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화 – 대신관들의 무덤
“오늘 밤 신전을 습격할 거라고요?”
로먼의 얘기를 들은 은새와 친구들이 황당하다는 얼굴을 했다.
오늘따라 왠지 침울해 보이는 로먼이 고개를 끄떡끄떡했다.
“네……. 그곳에 여러분들도 함께 갈 거예요.”
“아니 뭐 이렇게 급하게 알려 줘? 적어도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은 줘야지.”
“죄송해요. 어젯밤에 급하게 결정된 사안이라…….”
솔의 투덜거림에 로먼이 눈썹을 늘어뜨리며 사과를 했다.
죄 없는 사람을 괴롭히는 모양새라 친구들이 솔을 말렸다.
“신전을 습격하는 이유가 뭔가요?”
“저희가 찾는 물건이 거기에 있어요. 대신전의 지하 깊숙한 곳에.”
“무슨 물건인지 물어도 돼요?”
로먼이 망설이다가 듣는 귀가 없는 걸 확인하고 그들에게 속삭였다.
“강림석이라는 성유물이에요.”
친구들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그거다. 혼돈의 파편.
스토리 진행 중에 뜬금없이 다른 물건이 등장할 리 없으니 맞을 것이다.
역시 시스템창이 알려 준 것과 이름이 달라서 찾을 수 없었던 듯했다.
“하지만 위험하지 않나요? 신전 자체의 경비 인력도 있을 테고, 지하면 여러모로 탈출하기도 어려울 텐데.”
“트로이가 작전을 다 세워 놨대요. 트로이는 똑똑해서 언제나 최고의 결과를 이끌어 내거든요.”
은새와 친구들을 보는 로먼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리다가 슬쩍 시선이 빗겨 갔다.
“아마, 위험하지 않을 거예요.”
그들이 속으로 탄식했다.
아이고, 퍽이나 위험하지 않겠다.
“밤 9시에 출발할 거니까 그럼 준비하고 계세요.”
“시간이 별로 없네요. 알려 줘서 고마워요, 로먼.”
이야기를 마친 후 로먼은 또 누군가 떠넘긴 일을 하러 연구실을 나갔다.
유하가 바구니에 담긴 사과를 집어 소매로 슥 닦아 베어 물었다.
“뭔가 숨기는 거 같지? 저렇게 티를 내서야.”
“예상 가능한 시나리오는 트로이라는 남자가 흉계를 꾸미고 있고 높은 확률로 눈엣가시인 우리를 치우려는 거겠지.”
“뻔하네. 뻔한데 당할 수밖에 없다니.”
별이의 머리를 빗어 주던 은새가 고개를 기울였다.
“흑마법사들한테 성유물이 왜 필요할까?”
“강림 의식인지 뭔지 때문 아니야? 대체 뭘 불러내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은새가 작게 축소되어 있는 시스템창을 불러왔다.
[미션! 이 세계에 ‘□□□ □□’의 강림을 성공시키세요.]
여전히 불친절한 빈 네모 칸이었다.
“얼핏 듣기로 흑마법사들한테 예언서라는 게 있는 모양이던데. 그거 우리가 볼 수 없나?”
“로먼을 잘 꼬시면 보여 줄 것도 같은데.”
“별이야, 저자들이 네게 예언서에 대해 말해 준 거 없어?”
“움……. 아니요. 몰래 찾아볼까요?”
우리의 질문에 별이가 큰 눈을 끔뻑거리며 대답했다.
“그럼 부탁해도 될까? 꼭 필요한 건 아니니까 어려우면 안 찾아도 돼.”
“네!”
큰 기대 없이 한 말에도 별이는 의욕을 보였다.
친구들 사이를 가로질러 간 솔이 소파 위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신전 터는 게 뭐 어려운 일이겠어? 지금까지 별로 어려운 거 없었잖아.”
“앞으로도 그럴 거라는 보장은 없지.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니까.”
“아~ 야간 근무 확정이니까 낮잠이나 자야겠다.”
담요를 뒤집어쓰는 그녀를 보고 친구들이 흩어져서 각자 할 일을 했다.
밤이 되어 은새와 친구들은 흑마법사들이 모인 장소로 갔다.
그들이 나타나자 대화가 뚝 끊기고 싸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적대감을 숨기지 않는 눈빛.
개중에는 조롱이 담긴 시선을 보내는 이들도 있었다.
“눈 좀 곱게 뜨지? 저러다 가자미 되겠네.”
눈살을 찌푸린 솔이 쯧쯧거리며 말하자 저희끼리 수군거렸다.
트로이가 들어오고, 그의 뒤를 따라서 로먼이 모습을 드러냈다.
로먼은 주변 눈치를 보다가 슬쩍 은새와 친구들 쪽에 섰다.
“그럼 작전을 설명하겠다. 우선 네 개 조로 나눈다.”
트로이는 인원을 신전의 방어벽을 뚫을 척후조, 작전을 수행할 침투조, 적의 병사들을 견제할 교란조, 퇴로를 확보할 결착조로 나누었다.
“……다음은 침투조다. 입구가 두 개인 것으로 확인돼 두 개 조로 편성했다. 1조. 로먼, 키에라, 그리고 에스퍼 셋.”
“네?! 트로이 님, 지금 저더러 더러운 에스퍼들과 함께 가라고요? 진심이세요?”
“뭐야, 우리 맨날 씻는데 왜 더럽대?”
키에라라고 불린 여자가 펄쩍 뛰었으나 트로이는 이를 무시했다.
유하가 그런 의미로 한 말이 아니란 걸 알면서 볼멘소리를 했다.
“2조는 나와 하트먼, 딘, 오브리다. 남은 에스퍼들은 교란조로 들어간다. 전력을 어떻게 나눌지는 에스퍼들, 너희가 알아서 결정해라.”
한쪽 눈만 붉은색인 트로이의 시선이 별이에게 닿았다.
“그리고 사자께서는 이곳에 남으시지요.”
“싫어요!”
당연히 같이 갈 거라고 생각했던 별이가 반발했다.
“와, 작정했나 본데? 별이까지 떼어 놓으려는 거 보면.”
“조가 나뉘면 우리끼리 연락할 수단이 필요할 것 같은데.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별이가 은새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누나, 나두 데리구 가요. 나 두고 가지 말아요!”
“별이야, 잠깐 귀 좀.”
은새가 무릎을 굽히고 앉아 별이에게만 들리도록 속삭였다.
“누나는 괜찮아. 흑마법사들이 자리를 비운 동안 그 예언서라는 것 좀 찾아봐 줄래?”
“누나…….”
은새로서도 별이와 떨어지는 게 내키지 않았지만 그들이 가야 할 곳은 신전이었다.
마수가 아닌 인간들을 상대로 아이에게 좋은 꼴을 보여 줄 것 같지 않았다.
별이가 입을 삐쭉거리며 울먹였다.
“응? 무사히 별이 곁으로 돌아올게.”
“……약속하는 거예요? 약속은 꼭 지켜야 하는 거라구 했어요.”
“그럼. 다녀오면 별이가 좋아하는 맛있는 거 먹자.”
“네…….”
어렵사리 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불안감이 남는지 은새의 다리에 바짝 달라붙어 뺨을 비비적댔다.
그사이 선별 과정을 마친 트로이가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신전 구조가 그려진 도면을 배부하겠다.”
팔락팔락 종이가 넘어가고 은새와 친구들에게도 도면이 전달되었다.
“지하 4층? 역대 대신관들의 무덤이라.”
강림석은 신전 지하 깊숙한 곳에 보관되어 있었다.
들어가는 것도 나오는 것도 까다로울 게 예상돼 친구들은 꼼꼼히 구조물을 살폈다.
이따금 긴급 구출 작전이나 테러 진압 등의 임무도 수행한 적 있어서 능숙했다.
“이동하지.”
흑마법사들이 공간이동 마법진 위에 올라섰다.
“별이 잘 기다리고 있어야 해?”
“누나! 다치면 안 돼요. 누나가 다치면 아빠가 많이 속상할 거예요.”
벨키오르를 언급하는 말에 은새가 멈칫했다가 해사한 미소를 그려 보였다.
“물론이지. 졸리면 자고 있어.”
저택에 남기로 한 흑마법사가 별이를 데려가고 은새는 안 떨어지는 걸음을 돌려 친구들에게로 갔다.
마법진이 가동되고 주변의 공기가 달라진 걸 감지했을 때 그들은 수도에 있었다.
은은한 불을 밝힌 신전이 가까이 보였다.
“작전 시간은 20분. 20분 안에 무조건 성공적으로 마무리 지어야 한다.”
경비병들이 침입 사실을 알아채고 몰려오기까지의 시간.
트로이의 마지막 당부를 들은 척후조가 가장 먼저 움직였다.
은밀하게 신전으로 접근한 그들은 경비병들의 수와 위치를 마도구를 통해 전달하고 마법 공격에 대비해 설치된 마력 방해 방어벽에 틈을 내 강제로 열어젖혔다.
“침투조, 들어간다!”
트로이의 외침에 침투 1조가 된 은새와 유하, 미리내가 땅을 박차고 달려 나갔다.
“얘들아, 다녀올게!”
“그래, 몸조심하고 이따 보자.”
교란조로 나중에 들어가게 될 솔과 인찬, 우리가 친구들을 배웅했다.
그들은 헤어지기 전, 통신 기능이 있는 집게 핀 모양의 아이템을 각자 옷깃에 꽂았다.
“당신들, 왜 이렇게 굼뜬 거야!”
에스퍼들과 같은 조에 속하게 되어 심통이 난 키에라가 신경질을 부렸다.
그녀는 상종도 하기 싫다는 듯 쌩하니 먼저 가 버렸고 눈치를 보던 로먼과 일행이 뒤따랐다.
늦은 밤이었기에 돌아다니는 사람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침투조는 기척을 죽이고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을 찾아 빠르게 이동했다.
아무런 장애물 없이 통과한 지하 1층과 다르게 2층부터는 온갖 함정들이 즐비했다.
“어이쿠!”
전방에서 쏘아진 화살들을 유하가 잽싸게 피하며 몇 개는 활대로 쳐냈다.
“거기 누구냐!”
“죽어라!”
콰지지직!
인기척을 듣고 달려온 경비병이 키에라의 손끝에서 뻗어나간 검은 불길에 휩싸였다.
“으악!”
‘별이를 안 데려오기를 잘했지.’
처참한 상태의 시체를 지나치며 은새가 생각했다.
로먼을 보고 깨졌던 흑마법사에 대한 편견이 다시금 재정립되었다.
또다시 발동된 함정을 파훼한 그들은 막다른 길 앞에서 멈추어 섰다.
“잠시만요, 지금 입구를 찾을게요!”
로먼이 탐지 마법을 펼쳐 숨겨진 문을 열고 먼저 깜깜한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은신처에서 어리바리하게 굴던 것과 달리 야무진 모습이었다.
지하 3층은 감옥이었다.
“으스스하네.”
최소한으로 켜 놓은 어스름한 불빛과 악취가 스민 텁텁한 공기.
누군가 공간에 들어왔다는 걸 눈치챈 죄인들이 달그락 사슬 끌리는 소리를 내며 아우성을 쳤다.
“이봐, 우리를 좀 꺼내 줘!”
“가지 마!”
“칵, 퉤! 천한 것들이 감히 누구한테!”
키에라가 매섭게 일갈했다.
지금 느끼는 모든 불만을 그들에게 쏟아붓는 듯했다.
이리저리 얽힌 길을 헤쳐 감옥 가장 안쪽에 도달한 그들은 벽을 더듬었다.
“어디 보자, 이쯤에 개폐 장치가 있을 텐데…….”
여기까지 오는 데 걸린 시간은 5분 남짓. 남은 시간은 15분이었다.
경비병들이 몰려와 입구를 막기 전에 강림석을 찾아서 나가야 했다.
“아, 됐어요!”
쿠구구궁.
지하 4층. 대신관들의 무덤이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