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 살해당하셨습니다
“뭐, 뭐를?”
이미 은새가 말하는 바를 짐작하고 있으면서 양설은 발뺌을 했다.
은새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나인 척하고 사람들 만나고 다녔잖아요.”
“나 아니야!”
“금방 들킬 거짓말은 하지 마요. 양설 헌터 말고 그런 일을 할 사람이 또 누가 있는데요?”
그제야 친구들의 미묘했던 반응이 이해가 갔다.
그들은 양설이 이러고 다니는 걸 알면서도 은새에게 비밀로 했다.
만약 은새가 알았으면, 못 하게 말렸을 테니까.
게시글이 처음 올라온 날짜를 봤을 때 거의 톈진에서 돌아온 직후부터였던 듯싶었다.
‘혹시 친구들이 시킨 건가?’
그래서 마지못해서 한 걸까?
은새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아무리 그녀가 SS급이 됐어도, 톈진 사태를 막은 주역이라고 해도 의혹이 남아 있는 이상 사람들은 그에 대해 계속 얘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양설을 전면에 내보일 수도 없고, ‘카더라’를 이용하는 게 여론을 뒤집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기는 했다.
게다가 양설이 쓴 방식을 보니 ‘당신한테만 말해 주는 건데 사실…….’로 시작해서 상대방의 공감과 이해를 이끌어 내고, 유명인의 ‘비밀’을 알게 된 이들이 다른 이들에게 전달하는 식으로 자연스럽게 퍼져 나가도록 했다.
참, 전에 했던 일도 그렇고 아무튼 여론을 주무르는 데 남다른 재능이 있었다.
하지만 은새는 자신의 무고함을 입증하기 위해 양설을 데려온 게 아니었다.
이런 일 하지 않아도 양설에 대한 감정은 털어 버렸으니 그저 평안히 지냈으면 했다.
그때 안에서 왕호연이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나왔다.
“오셨어요. 생각보다 늦게 찾아오셨네요.”
“갑자기 찾아와서 미안해요, 왕호연 헌터.”
“괜찮습니다. 근데 그거 설이 나름대로 고맙고 미안해서 그런 거예요. 유은새 헌터가 해명도 안 하고 시간이 해결해 주길 기다리고 있으니까 사람들 인식이 여전히 엉망이잖아요. 설이 성격에 답답해서 참을 수 있었겠어요?”
“……억지로 한 일은 아니에요?”
“설이 얘가 그런 거 억지로 할 애로 보이세요?”
은새가 양설을 쳐다봤다.
입을 삐쭉이며 그녀를 노려보는 양설은 어딘지 억울한 것처럼 보였다.
은새는 거기서 안도했다.
아, 우려했던 경우는 아닌 모양이구나.
“일단 현관 앞에서 이러지 말고 들어오세요.”
“실례하겠습니다.”
집 안은 예상과 다르지 않은 풍경이었다.
티브이 앞에 널려 있는 게임기 콘솔과 아무 데나 벗어놓은 옷가지, 과자 봉지 같은 것들이 눈에 띄었다.
양설과 왕호연은 대강 치우는 시늉을 하며 은새를 거실로 안내했다.
그녀가 카페에서 사 온 디저트와 음료를 그나마 깨끗한 거실 탁자에 올려놓았다.
“둘이 잘 지내요? 한국에서 지내는 데 어려움은 없어요?”
“저희 몇 달간 한국에서 지냈었잖아요. 적응하는 데에는 별문제가 없죠.”
“그래도 평생 나고 자란 곳을 떠나온 거잖아요. 아는 사람도 별로 없을 테고. 아, 연락처 좀 알려 줄래요? 곤란한 일이 생기면 언제든 연락해요. 길드에서 알아서 잘 챙겨 주겠지만.”
“안 그래도 도천 길드에서 자리를 만들어 줘서 실직자 신세는 면했네요. 여기 제 번호. 설이 번호도 알려 드릴게요.”
“내 거를 왜 네가 알려 줘?!”
“어차피 알려 줄 거 누가 알려 주는지가 뭐가 중요해?”
은새는 두 사람을 흥미롭게 관찰했다.
중국에 있을 때 왕호연은 보호자처럼 양설의 뒤에 서 있을 뿐, 거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양설을 제쳐 두고 자신이 대화를 주도하고 있었다.
이게 평소 그들의 모습이구나.
아직도 낯선 이를 경계하는 고양이처럼 멀거니 서 있는 양설에게 은새가 말했다.
“양설 헌터, 아까는 미안해요. 여기 도착하기 직전에 그 사실을 알아서 나도 당혹스러웠거든요.”
“……나 나쁜 짓은 안 했어!”
“알아요. 계속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을 거예요? 이리로 와서 앉아요.”
은새가 제 옆자리를 손으로 가리켰다.
하지만 양설은 팔짱을 끼고 고집스럽게 버텼다.
아무래도 보자마자 따져 물은 것이 양설의 기분을 상하게 한 듯했다.
‘아니 그보단…… 기가 죽은 건가?’
“딱히 당신을 위해서 한 일은 아니었어.”
“이해해 주세요. 설이 화법이 원래 저렇게 날이 서 있어요. 그래서 오해도 많이 받아요.”
“왕호연, 무슨 소리야!”
“오해 안 해요. 그냥 제가 이 사실을 너무 늦게 알아서……. 설아, 안 앉을 거야? 언니 말 들어야지.”
은새가 짓궂게 웃으며 말하자 양설이 펄쩍 뛰었다.
“어, 언니는 무슨!”
“한국 오면 언니라고 부르기로 약속했잖아.”
“그런 적 없어! 정말 당신은 제멋대로야. 호텔에 있을 때도 그러더니…….”
양설은 쉬지 않고 꿍얼거리면서 소파 끄트머리에 겨우 걸터앉았다.
어쩐지 주객이 전도된 광경이었다.
손님보다 낮은 자리에 앉는 집주인이라니.
분위기를 환기할 목적으로 은새가 캐리어에서 음료와 디저트를 꺼냈다.
“들어요. 단지 앞에 있는 카페에서 사 왔어요.”
“이거 설이가 좋아하는 거예요. 감사합니다.”
“나 식이요법 중이라 단거 안 먹는다고.”
“그런 말은 어젯밤에 아이스크림 한 통 다 비운 사람이 하면 안 되지?”
왕호연은 거부하는 양설의 손에 기어코 복숭아 스무디를 쥐여 줬다.
좋아하는 거라던 말이 사실이었는지 양설은 아닌 척, 입꼬리가 씰룩였다.
“식이요법이요?”
“얘 요즘 운동해요. 누가 헌터는 체력 단련이 필수라고 말해서.”
“켁, 그런 거 아니야!”
다급하게 빨대를 뱉어 낸 양설의 목부터 얼굴 전체가 확 달아올랐다.
흔들리는 그녀의 눈동자를 본 은새가 ‘아.’ 했다.
‘그러고 보니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지.’
은새가 쿡쿡 웃음을 흘리자 양설은 쥐구멍이라도 찾듯 방으로 도망가려다가 왕호연에게 붙잡혔다.
단것을 먹여 양설의 기분이 좋아진 것을 확인한 은새는 제대로 고마움을 표했다.
“아무튼 고마워요. 양설 헌터만 해 줄 수 있는 일이었어요. 나를 생각해서 한 일이란 거 잘 알아요.”
“……됐어. 이제 안 해.”
양설이 빈 테이크아웃 잔을 탁자에 탁 내려놓았다.
누군가 자신의 행세를 하고 자신도 모르는 곳에 돌아다닌다는 게 얼마나 소름 끼치고 두려운 일인지 그녀는 잘 알았다.
양설의 의도를 순수하게 받아들이고 고마움을 표하는 은새가 특이한 것이었다.
그녀라면 그러지 않을까, 막연하게 생각했지만 막상 정말 이렇게 나오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안 그래도 슬슬 그만두려고 했어.’
양설은 뚱카롱을 한입에 욱여넣고 우물거렸다.
꼬리가 길면 잡히기 마련인데다, 과유불급이라고 했다.
계속 은새를 둘러싼 동정 여론이 짙어지면 분명 반발심을 갖는 이들이 나올 것이다.
더군다나 SS급 헌터에게 동정 여론은 그다지 쓸모없었다.
빛나는 별이자 영웅인 은새는 사람들의 우상이 되어야 했다.
상처는 있을지언정 그들과 같은 위치에 있어서는 안 됐다.
양설의 의중을 파악한 은새가 화제를 돌렸다.
“중국에서 연락 온 거 있어요?”
“저희한테 직접적으로는 연락 안 와요. 그럴 가치가 없다고 판단한 거겠죠. 도천 길드장님 통해서 중요한 내용만 전달받고 있어요. 뭐, 한국 온 지 얼마 안 돼서 다신 중국 땅을 밟을 생각 하지 말라는 경고를 듣기는 했네요.”
은새가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혹시 미련이 남아요?”
왕호연이 덤덤히 대답했다.
“아니요. 생각보다 후련해요. 이렇게 간단한 일을 그동안 왜 그렇게 어렵게 생각했는지 모르겠어요.”
고개를 끄덕인 은새가 짝, 하고 박수를 쳤다.
“우리 저녁이라도 같이 먹을까요? 양설 헌터는 뭘 좋아해요? 사람들 목격담 보면 음식점에서 많이 나타나던데, 그중 가장 맛있었던 음식이 뭐예요?”
“나 식이요법 중이라니까!”
“잘 먹어야 체력 단련할 힘도 생기는 거예요. 치팅 데이라는 것도 있잖아요.”
양설이 혹하는 표정을 지었다.
매일 식이요법 1일 차가 되는 양설은 오늘도 쉽게 욕망에 굴복하고 말았다.
“……이 근처에 SNS에서 유명한 맛집이 있어. 내가 특별히 데려가 줄게.”
“하하, 좋아요.”
저녁 시간보다 이르게 나갔음에도 정말 유명한 곳인지 그들은 웨이팅으로 1시간 40분이나 기다렸다.
양설이 강력 추천한 돼지등갈비찜은 나중에 다시 오고 싶을 만큼 맛있었다.
***
남양주시 던전 공략에 들어가기 이틀 전.
이매의 사망 소식이 전해졌다.
도천 길드 S급들은 검은 정장을 입고 굳은 표정으로 장례식장에 들어섰다.
우리가 대표로 분향을 한 뒤 영정 앞에서 묵념했다.
그들은 어딘가 넋이 나간 한서리를 불렀다.
“한서리 부길드장.”
텅 빈 시선이 끼기긱 옮겨 왔다.
우리는 괜찮냐는 질문은 하지 않았다.
당연히 안 괜찮을 걸 알기에.
한서리와 갑화 길드원들에게 이매는 길드장 이상의 존재였다.
우리가 목소리를 낮춰 그녀에게 질문했다.
“시체가 남지 않았다니,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장례식 중이지만 이매의 관은 비어 있었다.
자세한 건 몰라도 시신이 불에 탔다는 소식은 전해 들었다.
사람과 엮이는 걸 싫어해서 원한 살 일도 없는 이매가 그런 죽음을 맞이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초점 없던 한서리의 눈동자에 번뜩하고 살기가 어렸다.
“길드장님은 살해당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