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 우리가 붙잡힐 줄 알고?
은새와 친구들은 ‘흑마법사 로먼’에 대해 조사하기에 앞서 마법사라는 이들에 대해 알아봤다.
왜 하필 흑마법사일까?
그냥 마법사와는 뭐가 다른 걸까?
사전적 정의로 보자면 마법사는 자연의 마나를 이해하고 세계의 창조와 유지, 변화를 이룩하는 이들을 일컫는 총칭이었다.
그들은 자연에서 힘을 빌려오기 때문에 어디에 근원을 두냐에 따라서 사용하는 마법의 속성이 달라졌다.
주류는 4원소, 즉 물, 불, 공기, 흙이었고 마법사들은 이를 으뜸으로 쳤다.
그리고 범위를 조금 확장하여 전기, 얼음, 금속, 식물, 빛, 어둠 등의 속성을 다루는 이들이 존재했으며 그중 흑마법사는 어둠을 근원으로 마법을 부리는 자들이었다.
창작물에서 흔히 등장하는 흑마법사는 사악하고 나쁜 존재이다.
이 세계에서도 흑마법사를 대하는 세간의 인식이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파괴, 저주, 정신 지배, 소멸, 침식, 부패 등 온갖 부정적인 느낌이 드는 마법은 다 흑마법이었다.
그러니 일반 사람들이 그들을 본능적으로 꺼릴 수밖에.
하지만 학문적인 관점에서 보면 흑마법사는 근원을 어둠에서 빌려올 뿐, 다른 마법사들과 본질적으로 큰 차이가 없었다.
흑마법사가 본격적으로 배척을 받기 시작한 건 2백 년 전, 한 흑마법사 집단이 마(魔)에 근원을 둔 마법을 세상에 내보이면서부터였다.
악마, 또는 우주 밖 이형의 존재로부터 힘을 얻은 그들은 세상을 멸망으로 몰아갔다.
뛰어난 이들의 활약으로 그들의 폭주를 멈출 수 있었으나 당시 흑마법사들이 섬긴 존재에 대해서는 지금도 의견이 분분했다.
그 불길하고 사악한 힘으로 봤을 때 신과 대척되는 존재라고 짐작할 뿐이었다.
그 후로 흑마법사 박해가 줄곧 이어졌고 최근 50년 사이에 인식 개선이 이루어져 그나마 그들이 고개를 들고 다닐 수 있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흑마법사는 비주류였다.
그런 그들이 각광받기 시작한 건 역설적이게도 게이트와 에스퍼가 등장하면서부터였다.
에스퍼에 대항해 구세력이라 불리는 마법사, 기사들이 똘똘 뭉치면서 흑마법사 역시 가담하게 되었다.
사회적 갈등이 심화되면서 파괴력이 강한 마법을 주로 쓰는 흑마법사는 세력 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에스퍼들은 다른 이들보다 잔혹한 손속을 보이는 흑마법사를 특히 경계했다.
은새와 친구들은 하필 그런 이를 찾아야 하는 것이었다.
황태자가 이 사실을 알면 백 프로 의심을 살 터였다.
“메인 시나리오라. 일리가 있어. 몇 시에 어디로 가는지는 못 들었고?”
“그것까진 모르고. 멀리서 황태자의 뒤를 밟으면 되지 않을까?”
“그가 S급이면 미행이 까다로울 텐데. 그보단 황궁을 어떻게 빠져나가지?”
“은신 아이템이라면 몇 개 챙겨 왔어.”
미리내가 아공간에서 아이템을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이걸로는 불안한데.”
친구들의 말을 듣고 은새가 곰곰이 생각에 빠졌다.
“별이가 하는 건 어떨까?”
“별이가?”
“응. 아무리 뛰어난 에스퍼라고 해도 드래곤의 마법을 간파할 수는 없을 거 아니야. 별이야, 할 수 있겠어?”
은새와 시선을 맞춘 별이 이게 뭔 일인가 하고 눈을 끔뻑이다가 주먹을 꼭 말아 쥐었다.
내가 누나를 도울 수 있어!
“네! 나한테 맡겨요, 누나!”
***
황태자 아슬란은 밤늦도록 집무실에서 서류를 보고 있었다.
아무리 체력이 좋은 최상급 에스퍼라고 해도 수 일째 이어진 과중한 업무는 피로감을 몰고 왔다.
주름진 미간을 지그시 누르는 그의 앞으로 레밍턴 백작이 다가왔다.
“그자들은 뭘 하고 있지?”
“각자 방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고 합니다.”
맥락 없이 던져진 질문에도 레밍턴 백작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황태자가 요새 신경 쓰는 이들이라면 단연 황궁에서 감시 중인 신원 불명의 외국인 에스퍼들뿐이었다.
며칠 전 제국에 갑자기 나타나 영문 모를 짓을 하고 다니는 아이를 포함한 일행.
“수상한 낌새는 없었나?”
“오전에는 신전이나 도서관 등에 방문해 조사하고 오후에는 훈련 시설을 이용하는 생활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훈련 중에는 전력을 내보이지 않는데도 전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상당한 실력이더군요.”
레밍턴 백작이 안경을 밀어 올렸다.
“주로 관심 갖는 분야를 봤을 때 그들이 찾는 물건과 사람이라는 게 성유물과 구세력, 그중에서도 마법사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성유물과 마법사라…….”
“지나친 통제 문제로 항의를 했습니다만 무력 충돌은 없었습니다. 제국의 문화를 낯설어하는 모습을 자주 보여 확실히 적국이 투입한 병력은 아닐 거라고 사료됩니다.”
만약 적국이 제국을 혼란시킬 목적으로 보냈다면 눈에 띄지 않게 어느 정도 교육을 했을 것이다.
은근슬쩍 근방 국가에 대해 몇 가지 질문을 던졌으나 그들은 영 모른다는 기색을 보였다.
마치 전혀 다른 세계에서 온 것처럼.
그게 전부 연기라고 보기는 힘들었다.
“그러니 더욱 의심스러울 수밖에. 아이의 정체는 알아봤나?”
아슬란이 별이를 언급했다.
뜬금없이 최상급 에스퍼들 사이에 끼어 있는 어린아이.
간식을 좋아하고 낮잠은 꼬박꼬박 자는 등, 하는 행동으로 봤을 때 보통의 어린아이처럼 보였으나 그의 예민한 감이 뭔가가 있다고 끊임없이 알려왔다.
“계속 주시했습니다만 발현 시기도 이르고 에스퍼의 파장은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평범한 아이가 아니란 건 확실합니다.”
“근거는?”
“황궁 마법진이 잠깐이나마 아이에게 반응했습니다.”
“마법진이……?”
아무리 구세력과 신세력이 갈등 관계에 놓여 있다고 해도 모든 마법사와 기사들의 자리를 에스퍼로 대체한 것은 아니었다.
이해관계로 인해 황실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는 이들도 있었고 오히려 에스퍼를 견제하기 위해 그들은 자리를 굳건히 지켰다.
황궁에 깔린 마법진은 유사시에 방어벽 역할을 했으나 위협이 될 만한 인물을 감별하는 기능도 있었다.
황궁에 들어온 첫날, 별이가 광활한 마법진의 존재를 눈치채고 호기심에 살짝 건드렸다가 반응하게 된 것이었다.
은새가 얼른 못 하게 말렸으나 이미 발동된 마법진을 황궁 관리자들이 감지하지 못했을 리 없었다.
아슬란이 책상을 두드렸다.
아이는 보호자로 보이는 여자에게 낮잠 잘 때도 안겨서 잘 정도로 애착을 보였으니 아이의 비밀을 밝히기 위해서는 여자 쪽을 파 보는 게 나을 듯했다.
어쩌면 에스퍼들보다 그 아이가 위험한 변수가 될 수 있었다.
“특이사항이 있으면 바로 보고해.”
“예.”
똑똑.
“오빠, 나 왔어~”
아슬란의 허락도 없이 7황녀 페넬로페가 피로에 전 모습으로 집무실로 들어왔다.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그녀는 비척비척 걸어가 소파에 드러누웠다.
“이 짓도 못 해 먹겠다. 그냥 나 결혼하고 출궁하면 안 돼?”
“이제 임무를 끝마치고 돌아온 건가?”
“어. 그런데 바로 또 나가야 한다며. 흑마법사 집회? 걔네는 왜 눈에 띄는 짓을 해서 나를 힘들게 하지? 들키지나 말든가. 아~ 골 때린다.”
축축 늘어지는 말투로 페넬로페가 하소연했다.
황제의 자식 중 에스퍼는 아슬란과 그녀, 둘뿐이었으므로 에스퍼 군단을 이끄는 것 역시 두 사람이 도맡아서 했다.
페넬로페는 보조 계열이었으나 활용도가 높아서 자주 전투에 투입되었다.
아슬란이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났다.
“오늘 작전이 외부에 새어 나가지는 않았겠지.”
“예. 철저히 입단속 했습니다.”
“에스퍼 1소대를 모아라. 바로 검거하러 간다.”
“하아, 차라리 내가 일반인이었으면 이 고생은 안 했을 텐데.”
페넬로페는 가기 싫어 죽겠다는 티를 내며 그들의 뒤를 따라나섰다.
아슬란과 페넬로페, 레밍턴 백작을 포함한 에스퍼 1소대는 밤거리를 달렸다.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까지 쉬지 않고 이동하던 아슬란이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왜 그러십니까?”
“아니. 신월이군.”
제국에는 신월에 밤의 기운이 강해져 홀리는 이들이 나타난다는 속설이 있었다.
주로 불길함을 상징했기에 아슬란은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저곳입니다.”
겉으로 보기에 평범한 저택이었으나 이중, 삼중으로 마법이 둘러싸고 있는 게 느껴졌다.
“체이스 경, 내부에 인원이 몇이나 되지?”
“열 명 정도입니다.”
투시와 탐색 능력을 지닌 에스퍼의 눈동자가 이능으로 물들었다.
“생각보다 적군.”
첩보대로라면 오늘 서른 명 이상의 흑마법사가 모일 예정이었다.
하지만 정작 온 건 3분의 1에 지나지 않았다.
“기다려 볼까요?”
“아니, 더 지체하면 저들마저 놓칠 수 있다. 붙잡아서 신문하는 수밖에.”
아슬란의 지시에 따라 에스퍼들이 제 위치로 흩어졌다.
공간 이동 마법으로 도주할 것을 대비해 마력 방해 마도구를 설치하고 퇴로를 전부 차단했다.
“진입한다.”
마도구가 발동되는 것과 동시에 에스퍼들이 저택에 침투했다.
쨍그랑!
창문이 깨지는 소리가 들리고 흑마법사들이 갑작스러운 습격에 동요했다.
“뭐, 뭐야!”
“에스퍼들이다! 황태자가 직접 왔어!”
“젠장, 정보가 샜나!”
“다들 대피해!”
흑마법사들이 마법을 써 공격하려 했으나 마력 방해 마도구로 인해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다.
하지만 마력 방해 마도구는 어디까지나 현재 발현되는 마법에만 작용했으므로 이미 수식이 새겨져 있는 마도구에는 소용이 없었다.
몇몇 흑마법사들이 공간 이동 마법 마도구를 사용해 포위망을 빠져나가고 에스퍼 1소대의 일원들이 즉시 추격했다.
에스퍼들은 남은 흑마법사를 효율적으로 한곳에 몰아넣었다.
특히 황태자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눈에 보이지 않는 몸놀림으로 그는 이능과 체술을 적절히 활용해 흑마법사들을 제압했다.
집기가 다 부서진 공간에서 흑마법사들과 에스퍼들이 대치했다.
“네가 집회를 연 트로이라는 자군.”
흑마법사들의 면면을 살핀 아슬란이 싸늘하게 말했다.
첩보 내용은 금일 집회에서 흑마법사들이 중대한 결정을 내릴 것이라고 했다.
분명 제국에, 그리고 에스퍼들에게 해악을 끼칠 속셈이겠지.
한쪽 눈만 붉은색인 남자가 아슬란을 사납게 노려보다가 비죽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이대로 우리가 붙잡힐 줄 알고? 황태자, 우리를 만만하게 본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