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화 – 내 아이들을 괴롭히고 있구나
벨키오르가 날 선 시선으로 앞을 노려보았다.
금빛 깃털을 가진 매 한 쌍이 주위를 빙글빙글 돌며 지키는 태양과 진리의 눈이 성스럽게 조각된 거대한 문.
서 있는 것만으로 몸을 짓누르는 중압감이 느껴지는 이 문 너머에 하늘의 신 모아누의 권좌가 있었다.
신계에 오른 벨키오르와 아케이아는 문지기의 안내에 따라 이곳으로 왔다.
그리고 하염없이 기다리는 중이었다.
새벽의 신 아뉠레와 달의 신 포이베가 몇 번이고 그들을 스쳐 지나갔으나 문은 열리지 않았다.
사실 신들의 영역인 만큼 시간은 무의미했다.
그럼에도 이곳에 오는 게 탐탁지 않았던 벨키오르는 이 기다림이 퍽 무료하게 느껴졌다.
그답지 않게 목소리에 짜증이 스몄다.
“이렇게 계속 기다려야 하는 건가?”
“하늘의 신은 나태하고 고집 세기로 유명하지. 아마 우리가 왜 찾아왔는지 알고 일부러 안 나오는 걸 거야.”
“시간이 아깝군.”
진심이었다. 사막의 모래알을 세는 게 차라리 유익할 듯했다.
레어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한 수백 년쯤 잠이 들거나.
이런 용건인지 모르고 은새에게 금방 돌아올 것이라 말한 게 마음에 걸렸다.
누구도 함부로 닿을 수 없는 신계에 발을 들여서인지 전음은 진즉 막힌 상태였다.
‘그녀가 걱정하고 있겠지.’
은새라면 그가 적수가 없을 만큼 강한 종족이라는 것과 별개로 귀환이 늦어진다는 것만으로 걱정할 터였다.
그녀는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제 하나뿐인 반려를 떠올린 금색 눈동자에 온기가 감돌다 이내 차갑게 식었다.
자신이 의미 없이 시간을 죽이게 만든 원흉.
“사실 모아누의 허락이 없어도 되지 않나. 인간의 피가 흐르는 서자를 죽이는 데에는.”
“그자는 너무 많은 업을 쌓았어.”
웬만해서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아케이아도 이 상황이 불쾌한지 문을 노려보는 눈빛이 곱지 않았다.
“천칭이 심하게 기울었어. 명분은 우리에게 있지만 만약 그자를 죽인다면 인과율의 여파가 미칠 거야. 그러면 너는 몰라도 네 반려는 위험하겠지.”
“……은새가?”
업이란, 영혼에 쌓이는 과보다.
혼과 육신을 입은 존재는 살아가면서 필연적으로 수많은 인과를 쌓게 되는데, 이는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어 함부로 끊거나 없앨 수 없었다.
흔히 말해 ‘운명’이라 부르는 것들이 이에 해당했다.
그리고 숨을 거둔 최후의 순간, 육신에서 떨어져 나온 혼은 섭리의 심판대에 오르게 되는데 생전에 저지른 죄에 따라 인과율의 조정을 받는다.
이는 형벌과 마찬가지로 그 수위는 죄질에 따라 천차만별이었다.
가벼운 수준부터 영혼의 완전한 소멸까지.
특히 후자는 억겁의 세월에 갇혀 영혼이 찢기고 짓이겨지는 고통을 수반한다.
섭리의 집행은 절대적이기에 신들조차도 두려워했다.
그래, 모아누의 서자가 업을 쌓은 것도, 그로 인해 천칭이 기운 것도 이해는 한다.
하지만 여기서 은새가 왜 나온다는 말인가?
“은새가 그자와 무슨 상관이 있지?”
“……이 일이 끝나면 말해 줄게.”
“쯧.”
아케이아는 ‘신탁의 드래곤’인 만큼 예지의 힘을 다룬다.
그녀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무게가 실려 있었다.
필시 대답을 미루는 이유가 있을 터.
“하지만 언제까지고 기다릴 수 없다. 예감이 좋지 않아.”
“…….”
벨키오르가 입가를 매만졌다.
예기치 못하게 은새와 떨어졌기 때문일까?
아니면 하늘의 신의 서자 때문에 은새가 위험할 수도 있다는 말을 들어서?
그때였다.
[심술궂은 영감이 내 아이들을 괴롭히고 있구나.]
뒤를 돌아보니 천으로 눈을 가린 운명의 신 쥬네와 이삭의 관을 쓴 대지의 신 가발라가 그들을 보며 웃고 있었다.
***
격전이 벌어지고 있는 황해도 지역.
하아.
하얀 입김을 뿜어낸 양희진이 ‘파도를 부르는 석영 도끼’를 움켜쥐고 정면에서 날아오는 화염구를 갈라냈다.
“핫!”
꽈과광!
그녀가 반동을 이용해 다음 공격도 막아 냈다.
“희진아, 뒤!”
“네!”
팀원의 외침에 양희진이 이능으로 땅에서 빙산을 일으켰다.
꽈르릉!
그녀를 향해 날아오던 암석 바위들이 빙산에 꿰뚫려 부서졌다.
“뭐야, 저 남자 진짜 마법사라도 돼?! 대체 속성을 몇 개나 다루는 거야?”
쉬지 않고 움직인 양희진이 흘러내리는 땀을 손등으로 훔쳤다.
경악한 그녀의 시선 끝에는 보석 박힌 완드를 든 장발의 남자가 서 있었다.
남자, 센도라는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대지를 뒤덮는 광범위 마법을 펼쳐 헌터들을 기함하게 만들었다.
다행히 길아연을 포함해 탱커들이 아군을 보호해서 피해는 적었으나 압도당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 뒤로 센도라는 듣도 보도 못한 다양한 마법을 구사해 헌터들의 혼을 쏙 빼놨다.
공격 하나하나가 날카롭고 위력적이어서 머릿수만 믿고 덤볐다간 역풍을 맞을 위험이 있었다.
“저 사람은 지치지도 않나?”
양희진의 안색이 창백하니 핼쑥했다.
몇 시간째 지속된 전투로 그녀는 먹은 것도 없이 토기가 치밀었다.
센도라도 품에서 포션 같은 걸 계속 꺼내 마시는 걸 보면 한계가 없지는 않아 보였는데 어쨌든 대단했다.
팀원들이 센도라를 상대하는 동안 힐러에게 기력 충전을 받은 양희진은 전장을 둘러보았다.
쾅!
퓨부부붓!
우르릉!
사방에서 번쩍번쩍 이능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양측 다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치열하게 펼치는 전투.
언노운의 숫자는 여섯이었다.
하지만 우두머리로 보이는 보라색 머리카락의 남자는 뒤로 물러나 팔짱을 끼고 있었으므로 싸우는 건 다섯 명뿐이다.
그런데도 수백 명의 헌터들에게 결코 밀리지 않았다.
‘이게 있을 수 있는 일이야? 저 사람들, 사실 인간이 아닌 거 아니냐고!’
양희진은 기가 질리는 동시에 넘지 못할 벽을 마주한 것 같은 두려움을 느꼈다.
그런 감정을 느끼는 건 그녀만이 아니었다.
헌터들은 몰랐으나 이세계에서 지상 최상위종이라는 드래곤을 사냥하고 다니던 이들이었으니 당연했다.
“희진아, 투입!”
“넵, 길드장님!”
목화시의 부름에 뺨을 짝짝 때려서 기운을 북돋운 양희진이 다시 전장에 뛰어들었다.
시간은 자신들의 편이라고 속으로 수없이 되뇌며.
우리는 눈앞의 상대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언노운의 전투 특성에 맞춰 친구들과 따로 떨어져서 홀로 대립한 적은 익숙한 얼굴이었다.
은평구 테러를 일으킨 주범, 라크웰이었다.
그는 피를 뒤집어쓴 채로 대검을 살벌하게 휘두르며 헌터들을 향해 소리쳤다.
“그래! 미적거리지 말고 한꺼번에 덤벼라! 나를 즐겁게 해줘 봐! 전력으로 달려들라고!”
광기에 휩싸인 눈동자가 반질거렸다.
“설마 이게 다는 아니겠지? 벌써 지쳤냐? 버러지들답게 발버둥 쳐 보라고! 으하하하!”
미치광이처럼 보이는 그의 모습에 헌터들이 주춤거렸다.
방어를 포기한 건지, 안 하는 건지 온몸에 피칠갑을 한 라크웰은 싸움에 진심으로 희열을 느끼고 있었다.
콰드드득!
그와 전력으로 검을 부딪친 우리는 팔이 으스러질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무슨 힘이……!’
이를 악문 우리가 검로를 비틀어 튕겨 냈다.
‘베는 자의 맹세’로 쉴 새 없이 검을 휘두르고 필살기인 ‘새벽이 밝아 오는 시간’까지 발동했음에도 라크웰을 몰아붙이는 데에는 역부족이었다.
“헉, 헉…….”
눈앞이 핑그르르 돌 만큼 짙은 탈력감에 우리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피를 많이 흘린 라크웰도 상태가 좋다고는 할 수 없었으나 흥분감에 젖은 광기 어린 눈빛은 여전했다.
“퉤!”
핏물을 뱉어 낸 우리가 검으로 지탱해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다리가 후들거려 몇 번이나 휘청거렸다.
“시작의 드래곤을 왜 찾는 거지?”
“어엉? 너, 뭔가 알고 있나?”
“대답해! 왜 그를 찾는 거지?”
“호오, 제대로 짚었는데. 죽기 싫으면 시작의 드래곤에 대해 아는 걸 전부 말해라!”
라크웰이 달려들었다.
하지만.
쨍! 끼기기긱…….
몸도 제대로 못 가누는 우리의 앞을 누군가 막아섰다.
“물러나요, 한우리 헌터.”
청풍검신이라는 이명을 가진 김우종이 끼어들자 라크웰의 눈썹이 꿈틀댔다.
“방해하지 마라!”
으르렁거리는 그의 목을 얇은 실 같은 것이 휘감았다.
“큭!”
“힐러에게 치료부터 받으세요. 지금부터는 저희가 상대하죠.”
사검(絲劍)을 단단히 손에 감은 육재희가 라크웰의 뒤에서 나타났다.
바람의 이능을 다루는 그는 무기에 구애받지 않았으나 필요할 때는 던전에서 채광한 여러 금속을 합금해 얇게 뽑아낸 사검을 주로 사용했다.
라크웰을 우리에게서 떨어트려 놓으며 두 사람이 멀어졌다.
“쿨럭!”
“우리야!”
다급히 달려온 미리내가 우리의 어깨를 붙잡고 치유 스킬을 걸었다.
한편 은새와 유하는 잘 알려지지 않은 남자, 밀라니온을 상대하고 있었다.
2m는 족히 되어 보이는 커다란 키에 톡 튀어나온 송곳니, 길들지 않은 맹수를 보는 것 같은 눈빛.
몸놀림 또한 짐승처럼 날렵했다.
휘릭, 퍽! 퍽! 퍽!
“얘들아, 피해!”
은새의 마수들이 산개하여 폭격처럼 떨어지는 그의 주먹과 발을 피했다.
영호 민들레가 사라졌다가 그의 그림자에서 튀어나와 뒷덜미를 물었다.
그러나 밀라니온은 당황하지도 않고 어깨너머로 민들레를 붙잡아 그대로 메쳤다.
“민들레야, 괜찮아?!”
푸르르 머리를 흔든 민들레는 대답하듯 컹, 짖고 다시 남자에게 달려들었다.
밀라니온은 신체 강화 계열인가 의심이 들 만큼 몸을 쓰는 게 탁월했으나 그의 정체를 짐작하게 할 만한 신체적인 특징이 전투를 하면서 드러났다.
모자와 옷으로 가려져 있던 머리 위로 쫑긋 솟은 귀와 둔부 근처에 늘어진 풍성한 꼬리.
유하가 말했다.
“수인인가? 라이칸스로프 같은?”
“응. 보고도 믿기지 않지만 그런 것 같아.”
언노운이 벨키오르의 세계에서 온 존재들이라는 걸 아는 두 사람은 수인이라고 해도 당황하지 않았다.
드래곤도 있는데 수인도 있을 수 있지.
마수들의 협공이 거슬렸는지 밀라니온의 근육이 일순 팽팽하게 부풀었다.
“크르르르!”
그 순간, 남자의 눈동자에 붉은 안광이 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