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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키운 마수가 드래곤을 물고 왔다 (158)화 (158/190)

157화 - 짐작 가는 바가 있다

백찬민의 사망 소식에 은새와 친구들은 집에도 못 가고 길드에 들러 옷만 갈아입은 채 장례식에 다녀왔다.

별이는 취침 시간이 한참 지나 길드원에게 맡겨 놓은 채였다.

“이게 뭔 일이냐. 진짜 정신이 하나도 없네.”

“폭풍이 지나간 것 같다. 와, 지치네.”

길드장실에 모인 그들은 겉옷만 벗고 여기저기 널브러졌다.

로먼의 뒤통수와 장례식.

충격적인 사건을 연달아 겪었더니 정신적 피로도가 상당했다.

“백찬민 그놈 하는 짓 밉상이어서 언젠가 칼 맞을 줄 알았지만 이능 폭주라니. 그게 말이 되냐? 각성석 불량 아니야?”

“은새야, 너도 위험한 거 아니야?”

“아닐걸. 그랬으면 벨키오르 님이 가만 놔두셨겠어?”

“그건 그렇지…….”

인찬이 걱정스럽게 은새를 돌아보았으나 바로 미리내가 반박했다.

반려에 대한 애정이 각별한 벨키오르는 물 샐 틈 없이 은새를 보호했다.

중국에 납치당했을 때도, 시그라엘의 시험 던전에서도 그의 마법은 빛을 발했다.

“아무튼 이번 일 때문에 전 세계 각성석 수요량이 줄어들지도 모르겠다. 파편은 제법 유통되고 있지?”

“인간의 탐욕을 무시하지 마라.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강해지려는 게 헌터라는 족속들이니까.”

“그런데 각성석이 이능 폭주를 일으켰다는 직접적인 증거는 어디에도 없잖아.”

“흠…….”

친구들이 생각에 빠져 있는 동안 솔은 졸려 죽겠다며 하품을 쩍쩍 했다.

“죽은 백찬민 옆에 천창현 헌터가 있었다고 했지?”

“어. 아까 장례식에서 그 사람 우리 보는 눈빛 봤어? 어우, 나는 관상 안 믿는데 뭔가 있겠다 싶더라니까. 뱀눈이라고 하던가, 그런 걸 보고?”

“뱀눈인지는 모르겠고 아무튼 길드장이 죽었는데 보일 눈빛은 아니었지. 마른걸레를 쥐어짜도 그것보다는 촉촉하겠더라.”

소파에 구겨져 있던 유하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데 그 사람 진짜 A급 맞아?”

“천창현 헌터는 유례없이 등급 상승을 한 케이스지. 그런 일이 두 번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어.”

“그럼 S급이라도 된다는 소리야? 각성석도 없이 무슨 수로.”

“나 혼자만 레벨업, 그런 건가? 푸하하! 내가 말했지만 말도 안 됨.”

“그런 벼락같은 행운이 두 번이나 온다고?”

우리가 책상에 기대어 서서 턱을 매만졌다.

“백찬민 길드장은 SS급이었어. 게다가 전투 경험도 풍부했고. 만일 살해당했다면 동기는? 방법은?”

“천창현이 백찬민을 죽였다고 아예 굳히는 거야?”

“한 터럭의 의혹이라도 남는다면 무시할 수 없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으니 여러 각도로 생각해 봐야 했다.

그래야 무슨 일이 벌어져도 대응할 수 있을 테니.

“다들 왜 그렇게 심각해. 덤비면 묵사발을 내 버리면 되는데.”

솔이 기세를 끌어 올리며 낄낄거렸다.

그러나 눈빛만큼은 사냥감을 노리는 맹수처럼 사나웠다.

로먼에게 거하게 뒤통수를 맞고 느낀 바가 있는 모양이었다.

미리내가 피로감이 깃든 눈동자를 깜빡였다.

“백찬민이 죽었으니 골드스타 길드가 흔들리겠어. 한국 2위 자리에서 내려올지도.”

“육재희 부길드장이 있잖아. 백찬민 때문에 가려져서 그렇지, 신임도 있고 능력도 출중해. 아마 혼란에 빠진 길드를 수습하는 것도 육재희 부길드장의 몫이 되겠지.”

“천창현 헌터가 백찬민 길드장을 죽인 게 맞다면, 골드스타 길드를 노린 걸까?”

곰곰이 생각해 본 은새가 입을 열었다.

“일개 길드원이 길드장이 죽는다고 무슨 이득이 있겠어? 간부급이라면 모를까. 천창현은 입사한 지 이제 반년쯤 됐잖아.”

“그런가.”

머리를 헝클인 우리가 박수를 쳤다.

“늦었으니 여기까지만 하자. 다들 돌아가지 말고 수면실에서 자. 내일 점심 먹고 바로 시그라엘의 시험 던전에 대한 분석 회의를 할 거야.”

“집에 좀 가고 싶다. 공략이 끝났는데 왜 우리는 집에 못 가?”

“급한 일 마무리되면 휴가 줄게.”

“약속했다, 길짱. 그리고 크리스마스 선물 기대해도 되지?”

“너희는 나이가 몇 개인데…….”

“너는 지금 크리스마스를 즐기는 온 세상 어른이들을 모욕했다.”

“잘 자고 내일 보자, 얘들아.”

씻고서 개인 수면실로 온 은새는 침대 옆 간접등을 켰다.

미리 이곳으로 옮겨져 도롱도롱 잠에 빠져 있던 별이가 그녀의 기척을 알아채고 가물가물한 눈을 떴다.

“뉴나……?”

“응, 누나가 옆에 있을 테니까 별이는 코하자.”

“우웅.”

잠투정하는 아이를 토닥여 준 뒤 은새는 침대 등받이에 기대 충전시켜 둔 핸드폰을 켰다.

잠깐의 망설임 끝에 그녀가 영상 통화 버튼을 눌렀다.

“벨키오르 님. 저예요. 안 주무시고 계셨어요?”

잠을 깨우는 게 아닐까 걱정했던 게 무색하게 금방 화면이 바뀌고 보고 싶었던 이의 얼굴이 나타났다.

피로감을 잊은 듯 은새의 안색이 절로 환해졌다.

현실은 5일이 흘렀으나 그녀가 던전 안에서 보낸 시간은 그보다 훨씬 길었기 때문에 잊으려고 노력했던 그리움이 차올랐다.

스피커를 통해 나직한 목소리가 밤공기에 스며들었다.

-은새. 이제 나온 건가?

“아니요. 일이 생겨서 지금 길드에 있어요. 2, 3일 정도는 더 여기서 머물러야 할 것 같아요.”

-다친 곳은?

어김없이 묻는 말에 은새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전혀요. 지금까지 들어갔던 던전 중에서 난도는 어렵지 않은 편이었어요. 조금 기묘한 일을 겪었지만……. 참, 벨키오르 님의 마법이 하나 깨졌어요.”

-그대가 무사했으니 됐다.

“음……. 별일 없으셨죠?”

-별일?

생각하는 것처럼 벨키오르가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대가 없으니 집이 적막하더군.

“네?”

-긴 세월을 살아오면서 시간을 의식한 적이 없는데 기다림이 길게만 느껴졌어. 해가 뜨고 밤이 오는 게 유난스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금색 눈동자가 다시 또렷하게 그녀를 응시했다.

-그대가 그리웠다. 은새.

백 마디 말보다 무거운 진심이었다.

그도 자신과 같은 마음이었다는 걸 알게 된 은새는 울컥했다.

결국 참고 참았던 말을 쏟아놓고 말았다.

“보고 싶어요, 벨키오르 님.”

-…….

“벨키오르 님?”

이렇게 말하면 무슨 말이라도 되돌려줄 벨키오르가 아무 반응이 없자 은새가 당황했다.

화면이 어느새 끊겨 있었다.

“어…….”

통신 불량인가? 아니면 벨키오르 님이 뭘 잘못 누르셨나?

다시 전화를 걸려던 차, 은새가 있던 수면실에 조명을 켠 것처럼 환하게 금빛 마력이 터졌다.

빛의 잔상이 남은 자리에 조금 전까지 핸드폰 액정 너머로 봤던 벨키오르가 서 있었다.

은새가 놀라서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그에게 다가갔다.

“벨키오르 님! 어떻게 오셨…… 아, 마법. 강원도에서 여기까지 오신 거예요? 저 때문에?”

“그런 말을 듣고 어떻게 가만있을 수 있겠나. 그대를 찾아오는 게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니.”

설령 원래 세계에 가 있었어도 은새가 자신을 찾는다면 돌아왔을 터였다.

벨키오르가 은새의 뺨을 손바닥으로 감싸자 기다렸던 것처럼 그녀가 든든한 품에 안겨 들었다.

이제야 집에 돌아온 기분이 들었다.

비록 장소는 길드 수면실이지만 더없이 편안함을 느꼈다.

은새를 끌어안은 벨키오르는 그녀의 목덜미에 코를 묻고 깊게 들이마셨다.

그녀 본연의 체향과 뒤섞인 벨키오르의 향이 옅어져 있었다.

이는 현실과 다르게 던전 안에서 제법 긴 시간을 보냈다는 뜻이었다.

“고생한 모양이군.”

“지금은 그런 생각이 하나도 안 나요.”

살짝 떨어진 은새가 부끄러운 듯 벨키오르와 시선을 맞추다가 발꿈치를 들어 올려 모양 좋은 입술에 꾹 제 입을 가져다 붙였다.

“벨키오르 님 생각으로 머리가 가득해서…….”

“움……. 아빠?”

그때 익숙한 기운을 느낀 별이가 눈을 비비며 깼다.

은새가 뜨끔하며 벨키오르를 밀어내려 했으나 강한 힘에 붙잡혔다.

아이는 꼭 껴안고 있는 두 사람을 보고 머리를 기우뚱하다가 졸음기가 묻어나는 흰 빵 같은 얼굴로 헤실거렸다.

“아빠아. 다녀와쯤니다. 히히. 누나랑 재밌게 놀구 왔어요.”

“그런가. 아직 해가 뜨려면 멀었으니 더 자라.”

“아빠랑 누나는요?”

“아빠랑 누나는…….”

은새가 어색하게 웃었다.

어린 별이만 두고 둘이서 빠져나갈 수는 없었다.

게다가 강원도 집도 아니고…….

“같이 자요, 벨키오르 님.”

결국 은새는 벨키오르를 이끌고 침대에 같이 누웠다.

별이가 두 사람 사이에 꼬물꼬물 파고들어 히히 기분 좋은 웃음 소리를 냈다.

침대는 작았지만 세 사람이 딱 달라붙으니 그럭저럭 잘 만했다.

별이의 배를 토닥여 주며 은새가 벨키오르에게 속삭였다.

“주무세요. 아침에 얘기 나눠요.”

“그래. 아침에.”

벨키오르의 손짓에 수면실을 은은하게 비추던 간접등이 꺼졌다.

***

“억! 벨키오르 님이 왜 여기 있어?”

회의 시간 직전까지 늘어지게 자고 일어난 솔이 태연하게 회의실 한 좌석을 차지한 벨키오르를 보고 꼬리 밟힌 고양이처럼 펄쩍 뛰었다.

벨키오르는 과묵한 표정으로 별이에게 손수 초콜릿을 까 주고 있었다.

별이가 나눠 주는 초콜릿을 받으며 은새가 흥겹게 대신 대답했다.

“새벽에 오셨어.”

“유은새, 네가 불렀어?”

“음……. 그건 아니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렇다고 할 수 있지.”

불편한 심경을 감춘 우리가 헛기침했다.

“흠흠. 이제부터 회의 시작할 건데…….”

“아. 벨키오르 님이 시그라엘 던전에서 있었던 일들에 관해 아는 게 있다고 하셔서 모셨어.”

“뭐?”

“벨키오르 님이?”

친구들의 시선이 벨키오르에게 모였다.

그는 평소와 같은 무표정한 얼굴로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짐작 가는 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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