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 안녕하세요, 여행자님들!
“……누구한테 말입니까?”
“모릅니다. 하지만 그게 누구든, 반드시 찾아서 제 손으로 죽일 겁니다.”
한서리한테서 섬뜩한 기세가 흘러나왔다.
이매는 갑화 길드의 정체성, 그 자체였다.
애초에 이매를 위해 만들어진 길드였고, 모든 길드원이 그에게 충성했다.
무심한 듯하나 다정하고, 사익을 좇기보다는 던전의 비밀을 파헤치는 데 온 힘을 쏟았다.
이매의 궁극적인 목표는 세계의 정상화였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던전의 위험에서 완전히 해방된 세계.
한서리는 몸서리치게 후회스러웠다.
이매의 귀국 날, 길드에 갑자기 문제가 생겨서 그를 직접 마중하러 나가지 못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자신이 직접 나갔어야 했는데.
……그를 지켰어야 했는데.
“한서리 부길드장.”
우리가 진정하라는 듯 그녀를 불렀다.
눈앞의 한서리는 툭 건드리면 와르르 무너질 성처럼 너무도 위태로워 보였다.
검게 죽은 눈동자가 도르륵 굴러왔다.
지금 한서리는 모든 사람이 의심스러웠다.
생과 사를 함께한 동료라도 서슴없이 등에 칼을 꽂는 세상이니 아무도 믿을 수 없었다.
그건 생전 이매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던 한우리나 도천 길드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분노를 검게 태워 재만 남은 것 같은 버석한 목소리로 한서리가 말했다.
“갑화 길드는 해체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길드장 자리는 계속 비워 둘 겁니다. 이매 길드장님 외에 그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이 있을 리 없으니까요.”
“…….”
“또한 유감스럽게도 앞으로 도천 길드와의 협력은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 장례식이 끝난 뒤부터 저희는 이매 길드장님을 죽인 범인을 찾는 데 총력을 기울일 것입니다.”
“……알겠습니다.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하세요. 이매 길드장은 저에게도 뒤를 맡길 수 있는 동료였습니다.”
“와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빈말로라도 그러겠다고 답하지 않고 한서리가 몸을 돌렸다.
앞으로 그녀가 무엇을 할지 알 것 같으면서도 예측이 되지 않았다.
복수에 눈이 먼 사람은 정말 어떤 일이라도 할 테니까. 그게 무엇이든.
도천 S급들은 장례식장을 나오며 자신들끼리 조용히 대화를 나눴다.
“누가 어떤 목적으로 이매 길드장을 살해했을까?”
“성격상 원한 살 만한 사람은 아니야. 차라리 던전에서 사망했다면 모를까…….”
곰곰이 생각하던 미리내가 툭, 말했다.
“유물. 이매 길드장을 노렸다면 그것밖에 없어.”
“유물? 대부분 뭐에 쓰는지도 모르겠고 딱히 아이템적 효능도 없는 그거 말이야?”
“어떤 이들에게는 가치 있는 물건일 수 있으니까. 이매 길드장이 마지막으로 간 곳이 어디지?”
“일본. 일본으로 간다고 했어.”
이매와 마지막으로 연락을 나눴던 우리가 기억을 더듬어 대답했다.
은새가 중얼거렸다.
“이매 길드장은 일본에서 뭘 손에 넣은 걸까…….”
***
남양주시 던전 공략 당일.
이른 시각, 현관을 나서면서 은새가 신발코를 바닥에 톡톡 두드렸다.
“그럼 벨키오르 님, 다녀오겠습니다.”
“다녀오겠쯤다!”
“은새, 별. 조심해라.”
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벨키오르가 은새의 목도리를 잘 여며 주었다.
그녀가 가만히 올려다보자 벨키오르가 의아하다는 눈빛을 했다.
“왜 그러지?”
“음. 별건 아니고요.”
쪽.
발꿈치를 들어 올려 순식간에 벨키오르에게 입을 맞춘 은새가 SS급의 민첩성을 살려 쏙 빠져나갔다.
“진짜 다녀올게요! 식사 잘하시고 봄이랑 마수들 잘 좀 부탁드려요.”
“머예여, 누나! 나두 뽀뽀!”
“응, 별이도 뽀뽀.”
마당에서 기다리고 있던 도다리에 훌쩍 올라타며 은새가 별이의 뺨과 둥근 뒤통수에 연신 뽀뽀했다.
“히히!”
아이는 눈앞에서 벨키오르와 은새가 애정 표현을 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다른 일에 집중하느라 잠시 떨어져 있으면 ‘또 싸웠어요? 얼른 화해해요!’라며 은새와 벨키오르의 등을 떠밀었다.
어쩔 때 보면 별이가 두 사람의 애정 지킴이였다.
꾸우우!
날개를 활짝 펴며 도다리가 비상했다.
스토리형 던전이라는 특이성 때문에 다른 마수들은 동행하지 않기로 했다.
도다리도 서울에 도착하면 길드에 맡길 생각이었다.
마수보다 사람이 등장하는 배경이라고 하니, 그들이 어떻게 반응할지 알 수 없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비록 환영이나 마찬가지여도 공략의 키워드가 그들에게 있는 이상 대비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별이는 여차하면 인간 모습을 할 수 있으니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데려가기로 했다.
‘무사히 마무리되면 좋겠다.’
언제나처럼 은새가 공략이 무사히 완료되길 빌었다.
도다리의 날갯짓을 따라 은새의 긴 머리칼이 휘날렸다.
“들어간다.”
남양주시 던전 포털 앞에서 우리가 말했다.
일행이 빛에 휩싸이고 풍경이 바뀌었다.
“와……. 정말 평범한 거리네.”
놀란 은새가 주변을 돌아보았다.
잘 정리된 거리와 무어라 떠들며 바쁘게 돌아다니는 사람들.
막 떠오르는 햇빛은 따사로웠고 어딘가에서 풍겨 오는 버터 가득한 빵 냄새가 침샘을 자극했다.
보는 것, 듣는 것, 느껴지는 것 전부 실재하는 것처럼 생생했다.
던전에서 이런 풍경을 보는 날이 오다니.
“거기 비켜!”
두두두 땅을 흔들며 나타난 마차가 은새와 친구들 앞을 요란스럽게 지나갔다.
“운전 똑바로 해!”
솔이 소리치며 주먹을 붕붕 흔들었다.
인찬이 들뜬 얼굴을 했다.
“왠지 중세 유럽풍 같지 않아?”
“유럽인지 어딘지는 모르겠는데 건물 양식이나 사람들 외양이 동양스럽지는 않다.”
“누가 보기 전에 별이 모습을 바꾸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미리내의 말에 은새의 품에 안겨 있던 아기 드래곤이 눈을 끔뻑이더니 아이 모습으로 변했다.
“누나! 저기서 맛있는 냄새가 나요. 배고파요…….”
오기 전에 간식을 잔뜩 먹은 별이지만 막상 먹을 것을 보니 허기를 느낀 모양이었다.
아이가 가리킨 곳에는 구운 소시지와 감자튀김을 팔고 있었다.
“저거 먹을 수 있나?”
“근데 우리 돈 없잖아. 사려면 돈 내야 하는 거 아니야?”
“던전인데 그런 것도 신경 써야 해?”
처음 겪는 상황이다 보니 은새와 친구들은 우왕좌왕했다.
그때였다.
띠링!
[안녕하세요, 여행자님들! ‘시그라엘의 시험’ 던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시스템 창? 시스템 창이 여기서 또 나온다고?”
한 번 겪어 봤다고 그들은 당황하지 않고 눈앞에 뜬 반투명한 창을 바라봤다.
[본 던전은 여행자님들의 자율도를 최대로 보장하고 있으며 그에 따라 스토리가 진행됩니다. 단, 도달한 결말에 따라 공략 여부가 결정됩니다.
미션! 이 세계에 ‘□□□ □□’의 강림을 성공시키세요.
HINT 1. 황태자 아슬란으로부터 흑마법사 ‘로먼’을 구하세요.
HINT 2. 신전에서 ‘혼돈의 파편’을 획득하세요.
HINT 3. 강림 의식을 진행하세요.]
“이 빈 네모 칸은 뭐야?”
“황태자? 흑마법사? 와, 무슨 소설 속에 들어온 것 같다.”
시스템 창 화면이 넘어갔다.
[여행자님들의 원활한 진행을 위해 1인당 100골드의 여행 지원금을 드립니다!]
차르륵!
허공에서 그들 위로 묵직한 주머니가 하나씩 떨어졌다.
“돈!”
“누나, 나두 받아써여!”
솔이 공돈 생겼다며 으하하 웃었고 별이도 제 몫이 있다며 신이 났다.
[그럼 건투를 기원합니다.
▶스토리 진행도 0%…….]
설명은 그게 다였다.
은새와 친구들은 머리를 맞대고 주어진 힌트에 대해 논의했다.
“황태자면 높은 신분이니 거리를 막 돌아다니지는 않을 텐데. 언제, 어떤 사건에서 흑마법사를 구하라는 거야? 이미 잡혀 있으면 어떡하라고.”
“이거 네모 빈칸 수상하다. 왜 감췄지?”
“100골드면 이 세계에서 얼마만큼의 가치가 있는 걸까?”
“흐음…….”
우리가 박수를 쳤다.
“일단 이 세계에 대한 정보부터 모으자. 그게 먼저겠어.”
“옷 먼저 갈아입을까? 우리 좀 튀는 것 같아.”
미리내의 지적에 친구들이 주변을 돌아보았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명백한 외국인으로 보이는 그들을 힐끔거리는 게 느껴졌다.
“저런 옷을 사서 입으면 되겠다.”
유하가 어떤 사람을 가리켰다.
그는 발목까지 오는 로브를 입고 후드를 쓰고 있었다.
“너무 수상하지 않나?”
“지금 우리에겐 딱 좋아. 가자, 저기가 옷 가게인 모양이다.”
그들은 개당 80실버라는 금액을 지불하고 로브를 구입할 수 있었다.
별이는 맞는 사이즈가 없어서 모자를 하나 사서 씌워 주었다.
“흩어져서 정보를 수집하자. 두 시간 뒤에 여기서 모이는 걸로.”
“OK!”
축소된 상태창에 스토리 진행도와 경과 시간이 표시됐기 때문에 다시 만나는 게 어렵지는 않을 듯했다.
은새와 별이는 광장 한복판에 서서 행선지를 고민했다.
“누나, 우리는 어디루 가요?”
“역시 기본적인 배경지식을 알려면 도서관으로 가는 게 좋겠지?”
“좋아여!”
은새는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일반인에게도 개방된 황립 도서관으로 갔다.
“엄청 크다.”
“와! 여기 성이에요? 공주님하고 왕자님 살아요?”
“아니, 그냥 도서관. 공주님하고 왕자님 사는 성은 다른 곳에 있어.”
별이가 착각할 만큼 도서관은 크고 외관이 번쩍번쩍했다.
입구에서 외국인인데다 수상쩍게 보이는 은새와 별이를 막지 않을까 했는데 사서는 방명록에 이름을 적으라고만 했다.
한국어로 썼음에도 자연스럽게 이 세계 언어로 바뀌었다.
은새는 별이에게 도서관에서는 조용히 해야 한다고 말하고 역사책을 모아 놓은 구역으로 갔다.
“‘세인나이츠 제국의 역사’…….”
정말 지구와 다른 세계구나.
신기한 기분을 느끼며 은새가 책을 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