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화 - 시그라엘의 시험 종료
갑작스레 벌어진 사태에 은새와 친구들은 하나도 정신이 없었다.
시시각각으로 균열을 일으키며 무너져 내리는 하늘과, 그 너머에서 꿈틀거리는 미지의 생명체.
그것은 먼 우주로부터 기인한 혼돈 그 자체로도 보였고, 혹은 지하 저 밑바닥에서 밀어닥친 심연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텁텁하고 끈적끈적한 공기 때문에 온몸이 식은땀으로 젖었다.
생전 느껴 본 적 없는 위기감이 덮쳤다.
그에 더해.
“로먼, 이게 무슨 짓이야! 트로이 님을 왜……!”
흑마법사 중 누군가가 그들의 심경을 대신 말해 줬다.
그들의 눈앞에는 트로이의 가슴에 손을 박아 넣은 채 생긋 웃는 로먼이 있었다.
“로먼……?”
은새가 떨리는 목소리로 그를 불렀으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로먼이 망설임 없이 손을 뽑자 숨이 끊어진 트로이가 털썩 쓰러졌다.
“처음부터 예언서에서 가리킨 계도자는 나였으니까. 내 자리를 되찾은 것뿐이야.”
“로먼!”
분노에 찬 흑마법사들의 외침이 들리지도 않는지 로먼은 태연하게 피로 젖은 손을 옷자락에 닦아 낼 뿐이었다.
로먼과 트로이는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랐다.
부모의 얼굴조차 모르는 빈민가 출신의 고아.
조금 불운하다는 것을 제외하면 이 제국에선 흔하디흔한 배경이었다.
길거리만 나가도 같은 사연을 가진 자들이 쌔고 쌨으니까.
쥐뿔도 없는 아이들에게 배신과 암투가 난무하는 빈민가의 삶은 치열하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하루하루가 생존의 영역이었고, 무리 짓지 않고서는 살아남을 수 없었다.
도둑질을 해도 망을 보는 사람과 실행에 옮기는 사람이 있어야 했고, 패싸움을 하더라도 머릿수가 많은 쪽이 우세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들어가게 된 집단에서 로먼과 트로이는 처음 만났다.
나이대가 비슷했기 때문에 둘은 자주 붙어 다녔다.
그러나 친구 같은 물렁물렁한 관계는 아니었다.
어려도 눈앞의 자식이 언제고 제 목을 딸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늘 가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지나가던 한 흑마법사가 두 사람의 마법적 재능을 알아보고 같이 가지 않겠냐는 제안을 했다.
빈민가에 계속 남아 있으면 굶어서 죽든, 맞아서 죽든 했을 터라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날로 두 사람은 흑마법사의 제자가 되었다.
시간이 흘러 그들이 제법 흑마법사 태가 나기 시작했을 때.
스승이 로먼만 따로 불러서 흑마법사들에게 전해 오는 예언서에 대해 말해 줬다.
그리고 알게 된 계도자의 숙명.
알고 보니 처음부터 스승은 붉은 눈동자 때문에 로먼을 데려온 것이었다.
트로이는 로먼의 곁에 있다가 쓸 만해 보인다는 이유로 운 좋게 같이 거둬진 것이었고.
스승과 로먼의 대화를 숨어서 엿들은 트로이는 로먼이 방으로 돌아왔을 때 바로 벽으로 그를 밀치고 멱살을 잡았다.
‘로먼, 네까짓 게 흑마법사들의 운명을 책임질 계도자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
질투심과 열등감에 사로잡힌 눈동자가 불길처럼 타올랐다.
‘고작 그 눈 따위가 뭐라고, 멍청하고 우유부단한 너보다는 내가 그 역할에 더 어울려! 스승님께서는 아직 눈치채지 못하신 모양이지만 사실 너는 제정신이 아니잖아. 그 눈빛! 그게 같은 인간을 보는 눈이야? 그러니 내게 그 사명을 넘겨. 평생 내 그림자로 살라고.’
당시 로먼은 계도자라든가 종말이라든가 흑마법사의 부흥에 흥미가 없었다.
그저 스승이 자신에게 보이는 기이한 집착과 기대가 성가시다고 생각하던 차라, 트로이에게 그러라고 대답했다.
겁먹은 척, 굴복한 척하는 건 아주 쉬운 일이었다.
아주 옛날부터 로먼은 자신이 타인과 다르다는 걸 인식하고 있었기에 괴리감을 줄이고자 줄곧 연기를 해 왔으므로.
트로이는 로먼을 끌어들여 스승을 사고로 위장해 죽였다.
그로 인해 한동안 트로이는 죄책감에 시달렸으나 로먼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여느 때처럼 헤실거리며 돌아다니는 그를 트로이가 질린 눈으로 바라봤다.
이후로 트로이는 ‘계도자가 되어야 한다’는 강박증에 시달리는 것처럼 사고하고, 행동했다.
죽은 스승에게 한쪽 눈이 붉은색인 제자가 있다는 소문이 퍼져 있었기 때문에 위험한 시술을 통해 홍채를 물들였다.
반면 로먼은 마법으로 외양을 바꾸게 시켰고.
로먼은 계속 트로이의 곁에 머물면서 그가 무엇을 하는지 지켜보았다.
그를 거슬려하면서도 트로이가 로먼을 죽이지 않은 건 그가 진짜 계도자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혹시 그가 죽으면 일이 틀어질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누구보다 로먼이 죽길 원해 그를 위험 속에 방치하곤 했으나 제 손으로 직접 그를 죽일 생각은 하지 못했다.
하지만 하늘이 점지한 사명이라는 건, 운명이라는 건 쉽게 바꿀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트로이가 주도해 강림 의식을 거행했어도 하늘을 가르고 곧 이곳으로 넘어오려는 존재가 의지를 전달해 온 건 자신이었다.
그의 머릿속으로 이형의 언어가 끊임없이 흘러들었다.
“로먼, 너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이대로라면 모든 게…… 컥!”
로먼이 손을 휘두르자 채찍처럼 쏘아져 나간 마법이 흑마법사의 목숨을 앗아 갔다.
“너, 너 뭐 하는…… 아악!”
“로먼!”
로먼은 잔인한 손속으로 모든 흑마법사들을 도륙했다.
그들의 피가 스며든 마법진은 더욱더 환하게 빛을 내뿜었다.
“…….”
충격적인 광경에 은새와 친구들은 움직일 수 없었다.
온통 이해가 안 가는 일투성이라 상황을 따라가는 것만으로 벅찼다.
후우.
더 이상 비명 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었을 때 한숨처럼 긴 숨을 내쉰 로먼이 친구들을 돌아보며 산뜻하게 인사했다.
“고맙습니다, 여러분. 여러분 덕분에 이 세계는 예정된 수순을 밟게 되겠네요.”
훼손된 예언서 탓에 이를 오역한 흑마법사들은 강림 의식을 통해 멸망의 징조인 게이트와 에스퍼들을 없애고 자신들의 위상을 높이려 했으나 실상은 정반대였다.
종말.
로먼은 이 세계의 끝을 고하고 있었다.
“로, 로먼. 잠깐만요!”
“이봐, 멈춰!”
친구들이 다급하게 만류해 보려 나섰지만 그들의 손은 로먼에게 닿지 않았다.
띠링!
띠링!
띠링!
[강림 의식에 성공했습니다! ‘□@#□ ¿□’이 현신합니다.]
[이계의 ¿격 ‘텐□라’의 강림으로 이 세계는 종말을 맞이할 것입니다.]
[시그라엘의 시험이 종료되었습니다. 공략을 성공적으로 끝마치셨습니다. 여행자분들이 원래 세계로 귀환합니다.]
[예언서(SSS)를 습득합니다.]
정신없이 시스템 창이 올라갔다.
이곳에 왔을 때처럼 환한 빛에 휩싸여 강제로 퇴장당하는 마지막 순간, 기억나는 건 아슬란의 눈빛이었다.
“헉!”
던전을 빠져나온 후 그들은 전력 질주를 한 것처럼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긴 꿈을 꾼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것도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을 만큼 끔찍한 악몽을.
“우리가…… 무슨 짓을 한 거야? 세상을 멸망시켰다고?”
“이거 뭔데. 흑마법사들은 종말을 막으려던 것 아니었어?”
“마지막에 로먼은 왜 그런 거야? 왜 흑마법사들을 다…….”
“로먼이 진짜 계도자였던 모양이야. 그 눈 봤지? 어떻게 그렇게 감쪽같이 숨겼지. 트로이도 로먼이 계도자인 걸 알고 있었을까?”
환영인 걸 알아도 그들이 떠난 뒤에 세상이 어떻게 됐을지 예상이 되어 친구들은 침묵했다.
던전 공략을 마치고도 뒷맛이 쓴 건 처음이었다.
“예언서……. 던전 공략 보상으로 예언서를 습득했다고 했지.”
우리가 서둘러서 아이템을 꺼내 들었다.
이름에서부터 눈치챘지만 훼손되지 않은, 온전한 형태의 석판이 그의 손에 들려 있었다.
여전히 이계의 문자로 쓰여 있었으나 어째서인지 자연스럽게 읽혔다.
[전에 없던 혼란이 도래하고 질서를 어지럽히는 이들이 나타나면 이는 멸망의 전조라고 할 수 있으니 세계의 균형이 어그러지고 아득한 미지로부터 침식이 뻗어 오고 있다는 증명이다.
붉은 눈의 계도자가 너희를 현혹해 그 문을 열어젖히니 텐둘라의 사자가 지상에 내려와 모든 것을 파괴할 것이다.
만일 다른 세계의 이방인이 찾아온다면 이 땅의 종말이 머지않았으니 오로지 그들을 죽이는 것만이 모든 혼란을 종식시키는 길일 것이다.]
친구들은 뒤늦게 깨달았다.
결국 이 던전의 공략 조건은 세계 멸망이었다.
순간순간 들었던 의문이 이제야 해결되었다.
자율도를 최대로 보장한다는 게 의미가 있나?
힌트랍시고 정확한 지령을 내린 순간 그들이 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었는데.
강림 의식 없이도, 세계를 멸망시키지 않더라도 공략을 끝낼 방법은 없었나?
아슬란은…… 그 세계 사람들은.
차라리 공략을 도중에 포기했더라면.
“……일단 밖으로 나가자. 나가서 생각하자.”
“그래. 여기 있는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고.”
“…….”
어두운 안색으로 포털을 빠져나오는 그들을 보고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던 도천 길드원들이 달려왔다.
“길드장님! 공략은 무사히 마치셨습니까? 다치신 곳은요?”
“우리는 괜찮아. 배진혁 헌터, 며칠이나 지났지?”
“5일 지났습니다. 스토리형 던전이라서 그런지 평소보다 오래 걸리셨네요.”
고작 5일?
체감상 한 한 달쯤 갇혀 있던 것 같은데.
우리는 피로함을 감추지 않고 배진혁에게 물었다.
공략을 마치고 나온 헌터들이 지쳐 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이해하는 배진혁은 신경 쓰지 않았다.
“길드에 특이 사항 있어?”
“그게…….”
말끝을 흐리는 그의 모습에 친구들은 불안감을 느꼈다.
안 그래도 머릿속이 복잡해 죽겠는데.
“뭔데? 무슨 일인데.”
“빨리 말해, 숨넘어가기 일보 직전이니까.”
배진혁은 이걸 어떻게 전달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길드장님과 S급분들이 안 계신 동안, 골드스타 길드의 백찬민 길드장이 사망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