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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키운 마수가 드래곤을 물고 왔다 (157)화 (157/190)

156화 - 당신에게는 빚이 있지

경북 울진의 S+급 ‘석양이 지는 콜로세움’ 던전.

SS급이 된 백찬민이 처음으로 참가하는 공략인 만큼 세간의 관심도가 높았다.

그래서 그는 압도적인 공략 성과를 거두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던전에 입장했다.

보기 드문 고등급 던전이기에 위기의 순간도 있었지만 노련한 에이스들의 기지와 백찬민 본인의 능력으로 순조롭게 공략을 이어 나갔다.

‘만족스럽군.’

주먹을 쥐었다 편 백찬민은 SS급이 된 것을 실감했다.

그의 손짓 한 번에 강력한 낙뢰가 떨어져 지상을 불바다로 만들었다.

그야말로 힘으로 마수들을 압살했다.

넘칠 듯 충만한 힘은 아무리 퍼내도 마르지 않는 우물처럼 끊임없이 차올랐다.

우물?

아니, 그가 품고 있는 건 바다였다.

전투 내내 세상을 제 발아래 둔 것 같은 황홀한 고양감을 느꼈던 백찬민은 이능 제어에 익숙해졌을 무렵 당초 목적인 천창현을 제거하기 위해 그를 불러서 팀에서 따로 떨어져 나왔다.

여기가 제 무덤이 될 줄은 모르고 천창현은 아무 말 없이 그를 따라왔다.

그리고 현재.

“크흑, 크헉……!”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피투성이가 된 백찬민이 땅바닥을 굴렀다.

그의 앞으로 천창현이 포식자처럼 여유롭게 걸어왔다.

급하진 않으나 빠져나갈 틈을 주지 않는 위압적인 걸음걸이.

“백찬민. 예상대로 움직여 줘서 고마워. 참, 뻔하다고 해야 할지. 발전이 없다고 해야 할지…….”

“너, 너 이 새끼!”

무표정하다 못해 섬뜩해 보이는 창백한 얼굴로 천창현이 머리를 쓸어 올렸다.

무저갱처럼 가라앉은 새카만 눈동자가 제가 걸레짝으로 만들어 놓은 남자를 응시하다가 일순 혐오감을 드러냈다.

“당신에게는 빚이 있지. 한결같은 쓰레기 새끼.”

천창현은 특이한 형태의 검을 바닥에 질질 끌었다.

백찬민은 저도 모르게 엉덩이걸음으로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그 애잔한 꼴을 본 천창현이 피식, 조소했다.

“그래, 사냥당하는 처지가 돼 보니 어떤가? 지금껏 당신이 놀이처럼 짓밟아 온 이들이 어떤 기분이었을지 상상이 가?”

“어떻게 A급 따위가……! 무슨 수를 쓴 거냐!”

백찬민이 모래를 뿌려 가며 그가 더 다가오지 못하게 했다.

천창현이 보인 무력은 고작 A급이라고 볼 수 없었다.

한 개인이 다 습득했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무수히 많은 스킬들과 제작자 김일문이 만든 게 분명한 아이템들.

심지어 스킬은 상성을 가리지 않았다.

천창현이 힘을 숨기고 있던 것은 예상 밖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한들 등급 격차가 있는데 자신이 지는 건 말이 안 됐다.

자신은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었다는 SS급이었으니까!

“조금 있으면 팀원들이 나를 찾아올 거다. 그러면 네놈을 어디 하나 불구로 만들어서 다시는 헌터로서 활동하지 못하게 만들어 주마!”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군.”

“으아악!”

천창현의 검이 백찬민의 허벅지를 찔렀다.

목이 쉬도록 비명을 지르는데도 달려오는 기척 하나 느껴지지 않았다.

천창현이 근방에 펼쳐 놓은 기막 때문이었다.

“후우…… 후우.”

고통을 참느라 거친 숨을 몰아쉬는 백찬민을 내려다보는 눈길이 싸늘했다.

회귀하기 전 천창현은 별 볼 일 없는 D급 헌터였다.

폐급이라 불리는 하급 헌터들은 헌터들의 세계에서 일반인보다 못한 취급을 받는다.

변변치 않은 스킬과 헌터치고는 그리 강하지 않은 육체.

천창현도 그에 벗어나지 않고 밑바닥 생을 전전했다.

폐급이라도 헌터라는 이유만으로 일반인들이 하는 일은 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힘은 힘대로 들고 돈은 못 버는, 기피 직종 중 하나인 마수 사체 처리팀에 들어갔다.

그의 헌터로서의 삶은 비참한 나날들의 연속이었다.

던전 공략을 마치고 나오는 이들을 보며 왜 자신은 저렇게 되지 못했을까 스스로를 원망했고, 제게 이것밖에 힘을 주지 않은 운명을 저주했다.

어차피 저들도 운이 좋아서 고등급 헌터로 각성했을 뿐인데 나와 뭐가 그렇게 달라서.

운.

그래, 이 세상은 본디 부조리함으로 가득 차 있었고 운이 따르는 자들은 언제나 저 높은 곳에서 밝게 빛났다.

그게 그가 깨달은 세상의 이치.

천창현은 죽어 가듯 하루하루를 그렇게 버텼다.

고등급 헌터들에게 멸시와 조롱을 당하고, 빚쟁이들에게 쫓기고, 욕설과 폭력으로 얼룩진 삶을 구질구질하게 이어 나갔다.

하지만 딱 한 번, 운명이 그에게 웃어 줬다.

설령 비웃음일지라도 그 한 번이 천창현의 인생을 뒤바꿔 놓았다.

여느 때처럼 뒤처리를 하기 위해 던전에 들어갔던 그는 어떤 사건으로 인해 고유 능력 ‘강탈’을 개화했다.

그날로 신세계가 펼쳐졌다.

천창현은 많은 헌터들의 스킬을 섭식하며 하루가 다르게 강해졌다.

물론 능력이 능력인 만큼 온건한 방식을 사용할 수는 없었다.

강탈이라니, 이 얼마나 자신에게 어울리는 고유 능력이란 말인가?

천창현은 만족했다.

비록 태생은 천했으나 그는 얼마든지 높은 위치까지 올라갈 수 있으리라고 확신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소문을 듣고 어느 날 백찬민이 찾아왔다.

백찬민은 그를 위아래로 훑으며 피식 웃었다.

‘이봐, 천창현 헌터. 난 당신의 능력을 높이 사고 있어. 꼭 한번 같이 일해 보고 싶은데. 골드스타 길드로 와. 그러면 당신이 지금껏 경험해 보지 못했던 세상을 보여 주지.’

지금도 그렇지만 백찬민의 대외적인 이미지 하나만큼은 최고였다.

대중에게 사랑받는 젠틀한 쾌남.

언제, 어느 때고 자신감 넘치는 백사자.

이런 대단한 사람이 나를 알아주는구나.

천창현은 감동했다.

백찬민의 인품과 배포에 끌려 망설임 없이 골드스타 길드에 들어간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결정을 후회했다.

스킬 처리가 된 이중 계약서에 사인을 하고 이전보다 더한 나락으로 떨어졌다.

양지에서 드러내 놓고 할 수 없는 온갖 더러운 일에 내돌려지며 소모품처럼 쓰였다.

속았다는 걸 알았을 때는 그의 ‘강탈’ 능력이 발목을 잡아 도망칠 수도 없었다.

어딜 가도 적. 그에게 원한을 가진 이들뿐이었다.

그렇게 된 데에는 천창현이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날뛴 탓도 있지만 백찬민의 수작질이 주효했다.

그렇게 백찬민의 개로 몇 년을 살았다.

그러다 문제가 생겨 골드스타 길드가 흔들렸을 때, 백찬민은 온갖 혐의를 뒤집어씌워 천창현을 처분했다.

도망친 천창현에게는 추격이 따라붙었고 이후로 그는 다시는 양지를 밟을 수 없었다.

한국을 떠나 중국으로 간 이후의 삶 역시…….

천창현이 증오가 깃든 눈을 내리떴다.

“당신에게 어떻게 복수할까 오랜 시간 고민했어. 그 잘난 능력을 빼앗아 줄까? 그러면 내가 그랬듯 버러지 같은 삶을 살겠지. 온갖 오물을 뒤집어쓰고 내일이 오지 않기를 기도하면서 밤을 지새울 거야. 고등급 헌터가 추락하면 사람들은 아귀처럼 달려들겠지. 그 꼴을 보는 것도 아주 즐겁겠어.”

“흐악, 으아악!”

백찬민의 머리채를 잡은 천창현의 손끝에 이능이 휘감겼다.

고유 능력이 발동되면서 영혼이라도 강탈당하는 섬뜩한 느낌에 백찬민이 기겁했다.

“다시는 헌터질을 못 하게 신체에 영구적인 손상을 가할까? 아예 정신을 망가뜨려 백치로 만드는 것도 괜찮겠지. 고고했던 백사자가 남들의 도움 없인 일상생활도 불가능한 처지가 돼도 좋겠어.”

“이 악마 새끼, 네가 무슨 짓을 저지르고 있는지 알기나 해!”

실핏줄이 터져 눈이 벌게진 백찬민이 발악했다.

설마 천창현이 진심으로 자기를 죽일 거라고 생각지 않는 모습이었다.

자신은 SS급이니까, 대한민국의 귀한 인재니까!

하지만.

“당신이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 구역질이 나. 그러니까 죽어.”

“으악!”

천창현이 섬광처럼 빠르게 백찬민의 가슴에 검을 내리꽂았다.

사지를 경련하며 백찬민의 숨이 끊어졌다.

천창현은 싸늘하게 식어 가는 시신을 눈에 새기듯이 응시했다.

뒤늦게 골드스타 길드의 공략팀원들이 달려와 아무것도 남지 않은 현장과 백찬민의 시신을 발견했다.

추궁하는 그들에게 천창현은 부러 슬픈 듯 연기했다.

“백찬민 길드장님의 능력이 갑자기 폭주해서 저를 죽이고 던전을 파괴하려고 하셨습니다. 제어할 수 없는 힘에 고통스러워하시더니 이대로는 팀원들을 해치게 될 거라면서 스스로……. 그분의 의지가 너무도 강력해서 저는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능력 폭주로 인한 SS급 헌터의 갑작스러운 죽음.

사상 초유의 사태에 처음에는 아무도 믿지 않았다.

하지만 처참하게 훼손된 현장과 –비록 백찬민이 천창현을 죽이려고 힘을 남발한 결과지만- A급인 천창현이 어떻게 백찬민을 죽일 수 있었겠냐는 여론이 대두되면서 사람들은 서서히 현실을 받아들였다.

추모 행렬이 이어졌다.

천창현을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A급이 어떻게 SS급을 죽일 수 있었겠냐는 딜레마에 빠져서 성급히 나서진 않았다.

영정 사진 앞에서 절을 한 천창현이 속으로 생각했다.

‘당신을 그 자리에 있게 한 모든 것들을 남김없이 내가 먹어 치워주지.’

백찬민의 죽음으로 휘청거릴 골드스타 길드도, 금성 그룹도.

이제는 자신이 전부 다 움켜쥘 것이다.

검고 탁한 천창현의 눈에 끈적한 야욕이 스몄다.

그때 장례식장에 소란스러움이 번지고, 던전 공략을 마치고 나온 듯한 도천 길드 S급들이 나타났다.

‘시그라엘의 시험’을 치렀으니 이제 저들도 이 세계에 도래할 멸망에 대한 단서를 얻게 되었을 터.

천창현의 시선이 그들 중 한 사람에게 꽂혔다.

‘유은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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