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화 – 나부터 죽여 보든가
싸늘한 얼굴을 한 천창현이 핸드폰으로 포털 뉴스란을 보고 있었다. 메인 화면이 온통 언노운 진압 작전에 투입됐던 헌터들의 활약상과 찬사로 뒤덮여 있었다.
새로고침을 해도 언론사만 달라질 뿐, 똑같은 내용이었다.
천창현의 이름도 종종 눈에 보였으나 육재희라든가, 도천 S급들, 길아연, 이진래, 김우종, 목화시 등 주로 언급되는 이들은 정해져 있었다.
누가 뭐래도 주역은 그들이었으니까.
애초에 천창현은 눈에 띄려 하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그가 작전에 참여한 건 다른 목적이 있어서였으므로.
‘역시 그 남자에 관한 건 없군.’
벨키오르에게 기억 조작을 당해 전투 후반부 상황은 제대로 기억나지 않았지만 천창현은 그 남자가 현장에 나타난 것만은 잊어버리지 않았다.
그가 있었다는 사실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다른 헌터들과 대조적이었다.
천창현은 이전부터 벨키오르에 대한 의혹을 품고 있었다.
그런 눈에 띄는 존재감을 가지고도 여태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사람. 전생에 없었던 인물이자, 유은새의 저주를 풀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이였다.
‘언노운의 수장을 처단한 것도 그겠지.’
하야트의 최후는 모호했다. 시체조차 찾을 수 없었기에 추측도 불가능했다.
천창현이 파악하기로 하야트의 무력 수준은 한국 헌터들이 전부 달려들어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을 정도였다.
물론, 전투 중에 한국 헌터들이 성장한 건 예상 밖이었다. 특히 서인찬.
도천 크루에 속해 있기는 해도 소심한 성격과 낮은 자존감 때문에 그의 존재감은 거의 묻혀 있었다.
아무리 길아연의 보조가 있었다고 하나 단신으로 쿠랄을 쓰러뜨린 건 정말이지 의외였다. 고유 능력을 그런 식으로 개화한 것도 처음 보았다.
‘시작의 드래곤이라…….’
주머니에 아무렇게나 핸드폰을 쑤셔 넣은 천창현은 인적이 드문 밤거리를 걸었다.
드래곤. 던전에서 출현하는 마수 중 용과 닮은 형상의 마수를 지칭하는 말.
‘시작의 드래곤’이라는 게 단순한 명칭인지, 아니면 정말 그 하늘색 머리의 남자가 인간이 아닌 드래곤이라는 종족인지 그로선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후자라는 강한 확신이 들었다. 외부 세계에서 건너온 존재라면 많은 게 설명된다.
세계선의 비밀을 알고 있는 천창현은 빙빙 돌아가지 않고 어렵지 않게 정답에 도달했다.
‘현시점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변수야.’
천창현은 그가 자신의 기억을 조작했다는 것에 강한 위기감과 불쾌감을 느꼈다.
전력 파악도 되지 않고, 뭣보다 그 남자는 유은새와 깊은 연관이 있어 보였다. 앞으로 천창현이 하려는 일에 있어서 벨키오르가 방해가 될 가능성이 컸다.
‘역시 유은새를 제거해야 해.’
그동안은 주의 단계였지만 결심이 섰다. 그녀가 SS급이고 주변에 항상 도천 S급들이 있다고 해도 천창현은 상관하지 않았다.
몬스터테이머인 이상 주변에 마수가 없으면 평범한 S급과 다를 바가 없었고 유은새는 어차피 죽었어야 할 사람이다.
천창현에게 이 세계의 인간은 포식자들의 제물, 그 정도였다. 그는 스스로가 더 강해지는 게 가장 중요했기에.
그 남자가 유은새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일 처리를 하면서 자신이 한 줄 모르게, 기왕이면 다른 사람에게 뒤집어씌우는 게 좋을 듯싶었다.
거사를 치르기 전에 드래곤과 전면전은 피해야 했으니까.
하지만 선결해야 하는 문제가 있었다. 천창현은 은밀하게 뒤쫓아오는 기척을 느꼈다.
한서리. 미뤄 뒀던 그녀의 처분을 매듭지어야 했다.
황해도에서 복귀한 천창현은 다른 헌터들처럼 휴식 시간을 가졌다. 그러면서 타이밍을 엿봤다.
어느덧 인적이 사라진 거리에 그의 발걸음 소리만 들렸다. 가로등이 불길하게 깜빡거렸다.
‘다른 갑화 길드원들은 없나 보군.’
호재였다. 목격자를 신경 쓰지 않아도 되니.
가로등이 꺼진 순간에 맞춰 천창현의 모습이 사라졌다. 중국 4흉수의 신기로 만든 무구를 착용하고 단검을 손에 쥔 그가 한서리의 뒤에서 나타났다.
사악한 기운을 내뿜는 칼날이 그녀의 목에 들이 밀어졌다.
“살금살금 쥐새끼처럼 잘도 따라다니는군.”
“…….”
“갑화 길드의 한서리 부길드장. 무슨 목적이지?”
한서리는 미행에 적합한 차림을 하고 있어 얼굴이 보이지 않았으나 굳이 모른 척할 필요는 없었다.
목표가 미행을 알아채고 있을뿐더러 그녀의 정체까지 알고 있자 일순 당황했던 한서리는 타나토스의 낫을 소환해 천창현의 사정거리에서 벗어났다.
모자가 벗겨지고 살기가 깃든 눈빛을 한 그녀의 얼굴이 드러났다.
“골드스타 길드의 천창현 헌터. 백찬민 길드장을 당신이 죽였습니까?”
“내가? 고작 A급인 내가 무슨 수로. 이미 여러 번 소명한 내용인데.”
천창현이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비록 방심했다고 하나 한서리의 뒤를 너무나 쉽게 잡아 놓고 가증을 떨고 있었다.
“저는 당신이 백찬민 길드장을 죽였을 거라고 확신합니다.”
“증거 있나?”
“○월 ○일 22시부터 다음 날 새벽 2시까지. 어디에서 뭘 하고 있었습니까?”
“미행 다음은 취조라니? 영문을 모르겠군.”
“대답하십시오!”
심증은 확실한데 증거가 없어서 초조한 마음에 한서리가 날카롭게 외쳤다.
괜히 뜸을 들이던 천창현이 한서리의 긴장감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무렵,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 오래돼서 기억이 안 나네.”
“……당신이 이매 길드장님을 죽였습니까?”
“그랬다면?”
“역시 당신이었군요!”
무섭게 얼굴을 일그러뜨린 한서리가 타나토스의 낫을 쥐고 천창현에게 달려들었다. 단죄의 낫이 스산한 검명을 울리며 어둠을 갈랐다.
“왜…… 왜! 이매 길드장님은 그렇게 가실 분이 아니었습니다. 남에게 피해 끼치며 산 적도 없는 분을 대체 왜!”
“그자가 내가 필요한 물건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뭐라고요?”
“필요해서 뺏었다. 그리고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 죽였다. 문제가 되나?”
너무도 당당한 그의 태도에 한서리는 말문이 막혔다. 이매가, 그녀의 우상이. 그런 어이없는 이유로 살해당해서.
“그리고…… 이제 당신도 알았으니 죽어야겠군.”
“당신은 미쳤어!”
이 자리에서 한서리를 죽일 생각으로 모든 걸 밝힌 천창현이 맹렬한 기세로 단검을 휘둘렀다.
어둠이 내린 아무도 없는 거리. 낫과 단검이 현란한 소리를 내며 정신없이 부딪쳤다.
생살을 도려 낸 것 같은 표정으로 한서리가 이를 악물었다. 이성이 흐릿해져 거의 눈이 뒤집힌 상태였다.
“기필코 당신을 제 손으로 찢어 죽이겠습니다!”
“가능하다면. 순순히 죽어 주지는 않을 거다.”
‘저승 명부’ 스킬을 발동하는 한서리를 앞에 두고 천창현이 4흉수의 신기를 끌어올렸다.
그녀의 손에 떠오른 검은 표지의 책이 차르르 넘어가더니 땅에서 죽음이 서린 기운이 일어나 천창현을 묶으려 들었다.
그 순간 4흉수의 신기가 휘몰아치며 반발했다. 죽음마저 찢는 흉악한 살의가 천창현의 주변으로 넘실거렸다.
“이건……!”
“나라고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은 건 아니거든. 당신의 그 능력은 성가시니까.”
천창현은 흉수들의 신기에 잡아먹힐 수 있다는 위험성을 안고도 그 힘을 폭발시켰다. 그의 몸이 고약한 악취를 풍기며 썩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그는 포션을 수시로 들이켜며 한서리의 ‘영혼 강탈’을 저지했다.
저승 명부 스킬로도 천창현을 붙잡을 수 없자 타나토스의 낫이 어둠에 스며들어 사라지더니 사슬로 변했다.
거미줄처럼 사방으로 뻗어 간 사슬은 천창현의 움직임을 따라 날카로운 비수를 꽂았다.
천창현은 숨겨 두었던 스킬들을 남김없이 개방해 모든 공격을 무로 돌렸다.
압도적인 실력 차에 경악한 한서리가 입을 벌렸다.
“이럴 수가…… 당신, 평범한 헌터가 아니군요.”
“그걸 이제 알아도 늦었어!”
4흉수의 신기는 오래 사용할 수 없었기에 천창현은 빠른 속도로 몰아쳤다.
피할 수 없는 거대한 살의가 한서리를 덮쳤고, 그녀의 몸도 천창현과 마찬가지로 썩어 문드러지기 시작했다.
부패가 빠르게 진행됨에 따라 한서리는 위기에 봉착했다. 포션을 들이부어도 4흉수의 신기가 치유를 방해해 몸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두 번은 못 할 짓이야. 당신처럼 눈치 빠른 사람이 더 없기를 바라야겠어.”
갑화 길드원들은 이매 길드장의 일이라면 물불 안 가리고 달려드니 상대하기 껄끄러웠다.
무너진 한서리 앞으로 천창현이 걸어갔다. 죽음에 맞서는 건 그에게도 상당한 무리가 따랐으므로 당분간은 숨어 지내야 할 듯싶었다.
“아직 안 끝났습니다!”
어둠 속에 숨어 있던 타나토스의 낫이 천창현의 목을 베었다. 그러나 간발의 차로 그의 신형이 사라졌고 그렇게 한서리가 숨겨 뒀던 비장의 수는 쉽게 가로막혔다.
타나토스의 낫에 천창현이 단검을 찔러 넣었다. 죽음과 살의가 상충하며 거세게 반발력을 일으켰다.
쾅!
거대한 폭발음과 함께 광풍이 휘몰아치며 무기들이 박살이 났다.
충격받은 한서리와 달리 천창현은 무덤덤하게 손을 털었다.
“죽은 사람은 말이 없으니. 당신도 이 비밀을 영원히 지키게 되겠군. 이매 길드장처럼.”
그가 다른 무기를 꺼낸 그 순간, 연꽃 향이 멀리서부터 훅 풍기며 검기가 날아왔다.
콰광!
“……한우리 길드장?”
기습을 피해 상대를 확인한 천창현의 눈동자가 일순 커졌다.
병원복 위에 패딩을 걸친 우리가 그들이 있는 길 끝에 서 있었다. 아직 이능을 완전히 회복하지 못한 그는 어딘가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천창현 헌터. 지금 뭐 하는 짓입니까? 한서리 부길드장을 죽이려고 했죠?”
“……그녀가 먼저 저를 미행하고 공격했습니다. 저는 응전했을 뿐이고요.”
“천창현 헌터는 누가 따라다니면 다 죽입니까? 위험한 사고방식이네요.”
의외의 인물의 등장에 낭패감을 느낀 천창현이 위협하듯이 낮게 말했다.
“제 일이니 신경 끄고 가던 길 가시죠. 아직 요양 중이라고 들었는데.”
“그럴 순 없겠는데. 그녀를 구해 달라고 부탁받아서.”
우리의 시선이 일순 한서리에게 향했다가 다시 천창현에게 고정되었다.
“나부터 죽여 보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