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화 – 하나에 모든 것을 담는 일격
밀라니온의 몸에서 털이 수북이 자라더니 우드득 뼈가 뒤틀리면서 신체가 변형되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큰 키와 덩치가 올려다보기 힘들 정도로 거대해졌고, 입이라고 부르기도 뭐하게 하관이 갯과 동물처럼 앞으로 튀어나왔다.
그 사이로 보이는 뾰족한 이빨과 송곳니, 단단한 턱.
물렸다간 뼈도 못 추릴 것 같았다.
“크르르르!”
두 발로 서 있기만 할 뿐, 그야말로 짐승의 형태에 가까웠다.
유하가 짐작했던 대로 밀라니온의 정체는 라이칸스로프였다.
“무슨 능력이야, 저게? 마수처럼 됐잖아!”
“광폭화인가? 저렇게 변하는 건 처음 봐!”
헌터들이 당황해서 우왕좌왕했다.
이지를 잃은 듯 밀라니온이 팽팽하게 부푼 뒷다리로 땅을 박차고 뛰어올라 검은뿔표범 하늘이를 덮쳤다.
그는 하늘이의 몸에 손톱을 박아 넣고 우악스럽게 물어뜯었다.
컹-!
그에 하늘이도 지지 않고 뒤엉켜 싸웠으나 부상이 심각했다.
“쿠키야, 하늘이를 구해 줘!”
푸릉!
일각수 쿠키의 뿔에서 빛이 났다.
쏜살같이 달려간 쿠키는 있는 힘껏 밀라니온을 들이받고, 연이어 튼튼한 뒷다리로 걷어찼다.
도다리를 탄 은새도 가만있지 않았고, 유하가 장전한 빛의 화살을 쏘아 주의를 끌었다.
간신히 밀라니온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하늘이는 온몸이 성한 데가 없었다.
힐러가 스킬을 쏟아 내 치료했으나 은새는 마음이 아팠다.
‘어떻게 해야…….’
양 떼를 습격한 늑대처럼 밀라니온은 이리저리 날뛰며 사방을 휘젓고 다녔다.
좀처럼 결판이 나지 않는 소모전으로 사람들이 점점 지쳐 가는 가운데, 하야트가 움직였다.
그를 주시하고 있던 몇몇 헌터들이 주위의 변화를 감지했다.
그의 수족들과의 전투에 정신이 팔려 있던 자들도 이상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우르릉…….
묵직한 울음을 토해 낸 하늘이 점점 어두워져 갔다.
급속도로 땅이 얼어붙고 시야가 구분 안 될 정도로 눈보라가 휘몰아쳤다.
기온이 급격하게 떨어지면서 헌터들의 움직임에 제약이 걸렸다.
“윽, 갑자기 날씨가 왜 이래?”
“저 남자가 한 거야! 이게…… 이게 스킬이라고?”
헌터의 목소리가 떨렸다.
“인간이 맞긴 해?”
북쪽이라 안 그래도 추운데 빙하기가 온 것처럼 온 세상이 눈에 파묻혔다.
세계에 간섭하는 이 힘은 하야트가 죽인 드래곤들의 권능이었다.
마법이나 이능력 따위로 막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인간이 자연을 넘어설 수는 없었으니까.
헌터들이 공포에 질려 가는 걸 지켜보던 하야트는 거의 걸어 다니는 시체 꼴이 된 부하들을 단숨에 회복시켰다.
부러진 뼈가 붙고 여기저기 찢기고 꿰뚫린 상처에 새살이 돋아났다.
심지어 잘렸던 신체 부위가 재생되기까지 했다.
그들에게 걸려 있던 각종 디버프들이 해제되고 바닥 난 마력과 체력이 만전의 상태로 채워졌다.
혈흔과 넝마가 된 차림새가 아니었다면 전투가 시작되기 전으로 되돌아간 거라고 착각할 법했다.
“크하하하, 힘이 솟는다! 자, 다시 시작해 보자고!”
“하야트 님이 계시는 한, 우리는 반드시 승리한다.”
“크르르르…….”
“시간은 우리의 편입니다.”
승리를 확신하는 오만한 얼굴들을 본 헌터들이 꿀꺽, 침을 삼켰다.
극복하기 어려운 위기 앞에서 그들은 말을 아꼈다.
지금 입을 열었다가는 턱밑까지 차오른 포기하자는 말이 흘러나올 것 같았으므로.
표정은 제각각이었으나 그들의 머릿속에는 단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이제 기적을 바라는 것밖에는…….’
***
“큭! 빌어 처먹을……! 뱀 같은 새끼!”
솔이 이를 박박 갈며 불의 창을 휘둘렀다.
거센 눈보라 때문에 그녀는 제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호오. 꼬리에 불붙은 망아지처럼 날뛸 때는 언제고 이제 좀 얌전해졌군요. 저는 이편이 더 마음에 듭니다.”
“그 입 닥쳐! 으, 소름 끼쳐!”
쭉 찢어진 눈매의 남자, 바스코가 히죽 웃으며 창을 휘둘렀다.
솔과 똑같이 창을 무기로 다루는 그는 분하지만 그녀보다 한 수 위였다.
더군다나 속성 영향을 받고 있는 탓에 솔이 더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젠장, 간신히 피 다 깎아 놨는데 다시 처음부터 시작이라니!’
이게 게임이었으면 운영 개쓰레기라고 유저들한테 욕 배불리 처먹고 본사로 폭탄 두어 개쯤 투척되었을 것이다.
거지 같은 날씨와 더 거지 같은 적수의 환상의 하모니에 솔은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이 눈! 눈! 하늘에서 내리는 똥덩어리!’
솔의 짜증 어린 시선이 하야트에게 향했다.
‘저 보라돌이 새끼 때문에 이게 다 뭐냐? 저놈이 메인인데 뱀 새끼한테 계속 발목 잡혀 있을 수는…….’
“어딜 보는 거죠? 당신의 상대는 저입니다만.”
“지긋지긋한 새끼! 좀 죽어!”
솔이 홍염룡을 날려 보냈으나 날씨 탓에 위력은 평소의 절반도 되지 않았다.
바스코가 휘두르는 창에 손쉽게 격파되었다. 그가 같잖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간지럽지도 않은 공격으로 뭘 하겠다는 건지……. 흐음. 당신을 더 상대하는 건 시간 낭비 같네요.”
그는 창을 빙글빙글 돌리며 뱀처럼 서늘한 눈을 빛냈다.
“이만 끝내죠. 내 손에 죽는 걸 영광으로 생각하세요.”
“헛소리 집어치워!”
바스코의 기세가 달라졌다.
그의 창끝으로 오러가 집중되면서 주변이 일그러졌다.
심상치 않은 변화에 이를 사리문 그 순간, 솔과 바스코 사이에 만다라가 펼쳐졌다.
솔의 표정이 환해졌다.
“할머니!”
“고얀 녀석, 누가 네 할미냐. 나는 너 같은 손녀 없다!”
1세대 헌터인 부동명왕 이진래였다.
머리가 하얗게 센 나이 지긋한 노인이었지만 놀랍게도 아직 현역이었다.
옆집 할머니 같은 푸근함과 거리가 먼 그녀는 꼿꼿한 기개와 강인함, 세월의 흔적에서 묻어나는 지혜로움으로 많은 젊은 헌터들의 우러름을 받았다.
솔이 허공을 답보해 이진래의 옆으로 갔다.
여정을 함께 하며 두 사람은 제법 가까워진 상태였다.
“또 야박하게 그러신다. 더 안 쉬셔도 돼요?”
“네 녀석 하는 꼴을 보니까 답답해서 누워 있을 수가 없다. 기어코 늙은이를 고생시켜야겠냐?”
“아이…… 날씨가 이런데 어떡해요. 제가 제힘만 발휘했어도 저런 자식 때려눕히는 건 일도 아니었어요.”
이진래가 한심하다는 듯 혀를 쯧쯧 찼다.
“아해야. 너는 착각하고 있구나. 크고 화려해야 강한 거라고 누가 그러든?”
“네?”
“흘러넘치면 모자람만 못하다. 너는 뛰어난 재능만 믿고 기본을 경시하고 있구나. 그러니 외부 요인을 탓할 수밖에.”
이진래가 권법 자세를 취했다.
놀랍게도 그녀는 무기를 사용하지 않았다.
“잘 보아라. 모든 무(武)의 극의는 집중에서 이루어진다. 즉, 하나에 모든 것을 담는 일격.”
말을 하던 중 이진래의 신형이 사라지고, 바스코의 앞에서 나타났다.
퍼버버벅!
노인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움직임을 보이며 바스코와 공방을 주고받았다.
휘리릭, 퍽!
날아오는 창을 이진래가 수도로 막았다.
노련하면서도 망설임이 보이지 않는 단호한 눈빛.
맨손으로 막을 줄은 몰라서 바스코는 당황했다.
즉시 물러서려 했으나 이진래가 창대를 붙잡아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아해야, 담는 법을 배워야 한다. 때로는 작은 불길이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법이니까.”
그렇게 말한 뒤 이진래는 바스코와 격전을 이어 갔다.
솔은 혼란스러웠다.
‘뭐야, 담는 법을 배우라고? 무슨 뜻이야?’
솔은 이진래의 움직임을 눈으로 좇았다.
만다라를 적절히 활용하고 있었으나 이진래는 순수하게 무위로써 바스코를 상대하고 있었다.
그걸 가능하게 하는 건 적절하게 딱 필요한 만큼만 운용되는 이능.
지켜보는 헌터들이 감탄했다. 솔도 마찬가지였다.
‘하나에 모든 것을 담는 일격.’
왠지 몸이 근질거려 솔은 창끝에 불꽃을 피워 올렸다.
여태 그녀는 이능을 방출하는 데에만 초점을 두었다.
크고 화려하게, 압도적으로!
적을 압살할 때의 쾌감에 중독된 그녀는 줄곧 그런 식의 전투 방식만 고집했다.
하지만 지금처럼 눈이나 비가 내리면 위력이 현저히 떨어진다는 약점이 있었다.
던전에서 화 속성 마수를 상대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할 수 있을까?’
더 큰 불길마저 살라 버리는 일화(一火).
솔이 집중해서 이능을 담기 시작하자 불꽃의 색이 변화했다.
터질 듯 일렁이는 불꽃을 제어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형태를 붙잡고 있는 것만으로 정신력을 소모했다.
“크윽!”
이능을 섬세하게 통제해 본 경험이 거의 없는 솔은 이능 역류 현상이 일어나자 고통스러워했다.
“아, 모르겠네. 일단 다 때려 부어!”
애초에 그녀는 생각하면서 싸우는 타입이 아니었다.
오로지 본능.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적의 약점을 파고들어 깨부쉈다.
우우우웅!
이능이 휘몰아치면서 주변이 일그러졌다.
심지에 불이 붙은 폭탄을 들고 있는 것처럼 아슬아슬한 광경이었다.
하지만 더 물러날 데가 없는 솔은 강행했다.
압축, 압축, 오로지 압축…….
속이 진탕되어 핏물이 식도를 타고 넘어와도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화르륵!
처음 만들었던 것보다 크기는 더 크지만 새하얀 불꽃이 피워 올랐다.
불꽃은 뜨겁지도, 그렇다고 위압적으로 보이지도 않았지만 솔은 알 수 있었다.
모든 것을 불태우는, 단 하나의 불꽃이었다.
‘이거라면 통한다!’
어어, 뱀 같은 자식. 넌 이제 죽었어!
환희하며 고개를 든 솔의 시야에 문득 누군가 들어왔다.
어찌 된 영문인지 은새가 하야트의 손에 붙잡혀 있었다.
희희낙락하던 솔의 얼굴에 다급함이 어렸다.
“은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