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화 – 메인 시나리오
조사관이 빠릿빠릿하게 대답했다.
“예! 현재 신원을 조사 중이고 마법사와의 분쟁에 휘말린 것으로 추정…….”
“그만.”
황태자가 단칼에 그의 말을 잘랐다.
은새와 친구들은 긴장한 채로 아슬란을 바라봤다.
‘느껴지는 기운을 봤을 때 최상급 에스퍼가 확실해.’
‘황태자는 능력이 뭘까?’
그들이 황태자의 실력을 눈치챈 것처럼 아슬란 또한 일행이 예사 인물들이 아니란 것을 알아차렸다.
그냥 미등록 에스퍼도 위험한데 보기 힘든 최상급 에스퍼가 여럿 침투해 있었다?
적국이 보낸 병기로 의심할 만했다.
“제국에 온 목적을 말해라.”
황태자에게서 날카롭고 거센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은새와 친구들은 눈살을 찌푸렸을 뿐 그 자리에 버티고 서 있었으나 주변의 다른 이들은 아니었다.
“으, 으윽.”
“저, 전하…….”
최상급 에스퍼의 정제되지 않은 힘은 그들의 숨통을 조이고 속을 진탕으로 만들었다.
“배려가 없네! 힘을 가졌으면 그에 대한 책임도 따르는 거 몰라? 당신이 지켜야 할 사람들을 괴롭히는 게 제정신으로 할 짓이야?”
“솔아, 참아.”
솔이 튀어 나가지 못하도록 인찬이 붙들었다.
여기는 신분제 사회.
그들이 사는 지구와 달랐다.
실감하지는 못해도 황태자의 말 한 마디에 저들의 목숨이 붙었다 떨어졌다 할 수도 있었다.
기어코 거품을 물고 눈을 까뒤집는 이들을 본 우리가 어쩔 수 없이 나섰다.
“저는 일행의 리더, 한우리라고 합니다. 사정을 설명할 테니 힘을 거둬 주시지요.”
자신이 압박하는데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그의 모습에 아슬란이 미간을 좁혔다.
기운이 거둬지자 숨통이 트인 듯 사람들이 살았다는 표정을 했다.
아예 정신을 잃은 이들은 무장한 병사들이 들어와 데리고 나갔다.
“저희는 게이트의 마수를 처리하려다가 매복해 있던 마법사의 함정에 빠져 이곳으로 왔습니다. 그래서 이곳이 어떤 곳인지 조사하던 중에 시비가 붙어 붙잡혀 오게 된 것입니다.”
“레밍턴 백작.”
“거짓입니다.”
그러나 조사관과 다르게 황태자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옆에 서 있던 남자의 눈동자가 이능으로 물든 걸 본 친구들이 기함했다.
여기서 정신계 에스퍼의 능력을 쓰는 건 반칙이지!
“저들의 사지를 구속해서 지하 감옥에 가둬라.”
“잠깐만요! 정말로 저희가 의도해서 이곳에 온 건 아닙니다. 눈 떠 보니 여기였어요. 돌아가기 위해서는 어떤 물건과 사람을 찾아야 해서, 목적만 달성하면 제국에 어떤 해도 끼치지 않고 떠나겠습니다.”
“……진실입니다.”
레밍턴 백작이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이곳에 오게 된 방법은 거짓이지만 자의로 온 게 아니라니까 이상하겠지.
기왕 입을 털기 시작한 거, 우리는 권력자가 좋아할 만한 인간상을 연기하기로 했다.
태극기 앞에서 하듯 가슴에 손을 올리고 나라에 충성하는 군인처럼 얘기했다.
“저희는 나라와 국민을 지키기 위해 노시혁 대통령 각하께서 다스리는 땅으로 반드시 돌아가야만 합니다. 부재가 길어지면 국민들이 불안해할 테니까요.”
뒤에서 친구들이 속닥거렸다.
대통령 이름은 왜 말하는 거야?
나도 몰라. 그게 먹힐 것 같나 보지.
“애매하지만, 진실에 가깝습니다.”
레밍턴 백작의 보증에 황태자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참과 거짓을 가리는 능력은 활용도가 높지만 허점이 있었다.
일부만 진실이거나, 말하는 이가 진실이라고 믿으면 혼선이 생겨났다.
생각 같아서는 저들의 머릿속을 주물러 숨기고 있는 걸 낱낱이 파헤치고 싶었으나 느껴지는 경지로 봤을 때 불가능할 터였다.
강한 에스퍼일수록 정신 방벽도 굳건하기 마련이었으므로.
“에스퍼는 내국인, 외국인 할 것 없이 모두 황궁 에스퍼 총괄부에 등록되고 엄중한 감시를 받는다. 하물며 국적이 모호한 너희들은 1급 위험 분자로 규정.”
“한국에서 왔다고 몇 번이나 말해요? 일부러 못 들은 척하는 건가?”
“전하께서 말씀하시는데 끼어들지 마라!”
레밍턴 백작이 호통을 치자 솔이 불만스럽게 입을 삐쭉였다.
어휴, 신분이 깡패지.
“즉시 추방이 원칙이나 사정을 감안하여 체류를 허가한다. 단, 황궁에서 머물게 하며 엄중한 감시를 명한다.”
“네? 황궁에서 지내라고요?”
친구들이 깜짝 놀랐다.
이렇게까지 한다고?
“기한을 오래 줄 수는 없다. 목적만 달성하면 즉시 떠나라. 그 과정에서 절대 제국에 해를 끼쳐서는 안 될 것이다. 만약 그런다면 즉결 사살하겠다.”
아슬란은 고요한 눈길로 눈앞의 이들을 바라봤다.
이들은 돌아가기 위해서 찾을 물건과 사람이 있다고 했다.
이건 레밍턴 백작이 증언한 진실.
아무런 제약 없이 최상급 에스퍼들이 거리를 활보하게 둘 수는 없으니 감시를 붙이는 건 당연하고, 효율적인 감시를 하려면 아예 시야에 두는 편이 나았다.
만약 저들이 딴생각을 하고 있다면 반드시 티가 날 테니 병력이 집결되어 있는 황궁에서 바로 진압할 수 있었다.
은새와 친구들이 모여서 속닥거렸다.
“얘들아, 어떡하지? 지금이라도 튀어?”
“아직 알아낸 것도 없는데 도망자 신세가 될 수는 없어. 저 사람 말하는 거 보니까 허튼짓하다 걸리면 끝까지 쫓아올 것 같은데.”
“어차피 우리 나가면 숙소 구해야 하지 않아? 황궁이면 5성급 호텔보다도 좋을 것 같은데.”
“바보야, 대놓고 감시하겠다는 뜻이잖아. 움직이기 불편하게. 우리가 관광 왔어?”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들이 내놓을 답은 정해져 있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지낼 곳을 안내받는 그들의 앞에 시스템창이 떠올랐다.
띠링!
[▶스토리 진행도 10%…….]
***
던전에 들어온 지 여러 날이 흘렀다.
그 말은 황궁에서 지낸 지 며칠이 흘렀다는 소리였다.
“별이, 아.”
“아앙.”
온갖 비싸고 화려한 것들로 채워진 방.
은새가 체리가 올라간 캐러멜 무스를 한 입 떠서 별이의 입에 쏙 넣어 주었다.
아이가 상기된 뺨을 감싸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엄청 맛있어요! 누나두 얼른 머거 바요.”
“그래? 어제 간식이랑 오늘 간식 중에 뭐가 더 맛있어?”
“움……. 고르기 힘든데.”
별이가 작은 머리를 부여잡고 끙끙거리는 게 귀여워서 은새가 눈가를 찡긋했다.
캐러멜 무스를 한 입 더 떠서 먹여 주자 입 안에서 사르르 녹는 간식에 별이가 눈을 반짝였다.
“오늘 간식!”
“그래?”
어제도 같은 질문을 했는데 별이는 ‘오늘 간식’이 가장 맛있다고 했었다.
별이의 가장 맛있는 간식은 매일매일 갱신되고 있었다.
쾅!
그때 문이 벌컥 열리고 솔이가 쿵쿵거리며 들어와 은새와 별이가 앉아 있는 소파 맞은편에 엎어졌다.
두 사람이 놀란 눈을 했다.
솔이 이를 박박 갈았다.
“여긴 완전히 미쳤어. 아주 귀에 딱지 앉겠어. 함부로 돌아다니지 마라, 구역 이탈하지 마라, 사용인들에게 말 걸지 마라, 허가되지 않은 물건을 반입하면 안 된다……. 왜, 아주 숨도 쉬지 말라고 그러지?”
으아악!
쿠션에 대고 솔이 비명을 질렀다.
은새가 이해한다는 듯,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손님방이라고 해도 범상치 않은 으리으리한 방에 배정받아 기뻤던 것도 잠시, 과연 이 선택이 잘한 것인지 의문이 들 만큼 생활이 팍팍해졌다.
감시자들은 은새와 친구들이 방 밖을 나서는 순간부터 하나하나 참견했고, 궁을 나가려고 하면 절차가 어찌나 복잡한지 차라리 포기하고 싶을 지경이었다.
감시자들을 따돌리려고 해도 워낙 수가 많아서 한둘은 반드시 따라붙었다.
사고라도 치고 이러면 억울하지나 않지, 이건 뭐 잠재적 테러리스트 취급이었다.
흑마법사와 혼돈의 파편에 대해 조사해야 하는 그들로서는 상당한 걸림돌이 되었다.
“솔이도 와 있었네.”
“오, 그게 오늘 별이 간식이야?”
“흐아아암.”
뒤이어 친구들이 속속 도착했다.
유하가 간식에 관심을 갖자 혹여 뺏길까 봐 별이가 캐러멜 무스가 담긴 접시를 제 쪽으로 끌어왔다.
그에 유하는 더 짓궂게 반응했고 은새가 말렸다.
친구들이 적당히 둘러앉았다.
“듣는 귀는?”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
우리가 스킬을 사용해서 방 안에 있을지 모를 도청 장치와 은신 능력자를 탐색했다.
“없어.”
“그럼 회의 시작하자. 그동안 알아낸 거 있어?”
가장 먼저 인찬이 입을 열었다.
그는 요새 황궁 내에 있는 훈련 시설에서 거의 살다시피 했다.
“황족 중에 에스퍼는 황태자를 포함해 셋뿐이래. 그중 한 명이 황제고, 황태자가 역대 가장 강력한 에스퍼로 불린대. 남은 하나는 7황녀. 보조 계열인 모양이야.”
“황태자의 능력은 뭐래?”
“아마 염력인 것 같아. 부가적인 능력도 있는 것 같고.”
“까다롭겠네.”
다음은 미리내였다.
“나는 성전에 관심 있는 척 신전에 계속 다니고 있는데 ‘혼돈의 파편’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 없더라고.”
“수상하게 보이게 말한 건 아니지?”
“당연히 잘 돌려서 말했지. 유물이 모인 장소도 구경했는데 눈에 띄는 건 없었어.”
“흠. 시스템이 없는 걸 찾으라고 하지는 않았을 테니 숨겨 뒀거나 이름이 다르게 알려졌거나 하지 않을까?”
“추가로 조사해 볼게.”
그때까지 잠자코 듣고만 있던 유하가 폭탄 발언을 했다.
“황태자가 내일 밤에 어딘가를 습격할 계획 같던데. 듣기로는 흑마법사 세력과 관련이 있다나 봐.”
“뭐? 유하 너 그걸 어떻게 알아냈어?”
유하의 의미심장한 미소에 친구들이 불안해했다.
하지만 유하는 어떤 루트로 정보를 습득했는지 말하지 않았다.
“……괜히 꼬투리 잡힐 짓 하지 마라.”
“그랬으면 지금 저들이 이렇게 조용할까?”
“그건 그렇지.”
유하가 씩 웃었다.
“왠지 그거, ‘메인 시나리오’의 느낌이 나지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