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키운 마수가 드래곤을 물고 왔다 (161)화 (161/190)

159화 – 우당탕탕 크리스마스이브

“으음.”

은새가 귀엽다는 듯 별이의 볼을 꼬집었다.

산타 할아버지에 대한 얘기를 처음 들었을 때부터 별이는 빨간 코트를 입고 하얗고 몽실몽실한 수염을 기른, 풍채 좋은 할아버지가 ‘허허허! 메리~ 크리스마스!’ 하고 인사하는 걸 상상했다.

수시로 ‘누나, 나 착한 아이예요? 선물 받을 수 있어요?’라고 확인하며 머리맡에 걸어 놓을 양말을 까다롭게 골랐다.

“그래. 같이 기다려 보자.”

규칙적인 생활을 하는 아이는 얼마 버티지 못하고 잠들 터였다.

순수한 동심을 지켜 주기 위해 은새는 안 된다는 말 대신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신나서 트리 주변을 빙글빙글 도는 별이를 따라 마수들이 폴짝폴짝 뛰었다.

은새는 소파에 앉아 있는 벨키오르의 어깨에 머리를 툭 기댔다.

기대기 편하도록 그가 몸을 낮춰 주었다.

“다 같이 크리스마스를 보낼 수 있어서 다행이에요. 가족들이 있을 때는 그게 약속이었거든요. 아무리 친구들이 좋아도 크리스마스는 가족과 보내기로.”

이전과 달리 은새는 가족들 얘기를 편하게 했다.

“내일 주문한 케이크만 찾아오면 돼요.”

“별이 좋아하겠군.”

“아, 맞다. 깜빡할 뻔했네.”

은새가 아무 데나 놨던 핸드폰을 들고 왔다.

메신저 친구 목록에서 양설과 왕호연을 찾아 유명 빵집의 기프티콘을 보냈다.

실은 며칠 전 한국에서 보낼 크리스마스가 쓸쓸하지 않을까 해서 집에 오지 않겠냐고 권유했으나 거절당했다.

‘그…… 그 사람 있는 거 아니야? 싫어!’

중국에서 있었던 일로 양설은 벨키오르를 무서워했다.

왕호연의 표정도 좋지 않아 집으로 부르는 건 포기했다.

“듀를 초대하는 건 어렵겠죠?”

“아무래도 어렵겠군. 누군가는 신역을 지켜야 하니까.”

“그럼 조만간 벨키오르 님 세계로 함께 다녀와요. 세계수 님도 뵙고, 듀에게 선물도 주고 싶어요.”

지난번에 갔을 때 아케이아와 벨키오르의 일을 오해해서 갖은 청승을 떨었던 게 생각나 은새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벨키오르가 의아하다는 눈빛을 보냈으나 아무것도 아니라며 손부채질만 했다.

‘혹시 아케이아 님은 그때 일부러 그러셨던 걸까?’

이제 와 드는 생각이지만 아케이아가 보란 듯이 그런 행동을 한 건 은새를 자극하기 위함인 듯했다.

벨키오르 님도 이상하게 여겼다고 했고.

때마침 화제를 돌리기 좋게 티브이에서 일기 예보가 흘러나왔다.

내륙은 아쉽게도 눈이 안 올 모양이었지만 그녀가 있는 강원도 홍천군의 깊은 산속은 지금도 눈이 소복이 쌓여 있었다.

“연초에 스키장이나 스케이트장에 갈까요? 음. 별이가 너무 어려서 안 되려나. 그럼 해외로 여행 다녀오는 건 어때요?”

“그대가 원한다면.”

“그러면 항공편 알아봐야겠다. 제가 갔었던 곳 중에 정말 풍경이 예쁜 곳이 있거든요. 보여 드리고 싶어요.”

바로 핸드폰으로 검색하는 그녀에게 벨키오르가 조금 진중한 표정으로 질문했다.

“그런데 산타라는 노인은 정말 오는 건가?”

“네? 하하!”

의외의 질문에 은새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웃음을 터트렸다.

별이와 마수들이 무슨 일인가 하고 돌아봤다.

크리스마스 얘기를 처음 꺼낸 게 한 달도 더 되었는데 지금에서야 묻다니. 그것도 별이 몰래.

한참을 웃던 은새가 눈꼬리에 맺힌 눈물을 닦았다.

“그게 궁금하셨어요? 이건 비밀인데, 사실 산타 할아버지는 아이들의 부모님이에요. 아무래도 하룻밤 만에 전 세계를 도는 건 힘들어서 역할을 분담하기로 약속한 거죠.”

“역시 그렇군.”

의문이 풀렸다는 듯 벨키오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크리스마스 전야제에 착한 아이들에게 선물을 나눠 준다는 수상한 노인.

은새도 그렇고 이 세상 사람들이 하나같이 그 존재에 대해 우호적인 게 이상했었다.

단체로 정신 지배 마법이라도 걸린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사랑스러움이 울컥 샘솟은 은새가 눈을 찡긋하고 별이에게 하듯 벨키오르의 뺨에 뽀뽀했다.

그의 눈동자가 깊어졌다.

꾸꾸.

쿠르릉.

트리 구경을 다 했는지 도다리와 하늘이가 은새 곁으로 와 관심을 요구했다.

“응, 얘들아. 놀아 줘?”

하마터면 마수들이 다 보는 앞에서 깊은 애정 행각을 할 뻔했다.

하늘이가 벌러덩 배를 드러내 보이며 드러누웠다.

은새는 소파 아래로 내려가 하늘이의 배를 벅벅 긁어 줬다.

매애.

별이의 머리를 핥아 주는 쪼쪼의 고불고불한 청백색 털이 엉킨 게 보여 그녀는 빗을 가져와 빗겨 주었다.

한 번 빗을 때마다 털이 폴폴 날렸으나 벨키오르의 마법 덕에 청소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런데.

와장창!

“아이고, 얘들아!”

주방에서 뭔가 쏟아지는 소리가 들려 은새가 달려갔다.

언제 들어온 건지 황새와 백합이, 봄이가 간식 선반을 뒤지다가 밀가루 통을 엎어 버렸다.

흰 가루를 뒤집어쓴 마수들이 은새를 피해 슬금슬금 도망가려고 했다.

“너희! 간식 아까 먹었잖아. 씻어야겠네.”

은새는 마수들을 한 번에 안아서 욕실로 옮겼다.

청소는 벨키오르에게 맡겨도 씻기는 건 그녀가 직접 했다.

둥둥 안겨 가는 게 재밌다고 봄이가 삐로삐로 울었고 목욕을 싫어하는 백합이는 스르륵 빠져나가려다 황새의 고자질에 도로 붙들렸다.

애가 많으니 시선을 떼면 꼭 이런 일이 생긴다.

그래도 이런 소란스러움이 싫지 않아서 은새는 웃고 말았다.

다음 날.

해가 뜨기 전부터 마수들과 함께 눈 내린 산을 한바탕 뛰고 온 은새는 오후 무렵에 시내로 가 예약해 둔 케이크를 찾았다.

근래 별이와 마수들이 푹 빠진 우주복을 입은 캐릭터 케이크였다.

잘 챙겨 든 은새는 바로 집으로 돌아가기보다 거리를 좀 걸었다.

그녀를 알아본 사람들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으나 적당히 응수했다.

세계의 포식자와 종말의 씨앗에 관한 건 아직 어떻게 해야 할지 결론이 나지 않은 상황이었다.

갑자기 알게 됐다고 해서 바로 뭘 할 수는 없었으므로 우선 강림석으로 추정되는 유물을 찾기로 했다.

이럴 때 이매 길드장이 살아 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은새가 한 가게 앞에서 문득 멈춰 섰다.

‘벨키오르 님이 내가 준비한 선물을 마음에 들어 하셨으면 좋겠다.’

지금껏 받기만 한 게 고마워서 제작 시간을 고려해 한 달 전에 오더메이드로 주문을 넣었었다.

살면서 답례품을 준비한 적은 많지만 이토록 신경 쓴 건 처음이었다.

벨키오르라면 아주 사소한 걸 줘도 고맙다고 할 테지만 기왕이면 기념이 될 만한 걸 주고 싶었다.

그가 보일 반응이 기대돼 심장이 두근거렸다.

케이크를 들고 집으로 돌아가자 현관에서부터 맛있는 냄새가 풍겼다.

킁킁거리며 무슨 음식인지 유추해 봤다.

‘양념 갈비인가? 음. 피자 냄새도 난다. 또 뭐지?’

절로 행복한 미소가 입가에 피어났다.

주방으로 가니 홈 파티용이라고 하기에는 황송스러울 정도의 진수성찬이 차려져 있었다.

출장 뷔페라도 부른 것처럼 메뉴도 다양하고 보기 맛깔스러웠다.

마수들도 함께 먹을 거라 양이 푸짐했다.

“우와아. 이걸 직접 다 하신 거예요? 맛있겠다.”

“볼일은 다 보고 온 건가?”

“네. 저 얼른 손 씻고 와서 상 차리는 거 도와드릴게요.”

음식 하는 데 방해되지 않게 멀찍이서 배를 깔고 앉아 구경하고 있던 민들레와 쿠키가 은새에게 다가와 킁킁거렸다.

케이크에 관심을 보이는 마수들을 부드럽게 밀어내며 은새가 ‘안 돼. 이건 이따가.’ 하고 달랬다.

“누나, 우리 풍선 불어요!”

벨키오르를 도우러 가던 은새를 별이가 붙잡았다.

‘음, 어쩌지.’

은새가 곤란하게 주방을 쳐다보자 벨키오르가 괜찮다며 손짓했다.

“그래. 어떤 거 불까?”

“반짝이 풍선!”

둘은 거실에서 함께 색색의 풍선을 불었다.

얼굴이 빨개지도록 훅훅 분 별이가 입구를 잡고 넘겨 주면 은새가 묶었다.

풍선 크기가 들쑥날쑥했지만 그런 걸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까악!

굴러다니는 풍선을 황새가 부리로 콕콕 쪼다가 펑 하고 터트렸다.

“황새 너! 내가 얼마나 열씨미 불었는데!”

별이가 세모눈을 하고 황새를 째려봤다.

그런데.

펑!

옆에서 또다시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하늘이의 발톱에 걸려 연약한 풍선이 꽥 비명을 내질렀다.

“하늘아…….”

별이가 ‘부루투스, 너마저.’라는 대사가 생각나게 하는 충격받은 표정으로 하늘이를 봤다.

하늘이가 귀를 접으며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다 잘못 밟고 풍선을 또 터트렸다.

“히잉!”

“괜찮아. 누나가 더 불어 줄게. 이번엔 하트 모양으로 할까?”

“……조아요!”

별이가 울상을 지으니 마수들이 눈치를 보며 풍선에서 멀어졌다.

봄이만 좋다고 풍선 사이에서 뒹굴었다.

상다리가 부서지게 차려진 음식 사이에 은새가 케이크를 꺼내 놓았다.

별이가 반짝반짝 눈을 빛냈다.

“트윈어스……! 누나, 케이크가 트윈어스예요!”

“마음에 들어?”

“네!”

은새가 초를 꽂아 불을 붙였다.

역시 파티에는 이게 빠질 수 없지.

“하나, 둘, 셋 하면 다 같이 부는 거야.”

“네!”

“어, 봄아!”

봄이가 신기한지 가까이 가려고 해서 은새가 다급하게 붙잡았다.

그 틈에 슬그머니 상에 오른 백합이가 케이크를 장식한 체리를 날름 먹어 버렸다.

“안 돼, 초 끄고 먹어야지!”

별이가 어릴 적 그랬듯 백합이를 옴팡지게 쥐고 잡아당기자 백합이가 주르륵 체리를 뱉어 냈다.

“난리도 아니네요.”

“즐거워 보이는군.”

“네. 오늘 정말 즐거워요.”

별이가 크게 숫자를 셌다.

“하나, 둘, 셋! 후우~”

크리스마스이브를 밝힌 초가 훅 꺼져 들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