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화 – 세계의 포식자
벨키오르까지 참석한 던전 분석 회의가 시작됐다.
시스템에 대한 얘기가 가장 먼저 화두에 오르자 솔이 쾅 책상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우리가 시스템한테 깜빡 속아 넘어간 거야. 즐거운 여행 되시라면서 선량한 척 돈도 주고 자율도도 최대로 보장해 준다더니, 결국 다 시스템이 원하는 대로 됐잖아? 장난해?”
“힌트랍시고 지령을 내린 순간부터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었어. 우리도 모르는 새 시스템에 속박되어 있었던 거지.”
미리내가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적어도 강림석과 흑마법사들이 하려는 일이 뭔지 제대로 알아볼 걸 그랬어…….”
“아니. 알았어도 어떻게든 공략을 이어 갔겠지. 우리에게 그 세계는 환영이었으니까.”
“그래도 다른 방법을 찾았을 거야. 그런 식으로 끝낼 게 아니었어.”
인찬이 죄책감 어린 얼굴을 했고 다른 이들도 표정이 어두워졌다.
던전에서 쫓겨나기 직전 보았던 광경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아슬란을 포함한 에스퍼들은, 그들이 정을 줬던 마을 사람들은 무사히 살아남았을까?
……그럴 리 없겠지.
[이 세계는 종말을 맞이할 것입니다.]
마지막 순간 본 메시지가 뇌리에 박혔다.
“시스템은 처음부터 흑마법사에게 우호적이었어. 그러니 우리도 편향된 인식을 가질 수밖에 없었고.”
“다시 생각해도 시스템이 개자식이네. 재공략 가 버려?”
“아. 오늘 아침에 들어온 소식인데 공략이 완료된 뒤 남양주시 던전이 평범한 A급 던전으로 바뀌었대.”
“뭐? 스토리형 던전이 아니라?”
“응.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서 헌협에서 조사단을 파견한다더라.”
“……우리가 꿈을 꿨나? 아니지?”
“아, 울화통 터져!”
솔이 가슴을 세게 두드렸다.
그녀의 감정에 반응해 홍염이 타닥타닥 피어올랐다.
부상자도 사망자도 없었지만 그들이 다녀 본 중 최악의 던전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 찝찝함을 해소할 길은 이제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은새는 시그라엘의 시험 던전에서 가지고 나온 현상 수배지를 만지작거렸다.
던전 부산물로 취급된 것인지 현실에서도 형태가 보존되었다.
이제 그 세계를 다녀왔다는 증거는 이것과 예언서뿐이었다.
“우리야, 예언서 좀 꺼내 줘.”
“알겠어.”
우리가 아공간에서 보상으로 얻은 SSS급 예언서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들은 유일하게 남은 단서를 꼼꼼히 뜯어보았다.
[전에 없던 혼란이 도래하고 질서를 어지럽히는 이들이 나타나면 이는 멸망의 전조라고 할 수 있으니 세계의 균형이 어그러지고 아득한 미지로부터 침식이 뻗어 오고 있다는 증명이다.
붉은 눈의 계도자가 너희를 현혹해 그 문을 열어젖히니 텐둘라의 사자가 지상에 내려와 모든 것을 파괴할 것이다.
만일 다른 세계의 이방인이 찾아온다면 이 땅의 종말이 머지않았으니 오로지 그들을 죽이는 것만이 모든 혼란을 종식시키는 길일 것이다.]
“예언서치고는 꽤 직관적인데. 첫 문단은 에스퍼와 게이트의 등장을 일컫는 거겠고. 그런데 이 부분, 현혹한다는 게 보통 긍정적인 의미로 쓰이지 않지 않나?”
“맞아. 흑마법사들이 가지고 있던 건 훼손된 예언서였으니까, 계도자라는 단어만 보고 착각한 거겠지. 사실 로먼이 세계를 종말로 이끌 장본인이었는데.”
“텐둘라……. 이게 그때 하늘을 가르고 나타난 괴물인가. 시그라엘부터 아큘라까지. 낯선 이름들이 자꾸 등장하는데 이거 괜찮은 거냐?”
“있잖아. 다른 세계의 이방인이라는 게 우리를 가리키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 내가 너무 나간 걸까?”
“…….”
친구들이 침묵했다.
그들이 나타났기에 로먼을 구했고, 강림석을 탈취했으며, 미지의 존재를 그 땅에 불러온 건 사실이었다.
은새가 벨키오르를 돌아보았다.
“벨키오르 님, 짐작 가는 게 있다고 하셨죠?”
“그래. 그대의 얘기를 듣고 떠오른 게 있었다. 세계선에 숨어들어 종말의 씨를 뿌리고 근원을 파멸시켜 힘을 얻는 어긋난 존재들.”
벨키오르가 초콜릿을 손에 쥔 채 동그랗게 눈을 뜬 별이를 내려다봤다.
“세계의 포식자. 너희가 본 건 그것들 중 하나겠지.”
“세계의 포식자요? 그게 뭔데요?”
“신 같은 건가요? 그러고 보니 시스템 창에 이계의 어쩌고라고 뜨던데!”
벨키오르는 은새에게 하는 것과 달리 고저 없는 목소리로 설명을 이어 나갔다.
“이 순간에도 수많은 차원이 생성되고 사라지고 있다. 그 과정에서 엄청난 에너지가 발생하는데, 포식자들은 그걸 걸식하는 게 목적이다.”
“…….”
“신? 그건 세계선에 기생하는 벌레나 마찬가지다. 포식자들은 끝없는 차원계를 흘러 다니다 약하고 어린 세계를 발견하면 집어삼키려 들지.”
“왜…… 왜 그러는 건데요?”
“심장을 빼앗긴 인간이 얼마나 살 수 있지? 그런 거다. 근원이 없는 것들은 소멸되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대체할 만한 것을 갈구하니까.”
벨키오르는 가볍게 머리를 흔들었다.
“하지만 차원은 배척하는 성질이 있어서 포식자라고 한들 강제로 문을 열어젖히는 건 불가능해. 그래서 몇 단계를 거쳐 서서히 접근한다. 차원끼리 충돌시켜 혼란을 일으키고 약화시키는 게 첫 번째.”
그 말에 떠오르는 게 있었다.
던전.
“그리고 씨앗을 뿌려 내부에서 대신 문을 열어 줄 대상을 고르는 게 두 번째다. 쉽게 말해 초대의 개념이다. 뚫고 들어가는 것보다 그게 더 쉬우니까. 낌새를 보아 하니 이미 이 세계도 포식자의 눈에 들었을 터.”
“네?! 그게 정말이에요?”
그렇다면 로먼이 포식자가 뿌린 씨앗.
강림 의식은 문을 열어젖히는 과정이었을 것이다.
“너희들이 본 건 실제 포식자에 의해 멸망한 세계의 단편. 곧 이곳에 닥칠 미래라고 할 수 있겠지.”
“말도 안 돼! 그 괴물이 여기에도 나타난다고?”
“막으려면 어떻게 해야 해요?”
그들이 목격한 괴물은 재앙 그 자체였다.
아무리 강한 헌터들이 떼로 달려든다고 해도 막을 수 있을지 없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불안해하는 은새와 친구들을 차분한 금색 눈동자가 훑었다.
“어딘가에서 움트고 있을 씨앗을 찾아내 죽여라. 그게 우선 할 일이겠군.”
***
어둠에 몸을 숨긴 한서리의 입에서 하얀 입김이 뿜어졌다.
연말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거리.
사람들은 추위에 떨면서도 들뜬 기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이매가 살해당한 뒤 한서리의 세상은 온통 흑백으로 뒤바뀌었다.
사는 게 고통스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길드원들과 함께 이매를 죽인 범인을 추격하던 그녀가 이곳에 온 건 확인할 게 있기 때문이었다.
한서리의 낮게 타오르는 고요한 시선이 장례식장에서 나오는 천창현에게 닿았다.
‘골드스타 길드의 A급 헌터 천창현.’
현장에 남은 흔적을 더듬어 가장 먼저 불법 헌터들을 턴 그녀는 누군가 음지에서 그들을 규합해 세력을 꾸리고 있음을 알아챘다.
전쟁이라도 하려는 건가 싶을 만큼 많은 숫자였다.
한국에 있는 불법 헌터들은 물론 해외까지 연결되어 있는 듯했다.
심상치 않은 일이라고 판단한 한서리는 조금 더 자세히 파고들어 주동자가 누구인지, 누가 법조차 피해 갈 범죄자들을 한 세력으로 엮었는지 조사했다.
그게 천창현이었다.
흑야의 검객으로 불리며 오하나, 이아람, 진해성 등과 함께 최근 반년 사이 꽤 이름을 알린 남자.
‘백찬민 길드장이 이능 폭주를 일으킬 때 저자가 옆에 있었다고 했지.’
한서리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대외적인 이미지와 다르게 오만하기 짝이 없는 백찬민이 다른 사람을 배려해 자폭했다고?
그럴 바에는 너 죽고 나 죽자고 달려들 인간이었다.
혼자서는 억울해서 못 간다고.
더군다나 천창현의 증언 말고는 다른 목격자도 없었다.
SS급 헌터가 이능 폭주를 일으키는데 어떻게 멀쩡히 버틸 수 있었단 말인가.
‘수상해.’
파면 팔수록 천창현에게는 비밀이 많았다.
평범한 A급이라고 볼 수 없는 무력과 스킬들.
게다가 골드스타 길드에 들어가기 이전의 기록은 아주 사소한 것을 제외하면 찾을 수 없었다.
이건 의도적으로 지웠다는 뜻.
이매가 살해당한 날, 천창현의 행적은 묘연했다.
사선을 구르며 벼려진 한서리의 감이 이매의 죽음과 그가 연관 있을 거라고 가리키고 있었다.
직접 얼굴을 보니 더더욱 의심스러웠다.
한서리가 천창현의 뒤를 조심스럽게 밟았다.
천창현은 멀리서 따라붙는 은밀한 기척을 느끼고 별도 뜨지 않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조심한다고 했는데 어디서 꼬리를 잡힌 모양이었다.
‘결국 이렇게 됐나.’
***
휴가를 받아 강원도 집으로 돌아온 은새는 별이와 마수들과 함께 크리스마스트리를 꾸미고 있었다.
거실에는 그녀가 욕심껏 산 오너먼트들이 어질러져 있었다. 빨강, 초록, 노랑 등 화려한 색채가 거실을 가득 채웠다.
마지막으로 커다란 별을 트리의 꼭대기에 꽂고 꼬마전구에 불을 밝혔다.
“꺄악. 너무 예뻐요, 누나!”
삐삐!
까악.
쉭쉭.
별이가 돌고래 소리를 내며 박수 쳤고 봄이와 황새, 백합이도 폴짝폴짝 뛰어다녔다.
아성체가 된 도다리와 민들레, 하늘이나 쪼쪼, 쿠키도 거실에 둘러앉아 완성된 트리를 바라봤다.
매년 하는 거지만 올해는 유독 더 예쁜 것 같았다.
상기된 별이의 뺨에 뽀뽀를 한 은새가 루돌프 뿔 모양의 머리띠를 씌워 줬다.
귀여운 아기 루돌프가 그녀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누나! 산타 하부지는 언제 와요? 진짜 썰매 타구 오는 거예요?”
“크리스마스이브에. 별이랑 마수들 선물 가지고 오실 거야.”
“꺄악. 산타 하부지랑 만날 수 이써요?”
“글쎄. 별이 잘 시간이라 어렵지 않을까?”
“안 자구 기다릴래요!”
별이가 초롱초롱 기대감에 부푼 눈을 빛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