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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키운 마수가 드래곤을 물고 왔다 (162)화 (162/190)

160화 – 드래곤의 수치

크리스마스 당일 아침이 밝았다.

잠투정도 없이 눈을 반짝 뜬 별이는 가장 먼저 머리맡의 양말을 확인했다.

“사, 산타 하부지가 오셨어!”

밤늦게까지 버티던 아이는 결국 자신도 모르는 새 잠들어 버렸다.

산타 할아버지를 직접 보지 못한 건 아쉬우나 볼록한 양말이 그가 다녀갔음을 의미했다.

기쁨에 휩싸여 엉덩이를 들썩이던 별이가 양말을 들고 우다다 방 밖으로 뛰쳐나갔다.

“뉴나! 누나! 산타 하부지가 왔어요!”

“별아, 잘 잤어? 와. 산타 할아버지가 별이한테 선물을 주고 가셨구나.”

벨키오르와 함께 아침 준비를 하던 은새가 흥분한 아이를 보고 눈꼬리를 휘었다.

선물이 든 양말을 꼭 끌어안은 별이가 궁금증을 쏟아 냈다.

“누나는 산타 하부지 만났어요? 그림책처럼 정말 하얀 수염이 북실북실해요? 루돌프랑 썰매 타구 온 거예요? 문으로 똑똑 노크하고 들어왔어요?”

“별이가 착한 아이라고 칭찬을 듬뿍 해 주고 가셨어. 내년에 또 오겠다고도 약속하셨고. 으응, 아니. 창문으로 들어오셨나……? 그, 그보다. 선물 뭐 받았는지 우리 같이 확인해 볼까?”

“네!”

순수한 별이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에 양심이 찔린 은새가 얼른 화제를 돌렸다.

볼이 빨갛게 상기된 아이가 조심스럽게 양말에서 선물 상자를 꺼냈다.

포장지를 뜯은 별이의 금색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뉴나! 누나, 이거……! 트윈어스 우주복이에요! 꺄악!”

별이가 거실을 폴짝폴짝 뛰어다니며 돌고래 소리를 냈다.

그러다 돌아와서 상자를 확인하고 다시 뛰어다녔다.

소란을 듣고 별이와 같은 방에서 잠들었던 봄이와 황새, 백합이가 잠이 덜 깬 상태로 나왔다.

마수들이 관심을 보이자 별이가 화들짝 놀라서 상자를 꼭 끌어안았다.

“괜찮아. 산타 할아버지가 친구들 선물도 주고 가셨어.”

은새가 마수들 몫으로 준비해 뒀던 선물을 나눠 줬다.

봄이에게는 싱그러운 풀잎 향이 나는 푹신한 쿠션을, 황새와 백합이에게는 가장 좋아하는 간식인 던전산 붉은뿔딱정벌레를 주었다.

“와아! 산타 하부지 최고!”

삐비빗!

까악깍!

쉭쉭!

콧김을 내뿜을 정도로 흥분한 그들은 자랑하겠다며 다른 마수들이 있는 방으로 뛰어갔다.

큰 마수들에게도 아침 일찍 선물을 나눠 주었기에 은새는 웃으며 주방으로 돌아왔다.

조금 긴장한 얼굴로 그녀가 벨키오르를 불렀다.

“저, 벨키오르 님.”

“왜 그러지?”

“벨키오르 님 선물도 준비했거든요. 받아 주실 거죠?”

“내 선물을?”

마법으로 불을 다루던 벨키오르가 멈칫했다.

그는 하던 걸 멈추고 은새를 돌아보았다.

“어린이들만 받는 날이 아닌가?”

“아니에요. 가족이나 연인에게 주기도 하거든요. 벨키오르 님과는 그…… 런 사이가 됐으니까 기념으로.”

“……나는 그대의 선물을 준비하지 못했는데.”

“괜찮아요! 제가 드리고 싶어서 준비한 건데요.”

벨키오르가 침음을 삼켰다.

그런 날인 줄 알았으면 자신도 가장 귀한 것으로 준비했을 터였다.

물론 지금도 값비싼 귀물들은 몇 개 가지고 있었으나 상황이 임박해서 아무거나 주고 싶지는 않았다.

적어도 마음이 담긴 선물이어야 했다.

“이거예요.”

은새가 아공간에서 작은 상자를 꺼내 수줍게 내밀었다.

하늘색 리본이 묶인 상자를 벨키오르가 건네받았다.

끈을 풀어 상자를 열어 본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건…….”

“최고급 마석으로 만든 회중시계예요. 오랜 시간이 지나도 변형이 일어나지 않고 자가 수복 기능이 있어서 망가져도 금방 고칠 수 있어요. 아, 뚜껑의 문양은 세계수와 드래곤이에요. 눈치채셨죠?”

벨키오르가 손끝으로 은색 회중시계를 매만졌다.

장인의 솜씨를 짐작하게 하는, 뿌리가 도드라진 나무를 움켜쥔 용의 문양.

딱 쥐기 좋은 만큼의 무게감을 느끼며 뚜껑을 열자, 시계 중앙에 벨키오르의 눈동자 색과 똑같은 옐로 다이아몬드가 박혀 있었다.

소재부터 디자인까지 은새가 오롯이 벨키오르를 위해서 만든 티가 났다.

벨키오르는 낯선 감정을 느꼈다.

벅차오르는 것 같으면서도 가슴이 저미는 듯한 느낌.

하나뿐인 반려의 사랑스러움에 심장이 꽉 조여 왔다.

시선을 들어 올리니 은새가 불안감과 기대감을 담아 그를 보고 있었다.

벨키오르의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꽉 들어갔다.

“……고맙군. 이 보답을 어떻게 해야 할까.”

“아니에요. 저는 늘 벨키오르 님한테 받기만 하니까요.”

“받기만 한다고?”

납득하기 어려운 말이었다.

은새는 벨키오르에게 심적 안정감과 더불어 많은 것을 주고 있었으니까.

누군가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도, 함께 있을 때의 즐거움도 은새를 만나고 난 뒤에 알게 된 것들이었다.

어설프게나마 별이를 돌볼 수 있게 된 것도 다 그녀 덕이었다.

그때 호다닥 뛰어오는 소리가 들리더니 별이가 은새의 다리에 찰싹 달라붙었다.

“누나! 나 지금 이거 입어 봐두 돼요?”

“그래. 도와줄까?”

“네! 히히.”

벨키오르는 은새에게 어떤 보답을 하면 좋을지 곰곰이 생각에 빠져들었다.

***

콰과광!

거대한 폭발음이 들렸다.

지반이 흔들리면서 자수정이 군데군데 박힌 동굴이 무너져 내렸다.

[흐헉, 헉! 크흑…….]

먼지 속에서 동토의 드래곤 코르토브가 처참한 몰골로 몸을 움찔거렸다.

이곳은 그의 레어.

절대적으로 그가 유리할 수밖에 없는 장소임에도 습격자들의 무자비한 공세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본체로 현신했으나 그럴 걸 예상한 것처럼 상대는 기세를 올려 몰아붙였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려 흐릿해진 시야로 코르토브가 눈앞의 상대를 노려보았다.

거칠게 자라난 보라색 머리카락, 그리고 살기가 깃든 붉은 눈동자.

인간 세계에서 용살자로 이름을 떨치는 하늘의 신 모아누의 서자, 하야트였다.

[빌어먹을 반쪽짜리 주제에 네놈이 지금 무슨 짓을 저지르는지 알고 있는 거냐!]

“쓰레기를 치우고 있지. 수고롭게도 말이야.”

핏물이 흐르는 검을 하야트가 무성의하게 털어 냈다.

그에게 멱이 따인 드래곤들은 하나같이 본인들이 뭐라도 되는 것처럼 말했다.

정작 그것들이 죽었어도 이 세계는 변함없이 잘만 굴러가고 있었다.

빌어먹게도.

“시작의 드래곤은 어디에 있지?”

[……뭐?]

일순 멍해졌던 코르토브가 폭소를 터트렸다.

중간중간 상처가 아픈지 거친 숨을 몰아쉬기도 했다.

[네놈, 신역을 노리는 거냐? 하하핫! 반이나 인간의 피가 흘러서 그런지 어리석구나. 자격도 갖추지 못한 놈이 그곳에 한 발짝이라도 발을 들여 놓을 수 있을 것 같으냐?]

얼굴을 무섭게 굳힌 하야트가 검을 횡으로 그었다.

[컥!]

“곧 죽을 놈이 잡소리가 많군.”

코르토브는 죽음을 직감하고 피식피식 웃었다.

재수 없게 용살자에게 뒤를 잡혀 이런 꼴이 됐지만 혼자 죽을 순 없지.

역시 마지막 순간 운명은 저를 버리지 않았다.

신역의 위치가 아닌, 벨키오르가 어디 있는지 답하는 거라면 드래곤의 사명에도 위배되지 않는다.

평생을 저주해 온 오만한 놈에게 한 방 먹일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게다가 벨키오르는 지금…….

[네놈이 찾는 게 시작의 드래곤이라면, 그는 이 세계에 없다.]

“무슨 소리지?”

[반려를 따라 외부 세계로 갔으니. 그러니 드래곤을 죽이고 다니는 헛짓은 그만둬라.]

반쪽짜리가 도달할 수 없는 영역에 있었다.

만에 하나 그곳으로 갈 방법을 알아내어 둘이 격돌한다면 코르토브가 원하는 결과를 얻을 것이고, 가지 못한다고 해도 그 또한 반쪽짜리에게 패배감을 줄 수 있으니 일거양득이었다.

“……시작의 드래곤에게 반려가 있었다고?”

하야트는 귀를 의심했다.

목표로 한 만큼 시작의 드래곤에 대해 면밀한 조사를 했었다.

하지만 오랜 세월 동안 혼자였다고 했는데.

[그는 외부 세계의 인간을 반려로 맞이했다. 드래곤의 수치다!]

코르토브의 분노에 찬 음성은 들리지 않는 것처럼 하야트는 생각에 잠겼다.

드래곤이 인간 반려를? 그것도 외부 세계의?

……이거 잘만 이용하면.

[크큭……. 네놈의 죄가 이미 무겁구나. 아주 처절하고 비참한 최후가 기다리고 있겠어. 사지 육신이 갈가리 찢기고 영혼은 업화에 휩싸여 티끌의 재도 남기지 못하고 소멸하겠지. 그 꼴을 내 눈으로 보지 못하는 게 아쉽군.]

코르토브는 하야트가 방심한 틈을 노려 마력을 폭주시켜 자진했다.

용살자의 손에 죽으면 영혼조차 농락당한다.

그 전에 자연으로 돌아가는 걸 택한 것이다.

“감히!”

거센 마력 폭풍을 느끼고 하야트가 검을 휘둘렀으나 이미 늦었다.

흔적도 남지 않은 자리를 죽일 듯이 노려보는 그에게 마법사, 센도라가 다가섰다.

“하야트 님, 시작의 드래곤이 자리를 비운 이때 신역에 접근해야지 않을까요?”

“아니. 시작의 드래곤을 죽이는 게 먼저다.”

세계의 근원인 위그드라실을 점령하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이긴 하나 신역의 수호자인 시작의 드래곤이 품고 있는 생명의 권능을 먼저 취해야 했다.

그래야 목적에 다다를 수 있을 테니.

‘외부 세계에 있다고 못 찾을 줄 알았나?’

하야트가 목에 걸린 모아누의 조각을 움켜쥐었다.

거부하는 어미의 하룻밤을 취하고, 멸시와 겁박 속에서 태어난 저를 외면한 비정한 아비가 남긴 유일한 흔적.

다시 눈을 뜬 그의 시야에 외부 세계로 연결된 무수히 많은 가는 실이 보였다.

하야트가 손을 뻗어 실을 더듬었다. 이 중 시작의 드래곤이 향했을 곳은.

희미하게 빛나는 실을 하야트가 잡아챘다. 그러자 광활한 빛이 뿜어져 나오며 하야트와 그를 따르는 자들을 집어삼켰다.

“이곳이군.”

낯선 하늘을 올려다본 하야트가 붉은 눈동자를 형형하게 빛냈다.

“이 세상 어딘가에 시작의 드래곤이 있다. 찾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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