈가리 찢어 버렸다.
다음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심연이 아가리를 벌리고 그자의 흔적을 꿀꺽 삼켜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