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 이만하면 경고가 됐으려나
육재희는 골드스타 길드 초기 멤버로 백찬민을 수년간 보좌했다.
가진 능력도 출중하고 길드원들의 신임도 두터워서 사람들은 당연히 그가 차기 길드장이 될 거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모기업인 금성 그룹의 자제들의 생각은 다른 모양이었다.
“듣기로 금성 그룹 직계들이 다른 사람을 미는 모양이던데.”
“육재희 부길드장 말고 길드장 할 사람이 있다고?”
목화시가 눈썹을 까딱했다.
백찬민의 활약상에 가려져서 그렇지, 육재희의 능력은 그녀도 인정하는 바였다.
“어. 이제 좀 이름 알리기 시작한 A급 루키라던데. 흑야의 검객이라던가? 콧대 높은 직계들을 어떻게 구워삶은 거지. 뭐, 그건 그렇고 길드원들과 그룹 이사진들이 반대해서 쉽사리 결론이 나지 않을 모양이야.”
“골드스타 길드도 끝났군, 이제.”
“어우야. 목화시 길드장 차갑다~”
김일도가 배를 잡고 낄낄댔다.
전국에서 몰려온 헌터들로 인해 회의장이 발 디딜 틈도 없이 꽉 들어찼다.
소집 시간에 늦지 않게 도착한 우리와 미리내도 적당한 자리에 앉았다.
모일 사람들이 다 모인 듯하자 헌터 협회 협회장이 직접 단상에 올라 비상 대책 회의를 시작했다.
“오늘 이렇게 모인 이유에 대해 다들 잘 알고 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일주일 전, 중국 바오딩시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이들이 나타나 테러를 일으켰습니다.”
커다란 전광판 위로 자료 화면이 떠올랐다.
언론에서 조명하던 것보다 더 처참한 도시 상황에 사람들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화면이 계속 넘어갔다.
“몇 개나 되는 도시가 파괴되었고 수백만 명에 이르는 사망자와 부상자가 발생했습니다. 아예 재건을 포기해야 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상황이 심각합니다. 그리고 테러범들이 현재, 한국으로 오고 있습니다.”
“범인들이 테러를 일으킨 이유가 뭡니까?”
“왜 한국으로 오는 거죠?”
질문이 쏟아졌다.
“테러범들의 정확한 목적은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시작의 드래곤’이라는 것을 찾으려 한다는 청화 길드 유길선 길드장의 증언이 있었습니다.”
“드래곤……? 마수 말입니까?”
“처음 듣는데. 암호 같은 건가?”
“테러가 일어나는 동안 중국 헌터들은 뭘 했습니까?”
협회장은 좌중을 둘러보고 차분히 대답했다.
“언노운의 추정 등급은 S급, 혹은 그 이상. 정확한 능력은 파악되지 않았습니다. 속성계와 물리계로 확인되지만 숨겨진 능력이 더 있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한 개인이 세 개의 속성을 동시에 사용하고, 천재지변과 같은 현상을 일으키는 것도 목격됐습니다.”
“…….”
“일반적인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자들입니다. 하여 중국 헌터들조차 막아 내지 못했습니다.”
“허…….”
“우리 망한 거 아니야?”
다음 순간 협회장의 표정이 비장해졌다.
“하지만 우리가 누구입니까?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헌터들은 갖은 역경에도 함께 힘을 합쳐 이겨 냈습니다. 이번에도 우리는 반드시 승리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한 작전을 설명드리겠습니다. 배부한 자료를 보시면…….”
설명이 시작되자 우리와 미리내는 작은 목소리로 속닥거렸다.
“확실해. 헌터가 아닌 자들이야. 벨키오르 님의 세계에서 넘어온 거야. 그런데 왜 중국에서 먼저 나타난 거지?”
“톈진 사태와 관련 있지 않을까?”
“톈진?”
“벨키오르 님은 이곳에서 거의 은거 생활을 하시잖아. 하지만 톈진 사태 때는 큰 힘을 몇 번이나 발휘하셨고.”
“아. 일리 있네. 흔적을 쫓아왔다면 그럴 수도 있겠어.”
“대체 뭐 하는 자들이지? 어째서 벨키오르 님을 노리는 걸까.”
두 사람이 숙덕거리자 뒷자리에 앉은 김일도가 관심을 가졌다.
“어이, 도천 길드장이랑 부길드장. 무슨 얘기를 둘이서만 그리 재밌게 해?”
그 순간이었다.
쿠구궁!
심상치 않은 땅 울림이 건물을 뒤흔들었다.
거센 돌풍이 불어와 창문이 깨질 것처럼 흔들렸다.
헌터들이 벌떡 일어났다.
“뭐야?! 무슨 일이야?”
“지진?”
동시에 그들의 핸드폰에서 시끄럽게 재난 경보가 울렸다.
[재난지원안정청에서 알립니다. ○월○일 15:30. 서울 은평구 일대에 괴한에 의한 테러 발생. 속히 대피하시기를 바랍니다.]
“테러? 서울 한복판에서 테러?”
“겁도 없이 어떤 새끼가!”
일부가 자리를 이탈해 뛰어나갔고, 남은 사람들은 핸드폰으로 중계 영상을 틀었다.
그들이 가지 않아도 이곳은 서울. 수많은 전력이 모여 있었다.
촬영되고 있는 영상은 흔들려서 뭐가 뭔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사람들의 비명 소리와 뭔가가 폭발하고 무너지는 소리가 연속해서 들렸다.
몇 분이 지난 뒤에야 카메라 초점이 혼란 한가운데에 있는 사람을 비추었다.
눈 밑에 상처가 있는, 이국적인 생김새의 남자가 도망치는 사람들을 향해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주변은 뭔 짓을 한 건지 폭탄이라도 떨어진 듯 난장판이었다.
“뭐야, 상황이 엄청 심각한데? 우리도 가야 하는 거 아니야?”
“이 남자…… 언노운 중 하나잖아.”
“언노운이 벌써 들이닥쳤다고?”
남자의 타오르는 황혼 같은 주홍색 머리카락이 눈에 띄었다.
분명 중국 테러 현장을 담은 자료 화면에서 봤던 자였다.
서로를 쳐다보던 이들이 동시에 달음박질쳐 회의장을 벗어났다.
***
남자, 라크웰은 서울 시내 한복판에 갑자기 나타났다.
아직 위쪽에 있는 일행과 떨어져 홀로 온 건 염탐을 겸해서 시작의 드래곤의 흔적을 찾고, 도발하기 위해서였다.
중국에서 맞닥뜨렸던 이능력자들의 실력이 제법 대단했으니까.
적의 정세를 살피는 건 전쟁을 치르기 전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다.
[봐도 봐도 신기한 세계란 말이야. 어떻게 이렇게 우리 세계와 다르지?]
지나가는 사람들이 낯선 언어를 사용하고 특이한 복식을 한 그를 힐끔힐끔 쳐다봤다.
하지만 헌터 중에는 컨셉에 충실한 자들이 많았으므로 이상하게 여기지는 않았다.
라크웰은 마도 공학이 발달한 자신들의 세계와 이곳을 비교하면서 돌아다녔다.
화려한 전광판에선 영상이 끊임없이 송출되며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고, 조잡한 노래가 거리마다 흘러나왔다.
앞뒤로 튀어나온 마차 같은 탈것이 쌩쌩거리며 지나갔고 복잡하게 얽힌 길은 정신을 놓았다가는 금방 길을 잃을 것 같았다.
[오! 맛있는 냄새. 식당이 이렇게나 많다니, 식도락이 제법 발달한 문명인가 본데. 그리고 강자들이 제법 눈에 띄어.]
식도락이 발달했다는 건 평화로운 세상이라는 뜻.
그리고 이 시대에 헌터는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을 정도로 흔했다.
어지간한 사람들은 라크웰이 눈에 차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한번 건드려 보고 싶은 이들이 종종 보였다.
그는 염탐이라는 미명하에 꽤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흠……. 시작의 드래곤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는데. 속은 거 아니야?]
분명 이 세계 어딘가에 있을 텐데.
하긴, 처음 도착한 땅에서도 시작의 드래곤의 기운은 아주 미약하게 남아 있었다.
추적이 불가능할 정도라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녔으나 결국 꼬리도 발견하지 못했다.
[뭐, 숨어 있으면 끌어내면 되겠지.]
라크웰이 등에서 칼을 뽑았다.
순식간에 검이 오러에 휩싸이며 궤적을 따라 전방으로 쏘아졌다.
콰광!
“꺄악!”
“뭐야, 저 사람!”
“누가 좀 막아!”
거센 검풍으로 인해 잘 깔린 아스팔트가 빙판처럼 쪼개지고 빌딩 하나가 반파되었다.
근처에 있던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달아났다.
헌터들이 달려와 라크웰을 향해 뭐라고 소리쳤다.
[경고는 확실하게 하는 게 좋겠지.]
라크웰은 더 많은 양의 오러를 검에 싣고 내키는 대로 휘둘렀다.
건물이 밀집되어 있다 보니 부수는 맛이 났다.
사방에서 날아오는 공격을 적당히 응수하며 그는 파괴하는 데 집중했다.
목숨이 깔딱깔딱 넘어가는 수준이 아니면 동료가 금방 치유해 줄 것이다.
고작 몇 분 사이에 라크웰은 도시를 초토화로 만들었다.
긴급 출동한 군인들과 헌터들이 그를 빙 둘러 에워쌌다.
특수 제작된 화기가 그에게 집중되었다.
방어를 포기했기에 부상 정도가 심하고 피를 많이 흘렸다.
또한 헌터들이 건 디버프 효과로 인해 몸이 무거워진 게 느껴졌다.
라크엘이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여력을 가늠했다.
[으음. 그래도 여기서 멈추면 대륙을 공포에 떨게 한 내 이름이 울지!]
라크웰이 검을 치켜들자 검 끝에 파지직 하고 에너지가 모이기 시작했다.
그는 입꼬리를 당긴 채 그대로 팔을 내리그었다.
그와 동시에 태양처럼 지글지글 끓는 에너지 구체가 도시를 집어삼킬 듯이 그대로 날아갔다.
콰과과광!
열풍이 휘몰아치며 모든 게 박살이 났다.
자욱한 연기가 피어오르는 가운데 라크웰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오연히 서 있었다.
[어휴, 혼자 날뛰려니 힘드네.]
두두두.
프로펠러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고 하늘을 올려다본 라크웰이 자신을 비추는 카메라를 발견했다.
[이만하면 경고가 됐으려나.]
씨익.
피를 뒤집어쓴 채 섬뜩한 미소를 지은 라크웰이 임무를 완수하고 아티팩트를 발동했다.
눈을 멀게 할 환한 빛에 휩싸여 그의 모습이 사라졌다.
한낮에 벌어진 테러는 시간 대비 참혹한 결과를 가져왔다.
미디어를 통해 언노운에 대한 공포가 빠르게 퍼져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