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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키운 마수가 드래곤을 물고 왔다 (171)화 (171/190)

169화 – 지상의 전투를 마무리하죠

“늦었군. 하도 안 나타나서 꼬리 말고 도망간 줄 알았더니 안타깝게 됐어.”

형체도 없이 새카만 재만 남은 허공에서 목걸이가 빛나더니 하야트의 신체가 복구되었다.

치명적인 일격이었는지 이번에는 눈에 띄게 속도가 느렸다.

저 지경이 되었는데도 회복한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었다.

벨키오르의 분노가 깃든 서슬 퍼런 눈매가 가늘어졌다.

“동족들의 권능이군.”

“역시 알아보네.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기고 드래곤은 죽어서 권능을 남겼지.”

하야트가 등에 메고 있던 대검을 풀며 신경을 자극하는 말을 했다.

“당신 또한 그렇게 될 거야. 그걸 위해 찾아다녔으니.”

그가 노리는 건 ‘시작의 드래곤’이 품은 생명의 권능이었다.

그것이야말로 완전한 신이 되려는 그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권능이었으니까.

하야트의 붉은 눈동자에 광기와 섬뜩한 욕망이 내비쳤다.

반쪽짜리로 태어나 당해야 했던 치욕, 수모.

신과 인간,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해 고독해야만 했던 지난날들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는 자신의 힘으로 신계에 올라 저를 버린 아비에게 복수하고 저를 두려워하던 어미에게 똑똑히 보여 줄 셈이었다.

저는 이렇게 됨이 마땅한 운명이었다고, 누구보다 높이 올라설 자격이 있다고.

벨키오르는 경멸하는 눈초리를 감추지 않았다.

죽은 동족들의 권능을 되는대로 집어먹은 게 꼭 오물을 기어 다니는 탐욕귀처럼 보였다.

실제로 벨키오르의 눈에는 그가 인간도 신도 아닌, 마물과 비슷하게 보였다.

신성은 타락해 있었고 보이지 않는 업이 언제라도 그를 쥐어 터트릴 듯 옥죄고 있었다.

벨키오르가 손가락을 부딪치자 눈구름이 걷히며 청명한 밤하늘이 드러났다.

아주 간단하게 권능을 무로 돌리는 힘에 하야트의 표정이 굳었다.

“인과의 굴레가 언제든 너를 잡아먹을 듯이 굴고 있는데도 오로지 탐욕뿐이라니. 아둔한 게 꼭 너의 아비를 닮았군.”

“입 닥쳐! 나를 그런 자와 비교하지 마라!”

“그런 것치고는 네 출생을 퍽 자랑스러워하지 않았나? 그것 빼고는 별 볼 일 없는 너 자신을 알듯이 말이다.”

“베, 벨키오르 님?”

은새는 당혹감에 저도 모르게 대화에 끼어들고 말았다.

이런 빈정거림은 평소 벨키오르가 사용하는 우아하고 정제된 말투와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었다.

고개를 돌려 그녀를 슬쩍 바라본 벨키오르가 아예 보이지 않도록 그녀를 등 뒤로 꼭꼭 숨겼다.

“물러나 있어, 은새.”

그는 신계에서 나온 직후에 바로 이곳으로 왔기 때문에 모아누를 대면했을 때의 불쾌감을 다 털어 내지 못한 상태였다.

물론 하나뿐인 반려가 위험할 뻔했다는 사실이 그가 분노하게 된 주된 원인이었지만.

운명의 신 쥬네와 대지의 신 가발라의 도움으로 모아누의 신전에 입성한 벨키오르와 아케이아는 또 다른 문제를 직면했다.

모아누는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말이 통하는 작자가 아니었다.

<내가 ‘그것’의 죽음을 허한다면 대가는 무엇으로 치를 셈이지?>

드래곤들을 죽여 세계의 균형을 흔들리게 만든 원흉이 그의 피를 이은 자식인데, 책임질 생각은 하지 않고 오히려 대가를 요구해 오는 게 뻔뻔하기 그지없었다.

‘그것’이라고 부르는 것에서부터 모아누가 서자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자명했다.

아케이아가 침착하게 당위성을 설명했으나 모아누는 귀가 틀어막힌 듯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대가를 무엇으로 치를 거냐고.>

같은 대화가 반복되자 결국 격분한 가발라가 나섰다.

<이 덜떨어진 대머리야! 네놈이 허리 가볍게 놀려서 싸지른 똥 덩어리가 사고치고 다니는 걸 이 착한 아이들이 수습해 준다는데 신계의 보고를 열어 줘도 모자랄 판에 헛소리를 해?>

……결코 온건한 방식은 아니었다.

모아누가 인상을 찌푸렸다.

<내가 그것에게 그러라고 시켰나? 내 피를 이었으나 인세에 속했으니 인간들의 책임이다.>

<어, 계속 그딴 소리 지껄여 봐. 섭리도 그렇게 판단할지 아주 궁금하네.>

섭리라는 말에 모아누가 움찔거렸다. 하지만 뻔뻔한 낯을 고수했다.

이번에는 쥬네가 나섰다.

<모아누. 너의 방만으로 인해 세계에 미친 피해가 아주 커. 직접적인 인과 관계가 없다 하나, 네가 그 책임을 온전히 피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그는 천으로 눈을 가리고 있었으나 싸늘한 시선이 느껴졌다.

<이미 그자에 대해서 불만을 가진 신들이 많아. 그러니 재판을 열겠다.>

<……!>

재판이라는 말에 그때서야 모아누가 반응을 보였다.

신도 죄를 저지르면 심판대에 오른다.

다수의 신이 동의하면 아무리 지체 높은 신이라고 해도 신격이 격하될 수도 있었다.

<그렇지! 어디 그때도 그 자유분방한 주둥이를 나불댈 수 있는지 두고 보자고.>

결국 자리는 파국으로 끝났다.

어쨌든 허락을 받아 냈으니 벨키오르와 아케이아가 상관할 바는 아니었다.

신전 밖으로 나왔을 때 벨키오르는 은새에게 걸어 놓은 보호 마법이 하나 깨진 것을 느꼈다.

그 뒤로 시간 차이를 거의 두지 않고 깨지는 마법에 그는 은새에게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음을 직감하고 바로 움직이려고 했다.

그런 벨키오르를 불러 세운 건 아케이아였다.

‘그자가 네 반려의 세계에 있어.’

‘그걸 왜 이제야……!’

벨키오르가 드물게 아케이아에게 언성을 높였다.

고요한 백안을 마주한 그는 예언 탓에 일부러 말하지 않았음을 눈치챘다.

‘이 일은 잊지 않겠다, 아케이아.’

그게 벨키오르가 표현할 수 있는 노여움의 전부였다.

은새를 등 뒤에 세운 벨키오르는 금빛 마력으로 허공에 마법진을 그렸다.

복잡한 문양이 완성되었을 때, 웬 처음 보는 검이 소환되었다.

벨키오르를 닮은 장엄하고 수려한 검.

‘벨키오르 님이 검을?’

검에 시선을 뺏겼던 은새는 뒤늦게 의문을 가졌다.

그가 무기를 드는 일은 좀처럼 없었기에 그 모습을 신기하게 바라봤다.

능숙한 손놀림으로 검을 휘어잡은 벨키오르는 칼끝을 하야트에게 겨눈 채로 나직하게 말했다.

절제되어 있으나 그 속에 고요히 타오르는 분노가 느껴졌다.

“너에게 신들의 선고가 내려졌다. 이는 하늘의 신 모아누가 동의한 일이며, 신역의 수호자이자 시작의 드래곤인 내가 집행한다.”

하야트의 미간이 와락 일그러졌다.

“하! 신? 태만한 그들이 이제 와 인세에 개입하겠다고 나선 건가? 우스운 짓을 하는군. 그들이 내 운명에 간섭할 권한이 있나?”

“집행 내용은 동족들의 권능 회수. 그리고 네놈의 영멸(靈滅)이다.”

손등에 핏줄이 불거지도록 검 자루를 움켜쥔 하야트가 달려들었다.

“누구 마음대로!”

꽈광!

검과 검이 부딪치는 소리라고는 믿을 수 없게 커다란 폭음이 들렸다.

한 손으로 가볍게 일격을 막아 낸 벨키오르가 은새에게 말했다.

“은새, 인간들과 함께 있어라.”

“네!”

여기 있으면 방해만 될 것 같아서 그녀는 냉큼 그러겠노라 답했다.

근처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도다리를 부르기 전, 은새가 당부의 말을 남겼다.

“……벨키오르 님, 조심하세요! 다치지 마시고요.”

“그대가 걱정하는 일 없게 빨리 돌아가도록 하지.”

옅은 미소를 지어 보인 벨키오르가 그 말을 끝으로 태풍처럼 하야트를 몰아쳤다.

두 존재가 검을 부딪칠 때마다 번쩍번쩍 섬광이 일어났다.

반신과 드래곤.

초월적인 이들의 싸움은 그야말로 태산과 바다가 격돌하는 것 같은 경탄을 자아냈다.

하늘이 찢어지고 대지가 요동쳤다.

세찬 바람 소리가 자연이 내지르는 비명처럼 들렸다.

지각 변동을 일으킬 거대한 힘이 그들 중심으로 휘몰아치고 있었다.

SS급인 은새도 눈으로 좇는 게 고작이었다.

‘굉장해……!’

슬그머니 고개를 드는 불안감을 누르고 그녀는 지상으로 내려갔다.

놀라서 달려온 헌터들이 그녀를 에워쌌다.

“유은새 헌터, 괜찮아요? 아래에서 전부 봤어요. 저런 쳐죽일 놈이 있나!”

“무슨 짓을 당한 건 아니죠? 그런데 갑자기 나타난 저분은 누구예요?”

“은새야, 괜찮아? 다친 곳은?”

은새는 헌터들과 유하에게 차근차근 대답해 주었다.

“저는 괜찮아요. 조금 놀라긴 했는데 나 괜찮아, 유하야. 벨키오르 님이 때맞춰 와 주신 덕분에 살았어.”

“저분은…….”

“저와 잘 아는 분이에요.”

헌터들은 더 묻고 싶은 눈치였으나 그럴 상황이 아니라는 걸 알고 말을 아꼈다.

아직 근처에 은새가 부른 마수들의 기척이 느껴졌다.

벨키오르가 오기 전만 해도 이런저런 생각이 많았는데, 지금은 그저 든든했다.

연대감이라는 단단한 끈이 두 사람을 이어 주고 있었다.

‘벨키오르 님이 신경 쓰시지 않게 나도 내 몫을 다해야지.’

은새의 눈빛이 일변했다.

“저쪽은 저분에게 맡기고 우리는 지상의 전투를 마무리하죠.”

“넵!”

하야트가 전투에 돌입하면서 그의 부하들은 각개 전투하던 것을 그만두고 협공을 시작했다.

개개인의 무력이 강한 만큼 하나로 뭉치자 위력이 몇 단계로 상승했다.

그러나 하야트의 부재로 이전과 같은 초재생 능력을 사용할 수 없다는 점은 호재였다.

교전 시간이 길어지면 상황이 또 어떻게 바뀔지 알 수 없지만 헌터들은 오래 끌지 않을 생각이었다.

컹컹!

크륵크륵.

끼에에엑!

실제로 은새가 불러온 마수들이 큰 역할을 해 주었다.

“젠장! 지긋지긋한 마수 새끼들!”

이곳 지역의 마수들은 극한 환경에서 살아남아야 했기 때문에 강하고 끈질겼다.

대지의 힘을 사용하는 쿠랄이 지반을 흔들고 땅을 뒤엎는 위용을 보이면서 달려드는 마수를 떨쳐 냈다.

그 뒤로 센도라의 마법이 작열했다.

마수들이 끊임없이 보충되며 언노운의 전력을 깎았으나 그럼에도 그들의 방벽은 굳건했다.

“서인찬 헌터.”

“네!”

길아연의 부름에 인찬이 군기가 바짝 든 신병처럼 대답했다.

그녀의 날 선 시선이 쿠랄에게 닿았다.

“우리가 우선 저들의 방어벽부터 깨부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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