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 안내해 주세요, 황궁으로
책은 제국의 건국 신화부터 다루고 있었다.
요정왕의 피를 이은 테드먼드 왕국의 8왕자는 신의 계시를 받아 분열된 나라를 통합하고 세인나이츠 제국을 세웠다.
그에게는 건국을 도운 네 명의 조력자가 있었는데 대마법사이자 현자인 키네시스, 검의 정점이라 불리는 소드 마스터이며 모든 기사들의 우상인 오울, 역대 가장 신의 사랑을 받았다고 일컬어지는 대신관 요아힘, 다섯 정령왕과 계약한 정령사 베로니카가 그들이었다.
이후 그들을 시조로 하는 가문이 세워지고 제국의 근간을 이루는 수많은 귀족 가문이 생겨났다.
그로부터 500년.
수많은 역경이 있었으나 세인나이츠 제국은 대륙 최강국으로 우뚝 섰다.
‘완전 판타지 세계네.’
그런데 다음 장으로 넘어간 은새는 익숙한 단어를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격변의 시대?’
은새는 빠르게 내용을 읽어 내렸다.
[……하지만 제국력 ○○○년, 평화롭던 대륙 곳곳에 균열이 일어났다. 균열에서는 마수들이 끊임없이 쏟아졌으며 사람들은 갑작스러운 재앙에 미처 피할 새도 없이 휩쓸리고 말았다.
마법사들이 총력을 기울여 균열을 없애려 했으나 그것은 사라지지 않고 피해 규모는 점점 커져만 갔다.
…(중략)… 격변의 시대가 도래하고, 세인나이츠 황실은 이를 게이트(Gate)라고 명명하고 위험성을 널리 알렸다.]
‘게이트라고?’
판타지 소설 읽듯이 역사서를 흥미롭게 읽고 있던 은새가 심각해졌다.
이 책에 쓰인 내용이 사실이라면, 지구와 비슷한 상황이었다.
갑작스럽게 터진 던전. 격변의 시대.
자세히 읽어 보니 이곳의 게이트는 마수를 일방적으로 쏟아 낼 뿐, 던전처럼 ‘공략’을 해야 하는 구조는 아닌 것 같았다.
그러나 마수가 나온다는 점에 있어서는 같았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게이트가 처음 생겨나고 몇 달 후, 기이한 힘을 사용하는 이능력자들이 등장했다.]
‘이건 헌터잖아?’
[이능력자들의 힘은 마법사들의 마력이나 정령사들의 마나와는 궤가 달랐다. 그들은 별도의 주문 없이 땅을 뒤흔들고 바람을 일으켰으며 하늘에서 벼락을 내리게 했다. 또한 신체를 강화하거나 변이해 마수들과 맞섰다.
……새로운 능력자들의 등장이었다. 민중은 이들을 ‘에스퍼(Esper)’라고 불렀다.]
‘에스퍼.’
처음에 이곳으로 왔을 땐 정말 딴 세상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알면 알수록 지구와 비슷한 점이 있었다.
‘이게 과연 우연일까?’
책상을 두드리는 손끝이 빨라졌다.
친구들과 약속한 시간이 거의 다 되었을 때 은새는 책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옆에서 그림책을 읽다가 엎어져서 잠이 든 별이를 안아 올렸다.
“움…… 뉴나? 이제 가여?”
“응. 별이 졸리면 자고 있어. 누나가 안고 갈게.”
“네에.”
다시 잠이 드는 듯했던 별이는 도서관 밖으로 나오자 눈이 똘망똘망해졌다.
아이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그러고 보니 이 세계 시간으로 곧 점심시간이었다.
“별이 배고파?”
“네에. 누나, 우리 맛있는 거 먹으러 가요! 이제 저두 돈 주고 사 먹을 수 있어요.”
별이가 주먹을 꼭 쥐고 두근두근한 얼굴을 했다.
직접 돈을 내고 음식을 사는 것에 대한 기대감이 엿보여 은새가 소리 없이 웃었다.
‘돌아가면 별이한테 용돈을 좀 줘 볼까?’
이렇게 기뻐할 줄 알았으면 진작 그럴 걸 그랬다.
물론 별이에게 필요한 물품은 은새가 다 사 주지만 별이도 갖고 싶은 게 생길 수 있으니.
그 전에 금전 교육부터 시켜야겠지만.
별이는 똑똑하니까 금방 배울 것이다.
“별아, 배 많이 고프면 식사하기 전에 우리 저거 사 먹을까?”
“와아, 애플파이다!”
별이가 좋아서 몸을 들썩들썩했다.
“한번 별이가 직접 사 볼래?”
“네! 저 할 쑤 있어요.”
은새는 아공간에서 주머니를 꺼내 아까 로브를 사고 잔돈으로 받은 은화 하나를 별이의 손에 쥐여 주었다.
노점 앞으로 가자 별이가 긴장한 듯 은새의 옷을 잡아당기는 게 느껴졌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애플파이 드릴까요?”
“별아, 말해야지.”
“네, 네……. 저! 이거 누나 거랑 제 거 두 개 주세요. 두우 개요.”
상기된 얼굴로 손가락까지 펴서 야무지게 대답한 별이가 한발 더 나아가 고급 스킬을 선보였다.
바로.
“얼마예요?”
가격을 묻는 것이었다.
주인이 껄껄 웃었다.
“40센트란다. 아이가 무척 귀엽네요!”
“감사합니다.”
주인은 별이에게서 은화를 받고 잔돈을 거슬러 주었다.
“와아……. 누나, 내가 해냈어요!”
“그래, 아주 잘했어. 우리 별이.”
은새는 아이를 듬뿍 칭찬해 주었다.
별이는 자신이 직접 산 애플파이를 맛있게 먹었다.
멀리 시계탑 아래에 친구들이 이미 도착해 있는 게 보였다.
“얘들아!”
“은새야, 뭐 좀 알아냈어?”
“응. 도서관에 다녀왔거든. 너희는?”
“나는 신전에 다녀왔어. 유하랑 인찬이는 시장에 다녀왔대.”
“우리는 어디 갔었어?”
“나는 황궁. 들어가지는 못하고 주위 살펴본 정도? 거리가 좀 있더라.”
솔이 빼고 다 모인 이들이 조사한 것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여기에 게이트랑 에스퍼라는 게 있대. 꼭 지구의 던전이랑 헌터 같지 않아?”
“나도 들었어. 에스퍼가 등장한 지는 이제 20년 정도 됐고 그들이 게이트에서 쏟아져 나온 마수들을 거의 전담하면서 기존 세력인 마법사, 기사들과 크게 대립하고 있나 봐.”
“왜?”
“아무래도 자신들의 위치를 빼앗겼으니까. 게다가 마법사나 기사는 오랜 수련을 거쳐야 하는데 에스퍼들은 능력을 개화하면 바로 투입될 수 있으니 억울했겠지.”
“아, 그런 이유로…….”
이해가 가는 이유였다.
신흥 세력이 나타나면 기존 세력이 반발하는 건 어딜 가나 흔히 일어나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지구에는 이능력자가 없었지만 이 세계에는 대체 가능한 직군이 있었다.
이런 식의 사회 갈등이 일어나기도 하는구나.
“그리고 황태자는 에스퍼래.”
“그게 그렇게 연결되네?”
고개를 끄덕인 유하가 시장에서 물가를 조사한 결과를 말해 줬다.
“알아보니까 여기 기준으로 100골드가 꽤 큰돈이더라? 평민, 아 이렇게 말하니까 좀 웃긴데 평민의 세 달 치 생활비쯤 되나 봐.”
“와, 우리 돈 모두 합치면 부자 되는 거 아니야? 시스템 후하다.”
대화를 대강 마무리하고 식사로 뭘 먹을지 의논하고 있는데 약속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도 솔이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런데 솔이 얘는 왜 이렇게 안 와?”
“오다가 딴 길로 샌 거 아니야?”
그때였다.
“얘들아, 큰일 났어! 솔이가 시비에 걸린 것 같아!”
“뭐?!”
잠시 화장실에 다녀온다고 사라졌던 인찬이 사색이 되어 허겁지겁 달려왔다.
친구들이 심각해졌다.
“상대방은 무사하고?”
“어? 어, 어. 아직 무사한 것 같아.”
“그럼 됐어. 솔이 있는 데가 어디야?”
“저기, 저쪽!”
은새와 친구들이 인찬을 따라갔다.
소란이 컸는지 이미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잠시만요, 지나갈게요. 네, 감사합니다.”
동방예의지국의 예절을 유감없이 발휘하며 친구들이 안으로 파고들었다.
그때 고성이 들려왔다.
“너 무슨 수작을 부린 거야, 빨리 바른대로 말해!”
“그쪽 실력이 허접한 걸 왜 남 탓하시나?”
후드를 쓴 인영이 귀를 후비며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하도 뻔하길래 나는 일부러 져 주려고 하는 줄 알았지. 설마 진심을 다한 거였어?”
“너 이 새끼!”
우락부락한 덩치의 남자가 화를 주체 못 해 씩씩거렸다.
상황을 지켜보던 미리내가 친절하게 옆 사람에게 질문했다.
“저 사람들 왜 저러는 거예요?”
“아, 저기 모자 쓴 쪽이 길거리 내기에서 돈을 다 땄나 봐요. 그런데 말이 안 된다면서 저 남자가 항의해서…….”
“아.”
솔아…….
어떻게 된 상황인지 단번에 이해가 갔다.
이런 곳의 길거리 내기라면 온갖 속임수가 난무할 게 뻔했다.
그런데 솔이 S급 헌터의 동체 시력을 발휘해 전부 간파해 낸 것이다.
‘적당히 좀 하지…….’
친구들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솔은 자기가 자꾸 이기니 재미있어서 계속했을 게 분명했다.
“너 가진 돈 다 내놓지 않으면 내 손에 죽을 줄 알아!”
“날강도세요? 하이고, 무서워라. 여기는 경찰 없어? 무고한 시민이 핍박당하고 있는데 얼른 경찰 불러!”
“너 따라와!”
남자가 솔의 멱살을 잡아채면서 후드가 흘러내려 얼굴이 드러났다.
눈꼬리가 사납게 올라간, 붉은 머리카락의 화려한 미녀.
일순 남자의 눈동자가 커졌다.
“외국인이잖아!”
……하지만 남자에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가 뭔가 깨달은 표정을 지었다.
“이제 보니 작정하고 사기를 친 거였군? 제국에서 사기가 얼마나 중범죄인지 몰라?”
“사기는 그쪽이 친 거고. 그리고 놔라?”
“아악!”
솔이 멱살을 쥔 남자의 손을 손쉽게 비틀었다.
“어딜 겁도 없이 헌터의 몸에 손을 대, 손을 대긴.”
그녀가 남자를 멀리 내던져 버렸다.
사람들은 가녀린 여자가 –아니다. 실전 근육으로 꽉 차 있다- 우락부락한 남자를 간단히 제압하자 경악했다.
“에, 에스퍼다!”
“엉? 에스퍼? 그게 뭔데?”
솔이 멀뚱하게 주변을 돌아보다가 친구들을 발견하고 태평하게 손을 흔들었다.
“오, 왔어?”
그런데.
“신고받고 왔습니다. 무슨 일이십니까?”
경비대원들이 등장했다.
혼비백산한 사람들이 경비대원을 향해 외쳤다.
“외국인 에스퍼예요! 저 사람이 사기를 쳤어요!”
“아니, 사기 안 쳤다니까?”
“에스퍼?”
경비대원이 솔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보았다.
“미등록 에스퍼다. 체포해!”
경비대원들이 우르르 솔에게 달려들었다.
당황한 솔이 능숙한 몸놀림으로 피했다.
“그러니까 에스퍼가 뭐냐고!”
“이 세계의 헌터 비슷한 거야. 그러니까 얌전히 좀 다니지, 왜 분란을 일으켜?”
“나는 가만히 있었는데 저 사람들이 먼저 시비를 걸었다고!”
친구들까지 나서자 경비대원의 눈초리가 매서워졌다.
“일당이냐?”
“…….”
네, 저기 그게. 얘랑 친구이긴 한데요. 어딜 내놔도 부끄러운 친구라 그다지 하나로 묶이고 싶진 않네요.
친구들이 속으로 대답했다.
유하가 속삭였다.
“어떡할까? 튀어?”
“가만있어 봐.”
앞으로 나선 미리내가 경비대원에게 질문했다.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실 거예요?”
“너희는 황궁으로 가서 조사를 받게 될 것이다. 만약 범죄 이력이 있으면 투옥될 것이고…….”
“황궁?”
아직 경비대원의 말이 끝나지 않았는데 황궁이라는 단어에 꽂힌 친구들이 시선을 마주쳤다.
황궁이면 황태자가 사는 곳 아닌가?
“순순히 따르지 않겠다면…….”
“갈게요.”
황궁으로 간다고 반드시 황태자를 만날 수 있는 건 아니겠지만 이런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그러니까 안내해 주세요, 황궁으로.”
자신들의 실력을 믿기에 은새와 친구들은 위기감 없이 경비대원을 따라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