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분의 사자시여!
“흐아악!”
허공에서 뚝 떨어진 로먼이 풀밭을 굴렀다.
은새와 친구들은 자세의 흔들림 없이 지상에 착지했다.
“근처에 인기척은?”
“없어. 별이가 장소를 잘 골랐네.”
“히히.”
칭찬하는 말에 별이가 기분 좋은 웃음을 흘렸다.
“여, 여기가 어디…….”
로먼은 얼떨떨한 상태였다.
집회 장소에 황태자가 이끄는 에스퍼 소대원들이 쳐들어와 까딱하면 그대로 황궁 감옥으로 끌려갈 뻔했는데, 웬 외국인 에스퍼 일당이 자신을 데리고 도주했다.
더군다나 황태자와 비등하게 싸울 정도로 강한 이들이었다.
‘……나를 왜?’
에스퍼와 흑마법사의 갈등 관계를 생각하면 도무지 이해가 안 가는 상황이었다.
황태자와 척지면서까지 자신을 살릴 이유가 있나?
추격이 따라붙지 않은 걸 몇 차례나 확인한 뒤에야 우리가 그에게 질문했다.
“정신없으실 텐데 한 가지만 여쭙겠습니다. 성함이 로먼이 맞으십니까?”
“네?! 네, 네. 제가 로먼이 맞습니다. 그런데 누구…… 십니까? 제 이름을 어떻게…….”
“혹시 혼돈의 파편에 대해 아는 게 있으신가요?”
“혼돈의 파편이요……?”
깨진 안경 너머로 로먼이 눈을 끔뻑거렸다.
어째 영 못 알아듣는 기색이라 은새와 친구들이 모여서 쑥덕댔다.
“야, 우리가 찾는 사람이 저 사람 맞아? 어째 좀, 어벙해 보이는데?”
“사람 앞에서 그런 말은 실례야.”
“설마 잘못 짚었다거나…….”
친구들이 다시금 로먼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헝클어진 검은 머리카락과 소처럼 순박한 갈색 눈.
콧잔등에는 주근깨가 콕콕 박혀 있었고 깨진 안경은 흘러내려 거의 코끝에 걸쳐 있었다.
그나마 머릿결이 좋아 보인다는 게 유일한 특징인 어디서나 볼 법한 흔한 인상.
길거리에서 마주쳐도 너무 평범해서 기억에 남지 않을 것 같았다.
게다가 위기 감지 능력이 어떻게 된 것인지 로먼은 낯선 사람이나 현재 닥친 상황을 영 의심할 줄도 몰랐다.
“어째 좀 우리가 생각했던 거랑 다른데.”
이상해진 분위기를 미리내가 수습했다.
어찌 되었든 조건을 충족하는 사람인 이상 상황을 잘 이끌어 가봐야 했다.
“음. 일단 저희 소개를 하자면 제국에 소속되지 않은 에스퍼예요.”
“미등록 에스퍼요?! 그거 엄청난 중죄…… 인데.”
미등록 에스퍼라는 말에 펄쩍 뛰었던 로먼이 슬금슬금 그들의 눈치를 봤다.
흑마법사인 그가 그런 말을 하는 것도 우스울 따름이었다.
“사정이 있어서 제국에 왔습니다만 저희가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로먼 님의 협조가 필요합니다.”
“님이요? 저, 저는 그렇게 불릴 만한 사람이 아닌데요……. 그냥 로먼으로 불러 주세요.”
“네, 로먼.”
“그런데 제 협조가 필요하시다고요?”
“네. 혹시 저희가 로먼과 동행해도 괜찮을까요?”
“어……. 그건 좀.”
로먼이 꺼리는 기색을 보였다.
아무리 자신을 구해 줬다고 해도 오늘 처음 만난 이들이었다.
은혜를 입었다는 이유만으로 신용도 뭣도 없이 은신처로 덜컥 데리고 갈 수는 없었다.
저들이 에스퍼라는 점이 가장 걸렸다.
“보신 것처럼 저희는 황태자와 반목하고 있습니다. 제국의 에스퍼들과는 사이가 좋지 않을 수밖에 없죠. 그들은 저희가 신원이 불분명하다는 이유만으로 황궁에 가두고 감시를 했거든요.”
“화장실까지 따라 들어오려고 했다니까?”
솔이 고자질하듯 투덜거렸다.
“그러니 저희가 로먼에게 해를 끼칠 일은 없을 거예요. 필요하다면 로먼의 일을 돕겠습니다. 저희는 황태자와도 비등하게 겨룰 정도로 강하니 분명 전력이 될 겁니다.”
“제가 결정할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어?”
계속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이던 로먼이 돌연 은새의 품에 안긴 별이를 보고 화들짝 놀란 얼굴을 했다.
“아, 아니 이분은!”
그가 후다닥 달려와 별이를 꼼꼼하게 살폈다.
“이, 이런 순도 높은 광활한 마력이라니! 부디 손 한 번만 잡아 주세요!”
“누, 누나. 이 사람 무서워요.”
놀란 별이가 은새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은새는 아이의 등을 토닥이며 날 선 시선으로 로먼을 쳐다봤다.
하지만 로먼은 별이에게만 온통 정신이 팔려 있었다.
“깊게 내재되어 있는 마력이 소용돌이치는 게 느껴집니다. 아아, 이분을 마주한 것만으로 전율이 일어요! 이 고양감, 경외감! 틀림없습니다. 예언서에 나오는 그분이시군요!”
‘예언서?’
흥분한 로먼이 주절거리는 말을 듣고 있던 친구들의 시선이 마주쳤다.
뭔가 착각하고 있는 듯한데 흐름이 나쁘지 않아 일단 두고 보기로 했다.
“이럴 때가 아닙니다. 당장 저와 함께 가시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분의 사자시여!”
“음. 별이가 로먼이 말하는 그 사자가 아닐 수도 있는데. 그래도 될까요?”
“네! 동료들도 분명 저분을 한눈에 알아보고 동료로 받아들일 겁니다!”
로먼이 말하는 ‘그분’이 누군지, 그게 별이를 지칭하는 게 맞는지는 모르겠으나 좋은 기회였다.
로먼을 따라가 흑마법사들의 은신처 위치만 파악해도 크나큰 소득이었다.
쫓겨난다고 해도 감시할 수 있을 테니까.
“그런데 여기가 어디죠?”
위풍당당하게 앞서 걸어가던 로먼이 뒤를 돌아봤다.
“모르겠는데요. 저희가 제국 지리는 잘 몰라서.”
별이를 쳐다봤으나 아이도 고개를 내저을 뿐이었다.
그저 황태자를 피해 가능한 한 먼 곳으로 온 것이니까.
“…….”
우선 돌아가는 게 먼저일 듯했다.
***
로먼은 은새와 친구들을 데리고 꽤 먼 거리를 이동해 흑마법사의 근거지로 갔다.
산속 깊은 곳에 지어진 고적한 저택.
하지만 침입자를 배제하는 방범용 마법과 은신을 위한 환영 마법이 걸려 있어서 평범한 방법으로는 발견하기 어려울 듯했다.
로먼이 장담한 것과 다르게 역시 은새와 친구들을 본 흑마법사들의 반응은 냉담하다 못해 살벌했다.
“하! 그래서 이자들을 여기까지 데리고 왔다고? 제정신인가?”
“하, 하지만 트로이……. 이분들은 우리를 구해 주셨고, 강한 분들이니까 우리의 계획에 동참시킬 수 있을지도 몰라.”
“우리? 습격에서 너만 살아남았잖아! 황궁으로 잡혀간 동료들이 몇이나 되는지 알기나 해?”
트로이의 눈동자가 활활 타올랐다.
“게다가 우리의 원대한 계획에 에스퍼를 끌어들이겠다고? 망치려고 작정했어?”
자신만만하게 그들을 이곳까지 안내한 로먼은 막상 동료들 앞에 서자 기를 펴지 못했다.
특히 트로이라는 자가 심하게 윽박질렀다.
“저 남자, 저택에서 로먼을 버리고 간 사람 맞지?”
“맞아. 그런데 미안하다고 하기는커녕 아예 없었던 일로 치부할 모양인데. 로먼도 개의치 않는 것 같고.”
그들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었다.
일행을 노려보는 트로이의 눈빛이 형형했다.
“돌연변이 주제에 겁도 없이 이곳에 발을 들였으니 살아 돌아갈 생각은 하지 마라.”
이곳은 흑마법사의 근거지.
집회 장소로 사용했던 저택보다도 더 위험천만한 마법진으로 도배되어 있었다.
이러다 전쟁이라도 치를 것 같은 분위기에 로먼이 다급하게 별이를 손으로 가리켰다.
“잠깐! 이분을 봐. 느껴지는 게 없어? 그분의 사자가 분명해!”
“어린아이가 뭐 어쨌다고…….”
트로이와 흑마법사들의 시선이 별이를 향했다.
오는 내내 로먼의 시도 때도 없는 찬양에 적응한 별이가 ‘엣헴.’ 하고 작은 가슴을 활짝 편 채 당당하게 그들을 마주했다.
“……마법사? 왜 에스퍼들 사이에 저만한 마력을 지닌 마법사가 섞여 있는 거지?”
“헉. 이 충만한 기운은!”
“설마, 정말 예언서에 나온 그분의 사자라고?”
흑마법사들이 크게 동요했다.
아무래도 드래곤인 별이가 흑마법사들에게 어필하는 뭔가가 있는 모양이었다.
여전히 착각하는 게 분명했지만 은새와 친구들은 정정해 주지 않았다.
“트로이 님, 분명히 느껴집니다! 가늠할 수 없는 광대한 마력……. 그분께서 우리의 부름에 응답해 사자를 내려 주신 거예요!”
“예언서대로야!”
한쪽 눈만 붉은색인 트로이가 별이를 보고 고심하는 듯하더니 은새와 친구들을 살벌하게 노려보았다.
“아이를 빼앗고 에스퍼들은 모두 죽여라!”
“뭐? 안 돼!”
흑마법사들이 공격하려는 낌새를 보이자 별이가 빽 소리를 질렀다.
“누나랑 누나 친구들 다치게 하면 가만있지 않을 거야!”
“그분의 사자시여, 이쪽으로 오십시오. 그자들은 이 세상에 해악만 끼치는 존재입니다!”
“시러! 오지 마!”
별이가 아기 드래곤일 때처럼 아르릉거리며 마력을 방출했다.
개나리색 마력이 휘몰아치고 저택에 새겨져 있던 마법진이 일시에 반응했다.
쿠르릉!
저택이 곧 무너질 것처럼 거세게 뒤흔들렸다.
“어, 어떡합니까? 이대로는 그분의 사자를 맞이할 수 없을 듯합니다.”
“크흑.”
별이의 마력 폭풍 앞에서 무릎 꿇은 트로이가 이를 사리물었다.
순수한 마력만으로 자신들을 압도하다니, 인간이 가능한 경지가 아니었다.
과연 그분의 사자가 맞는 듯했다.
하지만 왜 에스퍼들을 비호하는 거지?
저들보다 자신들을 선택해야 함이 옳았다.
“……어쩔 수 없군. 저자들을 우리의 일원으로 받아들인다. 단, 신용할 수 없으니 허튼짓 못 하도록 위치 추적과 몇 가지 마법을 걸겠다.”
그들의 계획에 사자의 존재가 꼭 필요했으므로 트로이는 일단 물러나는 척했다.
나중에 틈을 봐서 에스퍼들을 제거하면 되겠지.
트로이의 눈빛을 보니 다른 꿍꿍이가 있는 듯했으나 어쨌든 흑마법사 소굴에 입성하는 데 성공했다.
은새와 친구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띠링!
[▶스토리 진행도 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