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화 – 드디어 찾았군
비록 안 좋은 일로 만났으나 유은새는 사영을 위해 자비를 베풀었다.
서로 주고받은 게 있는 거래라고 해도 어머니 같은 존재인 사영을 구했으니 유길선은 그녀에게 목숨보다 더한 빚을 지게 됐다.
“음…… 길선아? 왜 안 자고.”
“잘 주무시는지 확인하러 왔습니다.”
인기척을 느낀 사영이 눈을 뜨자 유길선은 얼른 다가가 그녀의 손등을 쓸어내렸다.
따뜻하고, 부드럽다.
저주에 걸렸을 때 차갑고 딱딱했던 손을 떠올린 유길선은 속으로 안도했다.
때때로 그는 이 현실이 사영을 너무 구하고 싶은 마음에 보게 된 망상은 아닐지 의심했다.
“또 이상한 생각 하고 있지.”
“……아닙니다.”
“아니기는. 내가 널 본 세월이 얼마인데.”
휘어진 눈가에 주름이 지는 걸 유길선은 눈도 깜빡이지 않고 바라봤다.
오랜 시간 저주에 시달렸기에 사영은 ‘절대불가침의 사영’이라고 불리던 시절과 다르게 마르고 약해져 있었다.
그러나 그 눈빛만은 흔들림 없이 단단하고 다정해서 저도 모르게 긴장하고 있던 몸에서 힘이 풀렸다.
사영이 유길선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난 괜찮으니 어서 가서 자렴.”
“네. 주무십시오. 아침에 찾아뵙겠습니다.”
“얘는……. 그래, 아침에 보자.”
사영의 병실을 나온 유길선은 피곤한 눈가를 문지르고 길드로 돌아가려고 했다.
그런데 복도 끝에서 길드원이 다급하게 달려왔다.
무언가 일이 터졌음을 직감한 유길선이 표정을 딱딱하게 굳혔다.
길드원이 입을 떼기 전에 그를 붙잡아 사영의 병실에서 멀리 떨어졌다.
유길선이 사영에게 지극한 걸 아는 길드원은 초조한 얼굴을 하고도 순순히 따라갔다.
둘만 있게 되자 길드원이 빠르게 보고했다.
“길드장님, 바오딩시를 웬 괴인들이 습격했다고 합니다……!”
“테러인가? 불법 헌터들, 아니면 반동분자들 쪽인가?”
갑작스러운 정권 교체로 인해 아직 세력이 불안정해 종종 이런 일이 생기곤 했다.
그러니까, 새삼스럽지 않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이어진 말은 예상 밖이었다.
“그게, 정체를 알 수 없는 자들입니다.”
“그게 무슨 말이지?”
“이능력을 다루는 걸 보면 헌터인 건 확실한데 무력이 상상을 초월합니다. S급…… 아니 그 이상!”
길드원은 공포에 질린 낯을 했다.
“긴급 출동한 헌터들이 제압을 시도했으나 속수무책으로 쓸려 나가고 있습니다. 게다가 알 수 없는 언어를 사용해 의사소통이 전혀 안 됩니다. 이대로라면 도시가 여럿 붕괴할지도 모릅니다……!”
“바로 바오딩시로 간다. 동맹 길드에 연락해서 헌터들 차출해.”
“예!”
바오딩시로 간 유길선은 태풍이 휩쓸고 간 듯한 광경을 보게 되었다.
번성했던 도시는 죽음의 도시로 뒤바뀌어 신음과 통곡 소리만 들려왔다.
이미 괴한들은 자리를 뜬 뒤였다.
참혹한 현장을 둘러본 유길선이 부상이 가득한 헌터에게 질문했다.
“괴한들의 능력은?”
“하나로 정의할 수 없습니다. 한 명이 여러 가지 능력을 사용하기도 하고, 속성도 수시로 바뀌었습니다. 지진, 폭풍, 번개, 심지어 땅을 통째로 얼리기까지……. 가히 재앙급입니다. 특히 우두머리로 보이는 남자는 같은 인간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수준이었습니다.”
헌터가 본능에 새겨진 공포로 덜덜 떨었다.
유길선이 알기로 눈앞의 헌터는 허튼소리를 할 자가 아니었다.
하지만 같은 인간인지조차 의심될 정도였다고?
보통 S급의 헌터들을 두고 그런 말을 하기도 했으나 그는 단어 그대로의 의미로 말한 듯했다.
그런데 다른 헌터가 뛰어오더니 유길선에게 카메라 캠코더를 내밀었다.
그는 다리를 제외하고는 온통 붕대를 감고 있었다.
“이걸 봐 주십쇼, 길드장님!”
재생되는 전투 영상을 유길선이 유심히 살폈다.
괴한의 숫자는 여섯.
그러나 길드원들이 공통적으로 말한 것처럼 무력의 수준이 상당하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검을 휘두르자 폭풍 같은 검풍이 일어나 건물과 사람들을 휩쓸어 버렸다.
다른 이가 손을 하늘로 뻗자 거대한 원진이 떠오르며 폭우처럼 벼락이 떨어졌다.
뒤이어 불길이 치솟더니 사람들을 재도 남기지 않고 태워 버렸다.
그리고 우두머리로 보이는 거칠게 자라난 보라색 머리카락의 남자.
그는 별다른 움직임 없이도 걷는 걸음마다 시체의 산을 이루었다.
헌터들의 전력을 쏟아 낸 공격은 그들 앞에서 손쉽게 가로막혔다.
한눈에 보기에도 범상치 않은 이들이었다.
이런 강자들이 어디 있다 튀어나온 거지?
그리고 무슨 목적으로 테러를 일으킨 것인가.
“이자들이 어디로 향했지?”
“갑자기 천공섬이 나타나 그들을 태우고 사라져서 추적이 불가능했습니다. 북쪽으로 가는 것은 확인했습니다.”
천공섬도 그들의 능력인가?
그렇다면 도주하는 걸 붙잡을 수도 없었다.
유길선의 턱에 힘이 들어갔다.
이제야 겨우 평온을 되찾았는데, 앞마당을 어지럽히는 자들을 그냥 놔둘 수는 없었다.
“이자들은 반드시 다시 나타난다. 주석에게 알려 화북 지역에 비상경계령을 내리고 도시마다 헌터들과 군인들을 배치해.”
“예!”
유길선의 예측처럼 괴한의 습격은 한 번으로 그치지 않았다.
북쪽으로 계속 이동하며 보이는 도시마다 파괴했다.
그리고 베이징과 맞닿은 관문 도시에서 유길선은 드디어 그들과 조우했다.
천공섬에서 뛰어내려 지상에 착지한 그들을 유길선과 청화 길드, 동맹 길드 헌터들, 그리고 특수 무장한 군인들이 에워쌌다.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유길선은 생각보다 더 위험한 기세를 풍기는 자들을 보고 이를 사리물었다.
특히 맨 앞에 선 저 보라색 머리카락의 남자는…….
강하다. SS급인 그조차 경지를 가늠할 수 없을 만큼.
하지만 물러설 수는 없었다.
물러서면 이 뒤는 베이징, 사영이 있는 곳이었다.
“네놈들은 누구냐! 누군데 겁도 없이 대국의 땅을 침범한 것이냐!”
눈 밑에 상처가 있는 검을 든 사내가 이죽거리며 대답했으나 이국의 언어라 알아들을 수 없었다.
대기시켜 놓은 통역사들도 당황하며 모르는 언어라고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자 그들 사이에서 기다란 완드를 든 남자가 걸어 나왔다.
완드에 박힌 보석이 순간 빛을 내뿜었다.
공격하는 것인가 해서 무기를 뽑았으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 그들의 언어가 변화했다.
“시작의 드래곤은 어디 있지?”
“뭐?”
“시작의 드래곤이 어디 있냐고 물었다.”
“그게 무슨…….”
갑자기 말이 통하는 것에 의문을 가질 새도 없이 유길선은 당혹감에 잠겼다.
드래곤?
마수를 말하는 건가?
“마수를 말하는 건가? 그런 건 지상에 없다.”
“아닐 텐데. 분명 그의 기운을 이 땅에서 읽었다. 말해라, 인간. 시작의 드래곤은 어디에 있지?”
그 순간, 유길선의 머릿속에 누군가 떠올랐다.
유은새와 같이 왔던 정체를 알 수 없는 남자.
그자도 저 보라색 머리의 남자와 마찬가지로 인간처럼 느껴지지 않는 기운을 품고 있었다.
설마, 저자들이 찾는 시작의 드래곤이라는 게.
“……그는 이곳에 없다.”
“그러면 어디에 있지?”
“한국. 이 대륙의 끝에 위치한 나라에 있다.”
그러자 보라색 머리카락의 남자가 살기 어린 섬뜩한 웃음을 흘렸다.
“그런가……. 드디어 찾았군.”
그는 일행을 이끌고 다시 천공섬에 올라탔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그곳을 떠났다.
“기, 길드장님. 이대로 보냅니까? 격추시킬까요?”
“놔둬.”
어차피 저자들의 목적은 자신들이 아니다.
최소한의 인력만 남긴 채 군대를 해산하고 길드로 돌아온 유길선은 한국에 있는 한우리에게 전화했다.
만약 그자들이 찾는 게 그 남자가 맞다면, 경고는 해 주는 게 좋겠지.
어마어마한 재앙이 곧 덮칠 거라고.
“혹시 ‘시작의 드래곤’에 대해 알고 있습니까?”
***
길드장실에 모인 은새와 친구들은 심각하게 뉴스를 보고 있었다.
중국을 습격한 괴한의 등장.
그들이 사람들을 무차별하게 죽이는 모습과 잔해만 남은 도시의 영상이 떠오르자 유하가 탄식했다.
“저것들은 뭔데 벨키오르 님을 찾는 거야?”
“모르겠어. 그런데 저들이 사용하는 능력, 이능이 아니라 마법 같지?”
“그럼 벨키오르 님 세계에서 건너온 놈들이라는 건가? 드래곤?”
“아닐 거야. 벨키오르 님의 동족이 저런 짓을 저지를 것 같지는 않아.”
드래곤들을 전부 만나 본 것은 아니지만 그녀는 어느 정도 확신이 있었다.
은새가 불안감에 잘근잘근 입술을 깨물자 미리내가 어깨를 토닥였다.
“벨키오르 님은 어디 있어? 말해 봤어?”
“지금 자리에 안 계셔. 아케이아 님의 호출을 받고 잠깐 원래 세계에 가셨어.”
“이런. 하필 이때.”
친구들이 곤란함을 표했다.
유길선이 보내 준 영상도 있고, 괴한들이 노리는 게 벨키오르라면 그들의 힘만으로는 벅찰 터였다.
“언제 돌아오시는지는 몰라?”
“응. 얼마 안 걸릴 거라고는 하셨어.”
“햐, 연초부터 무슨 일이냐. 아니지, 어차피 우리 포식자인지, 걸식자인지 무찔러야 하잖아. 예행연습인 셈 칠까?”
솔이 주먹을 맞부딪치며 호전성을 드러냈다.
아무래도 여러 여건상 전투는 불가피할 듯했다.
“어느 경로로 오는 거지? 하늘?”
“유길선 길드장 말로는 천공섬을 계속 띄울 수 있는 건 아닌 모양인지 북한을 통해서 내려오고 있대.”
“북한이면, 마굴이잖아?”
북한은 격변의 시대가 도래한 후 대응에 실패해 붕괴한 지 오래였다.
지금 그곳은 마수들이 들끓는 접근 불가 구역이었다.
한숨을 쉰 우리가 핸드폰을 챙겨 들었다.
“이걸로 시간은 벌 수 있겠어. 하지만 벨키오르 님이 늦으실 때를 대비해야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