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화 – 게이트 탈취
띠링!
[▶스토리 진행도 65%…….]
은새는 시스템 창에 떠오른 스토리 진행도를 확인했다.
강림석을 획득하고 나니 지지부진하던 진행도가 눈에 띄게 확 오른 게 보였다.
시선을 돌리자 친구들이 옹기종기 모여 머리를 맞대고 심각하게 대화 중이었다.
“허, 로먼이 그랬다고? 충격적인데.”
“그러게. 추리 스릴러 영화에서 아무 존재감 없던 옆집 청년이 사이코패스 범인으로 밝혀진 기분이야.”
“그 어벙한 로먼이……. 흑마법사는 흑마법사라는 건가?”
아무리 환영이라고 해도 손속에 자비 없이 사람을 죽였으니 친구들은 혼란스러웠다.
죽은 그 신관에게 무슨 잘못이 있었나?
그저 타이밍을 놓쳐 그 자리에 있었을 뿐이었다.
민간인 대피를 최우선으로 하는 그들에게는 이해가 안 가는 행동이었다.
세계관에 따른 문화 차이라고 애써 합리화를 해 봐도 로먼에게서 한번 느낀 위화감은 지워지지 않았다.
미리내가 한숨을 쉬었다.
“로먼은 계속 주시하는 걸로 하자. 이렇게 고민한다고 답이 나오는 것도 아니니.”
이제는 퀘스트마저 찝찝하게 느껴졌다.
계속 이대로 진행해도 될까?
하지만 이정표대로 따라가지 않으면 공략에 실패할 텐데.
문득 시스템 설명 중에 ‘자율도를 최대로 보장한다’는 말이 눈에 띄었다.
‘이게 뭐가 자율도를 보장하는 거야. 결국 멱살 잡혀 끌려가고 있는데.’
이제는 이 던전 자체에 의문이 들었다.
무엇을 목적으로 하는 거지?
‘……아니야, 내가 과민한 거겠지.’
머리를 흔들어 생각을 털어 낸 미리내가 입가에 부스러기를 묻히며 간식을 먹고 있는 별이를 쳐다봤다.
“그나저나 별아, 예언서를 찾았다고?”
“네!”
은새가 기름기가 묻은 아이의 손을 티슈로 닦아 줬다.
별이가 꼬물꼬물 손가락을 움직이다가 반짝 고개를 들어 자신에게 집중한 어른들을 바라봤다.
“그런데 책이 아니었어요. 종이가 아니라 납작한 돌에 글씨가 써져 있었는데, 보실래요?”
“어? 가져왔어?”
“아니요. 베껴 왔어요!”
히히 웃은 별이가 개나리색 마력을 피워 올렸다.
바람에 나부끼듯 이리저리 춤추며 마력이 형태를 이루었다.
그리고 허공에 떠오른 문양에 가까운 글자.
“뭐라고 쓰여 있는 거야?”
“모르겠어. 보통 이 세계 언어는 자동 번역되던데…….”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한국어로 번역된 문장이 그들의 눈앞에 떠올랐다.
[……전에 없던 혼란이 도래하고 질서를 어지럽히는 이들…… 멸망의 전조라고 할 수 있으니…… 균형…… 침식이 뻗어 오고……
붉은 눈의 계도자가…… 그 문을 열어젖히니…… □□□의 사자가 지상에 내려와…… 파괴…… 것이다.
만일 다른 세계의 이방인이 방문한다면…… 머지않았으니 오로지…… 것만이…… 혼란을 종식시키는 길일 것이다.]
온전하지 않은 문장이 이어졌다.
심하면 드문드문 단어만 남아 무슨 맥락인지 전혀 알아볼 수 없었다.
“중간중간 끊긴 건 뭐지? 해석이 매끄럽지 않잖아. 번역 오류인가?”
“아니, 이 석판 자체가 훼손된 거야. 그렇지, 별이야?”
“네!”
문자의 나열을 뚫어지게 쳐다보던 솔이 미간을 찌푸렸다.
“뭐야, 예언서니 뭐니 하더니 순 허무맹랑한 말들뿐이잖아?”
“예언이라는 게 원래 그렇지. 여기 빈 네모 칸이 있어. 이건 훼손된 게 아니라 시스템이 일부러 가린 모양인데.”
“그런데 여기 ‘다른 세계의 이방인’이라는 거, 우리를 뜻하는 것 같지 않아?”
“우리? 우리가 여기 올 거라는 걸 먼 과거에서부터 누군가 알고 있었다고?”
“…….”
방 안에 일순 정적이 흘렀다.
은새와 친구들이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에이, 말도 안 돼.”
“자의식 과잉 예방하고 건강한 삶 되찾자!”
아자, 아자!
친구들이 우스꽝스러운 구호를 외치며 분위기를 환기했다.
웃음을 삼킨 은새가 다시 예언서의 내용을 살폈다.
‘붉은 눈의 계도자라.’
그 부분을 보자마자 바로 떠오르는 인물이 있었다.
흑마법사들의 수장, 트로이.
그는 보기 드물게 한쪽 눈이 붉은색인 오드 아이였다.
흑마법사들이 예언서의 내용을 안다면 어떤 이유로 그를 따르고 있는지 짐작이 갔다.
“아~ 모르겠다. 됐고, 이제 남은 건 강림 의식뿐이지? 빨리 끝내고 밖에 나가고 싶다. 라면 먹고 싶어. 피자, 치킨, 햄버거……. 역시 주기적으로 인스턴트 음식을 먹어 줘야 오래 살아.”
“동감. 아, 퇴근시켜 줘라. 악덕 길드장아.”
“자, 자. 조금만 더 하면 끝날 것 같으니까 힘내자.”
자연스럽게 그들의 관심이 다른 화제로 옮겨 가며 개나리색 마력이 공기 중으로 흩어져 사라졌다.
***
밤늦은 시간, 흑마법사들의 간부 회의가 열렸다.
그리고 그 자리에 의외의 인물이 참석했다.
바로 친구들을 대표해서 온 한우리였다.
흑마법사들은 에스퍼가 그들의 영역에 침범한 것에 대해 강한 불쾌감을 표했으나 우리는 당당했다.
‘어쩌라고. 트로이가 불렀는데.’
우리는 어깨를 으쓱하고 아무것도 안 보이고, 못 느끼는 것처럼 그들을 무시했다.
그에 흑마법사들이 더욱 눈가를 파르르 떤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다 모였군.”
뒤늦게 트로이가 로먼과 함께 등장했다.
‘저놈은 한 번도 일찍 오는 법이 없네.’
우리는 팔짱을 끼고 눈썹을 까딱했다.
예언의 내용을 알아냈어도 새삼 그가 달리 보이지는 않았다.
계도자인지 뭔지, 도무지 맘에 안 드는 작자였다.
“다들 휴식은 충분히 취했나? 강림석을 손에 넣었으니 이제 마지막 단계만 남았다.”
어느새 그에게 집중한 흑마법사들이 숨길 수 없는 기대감과 흥분감을 드러냈다.
“바로 게이트 탈취.”
‘게이트 탈취?’
우리가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3일 후 작전에 착수하겠다. 탈취할 게이트의 위치와 전력 배치는 나중에 설명하도록 하지. 탈취에 성공한다면 그 즉시 의식을 거행할 것이다.”
강림석을 손에 넣었으니 더는 머뭇거릴 이유가 없었다.
그토록 고대하던 순간이 머지않았다.
흑마법사들을 둘러본 트로이의 시선이 우리에게 길게 머물렀다.
‘더러운 에스퍼들, 주제도 모르고 여태 뭉개고 있으니 철저히 제물로써 이용해 주지.’
“기억해라, 우리의 사명을. 기회는 다시 오지 않으니 전력으로 임해야 할 것이다.”
음험한 속내와 달리 트로이에게서는 경건한 다짐이 흘러나왔다.
방으로 돌아온 우리는 회의 내용을 친구들에게 전달했다.
“뜬금없이 게이트를 탈취한다고? 무슨 수로?”
“몰라. 다 비밀이야. 신중한 건지, 아무도 믿지 않는 건지.”
“후자일걸. 같은 흑마법사조차 우리랑 엮어 치워 버리려고 했던 자인데.”
방패를 꺼내 닦고 있던 인찬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런데 우리, 정작 게이트 근처에는 가 본 적도 없지 않아?”
“……그러게?”
그들이 알고 있는 게이트는 지구의 ‘던전’과 비슷하지만 입장이 불가능해 공략이 필요하지 않고, 브레이크처럼 마수를 쏟아 내는 미지의 현상이었다.
게이트 주변에는 늘 군대가 상주해 있어서 쫓기는 신세인 은새와 친구들은 그 근처에 가 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
“이럴 때는 그냥 로먼에게 물어보자.”
“그래, 그게 빠르겠다.”
은새와 친구들이 우르르 로먼에게 몰려갔다.
“게이트가 뭐냐고요……?”
짐을 가득 끌어안은 그가 둥근 안경 너머로 눈을 끔뻑끔뻑했다.
그걸 왜 모르냐는 눈빛에 우리가 손을 휘저었다.
“아니, 뭔지는 알죠. 그런데 단편적인 정보만 알고 있어서요. 실제로 본 적이 없어서.”
“아! 그러시군요. 설명을 해 드리자면 게이트는 활성 게이트와 폐쇄 게이트로 나뉘어요. 활성 게이트는 일정 주기로 계속 마수를 쏟아 내고, 시간이 지나 소강상태에 접어들면서 폐쇄 게이트가 돼요.”
“사라지지는 않고요?”
“네……. 게이트는 모종의 이유로 발생한 균열이라는 게 학자들의 공통된 의견이에요. 한번 생긴 균열은 메워지지 않고요.”
금이 간 유리잔이 다시 멀쩡해지지 않는 것처럼.
그 말을 하는 로먼은 잠시 가라앉은 눈빛을 했다.
“그런가요. 그럼 탈취하는 게이트는 활성 게이트인가요?”
“네. 그럴 가능성이 커요.”
거사를 앞두고도 로먼은 긴장감 없이 헤실헤실 웃었다.
“지난번처럼 여러분이 또 도와주실 거라고 믿어요. 이제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디데이 하루 전.
평소와 비슷한 시각에 잠자리에 들었던 은새와 친구들은 저택이 거세게 뒤흔들리는 느낌에 눈을 떴다.
“뭐야?! 무슨 일이야?”
“황태자와 에스퍼 군단이 쳐들어왔다!”
“습격?”
문밖에서 요란스럽게 경보가 울렸다.
여태 발각되지 않았던 흑마법사들의 근거지를 어떻게 알고 아슬란과 에스퍼 군단이 기습한 것이었다.
사태를 파악한 친구들도 무기를 챙겨 들고 튀어 나갔다.
은새는 놀란 별이를 우선적으로 챙겼다.
“쥐새끼들이 여기 숨어 있었군.”
무너지기 직전의 저택을 빠져나오자 에스퍼들이 주위를 에워싸고 있었다.
신전에서 놓친 그들을 추격하는 데 사력을 다한 아슬란은 흑마법사 사이에 있는 은새와 친구들을 발견하고 섬뜩한 눈빛을 했다.
저들이 무슨 생각으로 흑마법사들에게 동조하고 있는지는 이제 궁금하지 않았다.
그저 제국에 위협이 될 자들을 반드시 죽여야 한다는 생각밖에는.
“이제 도망갈 곳은 없다!”
흑마법사들이 우왕좌왕했다.
“트로이 님, 어떻게 할까요?! 거사가 내일인데……!”
트로이로서도 이런 상황은 예기치 못했다.
속에서 부글부글 분노가 치솟았다.
드디어 내일인데, 내일이면 이 세계를 손아귀에 넣을 수 있는데!
“기어코 황태자 네놈이 우리를 방해하려 드는구나!”
트로이의 핏빛 눈동자에 살기가 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