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 이만 끝내지
“혹시 취하셨어요?”
은새가 신기하다는 듯 올려다보며 묻자, 벨키오르가 머리를 기울였다.
“내가 취했다고?”
“어…… 아니에요? 왠지 평소랑 분위기가 다르신 것 같아서요.”
“잘은 모르겠지만 그대가 그렇게 느낀다면 그런 것이겠지.”
벨키오르는 부정하지 않으며 은새에게 계속 간지러운 입맞춤을 했다.
은새는 그가 이러는 게 놀랍기도 하고 재미있어서 쿡쿡 웃었다.
꼭 별이가 애교 피운다고 쪽쪽 뽀뽀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아들보다 연륜이 깊고 반려에 대한 애정이 지극한 벨키오르는 열망을 숨기지 않으며 은새의 목덜미에 코를 묻고 체향을 한껏 들이쉬었다.
제 향을 뒤집어쓴 반려는 너무나 유혹적이고 수시로 그를 충동질했다.
“꺅!”
벨키오르가 은새를 번쩍 안아 들고 침대로 갔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이불 위에 내려놓은 뒤 두 팔 사이에 그녀를 가두고 몸을 묵직하게 겹쳤다.
“베, 벨키오르님 밖에! 밖에 친구들이 있어요.”
“그런데?”
기겁한 은새가 말렸으나 벨키오르는 뭐가 문제냐는 듯한 표정이었다.
은새가 단호하게 그의 어깨를 붙들었다.
“안 돼요. 얼른 주무세요.”
“…….”
눈매를 가느스름하게 좁힌 벨키오르는 아쉬움을 삼키고 욕망을 고이 접어 눌렀다.
오늘만 날이 아니니 은새가 마음이 동할 때를 노리면 된다.
대신 그는 은새에게서 완전히 떨어지지 않고 그녀의 허리를 바짝 끌어안은 채 더더욱 품에 안겨 들었다.
거대한 맹수가 사육사한테 매달리는 것처럼.
“이 정도는 괜찮은가?”
“네. 그런데 벨키오르 님, 자세 안 불편하세요……?”
“전혀. 그대야말로 불편하면 말해라.”
은새는 색다른 자세에 놀라움을 느끼는 한편 비실비실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꾹 힘주어 참았다.
평소에는 자신이 벨키오르에게 파묻히다시피 안겨 있는데, 지금은 정확히 반대였다.
‘와, 이러니까 꼭 하늘이나 민들레가 안긴 것 같네.’
은새는 그들에게 하듯 벨키오르의 머리카락을 살살 쓸어내리다가 눈치를 봤다.
머리를 만지는 게 예의가 아닌 문화도 있으니까.
하지만 은새가 하는 일이라면 뭐든 수용할 자세가 되어 있는 벨키오르는 지고한 드래곤의 자존심을 내려놓고 은새의 손에 제 머리를 맡겼다.
사락사락 손에 감기는 느낌이 좋았다.
여전히 그에게서는 좋은 향기가 났다.
은새는 조금 더 과감하게 손을 움직였다.
그의 귀 모양을 덧그리다가 이마를 만지고, 베일 듯 날카로운 콧등에 손을 댔다.
부드러운 입술까지.
어둠 속에서 촉각에만 의지해 그를 만지니 머릿속으로 벨키오르의 얼굴이 그려졌다.
은새가 그를 꼭 껴안았다.
“아까 결혼식은 성대하게 하고 싶으시단 말, 진심이세요?”
“그래. 이 세계에 있는 모든 인간들이 그대가 나의 반려라는 사실을 알기를 원한다.”
“저도 좋을 것 같아요. 벨키오르 님이 제 반려라고 온 세상에 자랑할 수 있으니까요.”
은새는 머릿속으로 그날을 상상했다.
반려 마수들이 있기 때문에 결혼식은 야외에서 진행해야 할 것이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 아름다운 새하얀 웨딩드레스를 입은 은새가 턱시도를 멋지게 차려입은 벨키오르의 손을 잡고 사람들 사이를 걷는다.
마수들이 뒤를 따르고, 별이가 그들의 앞을 아장아장 걸어가며 꽃을 뿌려 줄 것이다.
“정말 그런 날이 오면 좋겠어요.”
은새는 기분 좋은 미소를 그렸다.
적잖이 술을 마셨던 그녀는 이내 색색 소리를 내며 잠에 빠져 들었다.
은새가 깊은 잠에 빠질 때까지 기다리고 있던 벨키오르는 고개를 들어 키스하고 그녀에게 나직하게 속삭였다.
“그대가 원하는 건 전부 들어줄 것이다. 후회하는 일 없게, 살아가는 모든 순간을 소중히 할 수 있도록 지킬 것이다.”
벨키오르는 행여 찬 바람이 들세라 꼼꼼히 이불을 덮어 준 뒤 그녀를 따라 눈을 감았다.
***
머리부터 발끝까지 꽁꽁 싸맨 인영이 공항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사람들은 수상한 차림의 그를 보고 슬금슬금 피했다.
갑화 길드의 길드장, 이매는 톈진 사태 이후 일본으로 넘어갔다가 급히 귀국하는 길이었다.
톈진에서 일어난 재앙을 초기에 진압한 주역 중 하나로서 그간 그에게 수많은 기자들이 달라붙었다.
하물며 SS급이 되었다는 유은새가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니 그에게서 뭐라도 알아내려고 극성이었다.
이건 이매뿐만 아니라 양희진이나 김일도에게도 해당되는 일이었다.
때문에 한동안 한국 땅을 밟지 않을 생각이었는데, 가고시마현에서 유물을 하나 손에 넣은 이매는 이것이 예사 물건이 아니라는 걸 눈치채고 감정을 맡기기 위해 비밀리에 돌아온 것이었다.
그는 부길드장 한서리가 미리 보내 놓은 길드원이 모는 차에 올랐다.
서울로 올라가는 길.
늦은 시각이라 고속도로는 한적했다.
“저 새끼 뭐야?”
한참을 가고 있는데, 운전 중이던 길드원이 문득 혼잣말을 했다.
창밖을 내다보고 있던 이매가 백미러로 그와 시선을 맞추었다.
“왜?”
“길드장님, 미행인지 뭔지가 따라붙었는데요. 어떻게 할까요?”
“기자야?”
“모르겠습니다.”
기자든 아니든 귀찮은 일에 엮이기 싫은 이매가 간단명료하게 지시했다.
“따돌려.”
“예! 차가 흔들릴 수 있으니 꽉 잡으십쇼.”
이매에게 절대적으로 충성하는 갑화 길드의 헌터는 부왕, 하고 자동차 액셀을 밟았다.
차가 속력을 높였다.
그러자 뒤따라오던 차도 빨라졌다.
한밤에 고속도로 추격전이 벌어졌다.
요리조리 차선을 바꿔 가며 따라오는 차를 떼어 내려던 길드원은 급하게 돌진해 오는 뒤차를 발견하고 거친 욕설을 내뱉었다.
“저 미친 새끼가!”
끼이익, 쾅!
던전 부산물로 만들어진 방어력이 월등히 뛰어난 차가 반파될 정도의 큰 사고였으나 타고 있던 이들이 헌터였기에 별 부상 없이 차에서 내렸다.
뻐근한 뒷목을 주무르며 이매가 뒤차를 노려보았다.
범퍼가 완전히 찌그러진 차에서 검은 복색을 한 세 사람이 나왔다.
이매가 음산하게 말했다.
“너희는 누구지?”
“이매 길드장. 일본에서 입수한 물건을 나에게 넘겨줬으면 하는데.”
“……뭐?”
기껏해야 기자를 예상했던 이매는 아직 외부에 말한 적 없는 유물의 존재를 그들이 알고 있자 경계했다.
이매를 덮친 이들, 천창현과 오하나, 진해성은 철저히 모습을 감춘 채 무기를 들었다.
“이 새끼들이 감히 이분이 누구인 줄 알고!”
갑화 길드의 헌터가 살기를 드러내며 나섰다.
그런데.
“어?”
한순간 빛이 휘광하더니 헌터의 몸이 기우뚱했다.
깔끔하게 목이 잘린 그는 눈도 감지 못하고 그대로 절명했다.
이매는 자신을 노리는 이들이 예사 인물들이 아님을 눈치챘다.
공격이 전혀 눈에 보이지 않았다.
주무기로 사용하는 대검 대신 양손검을 손에 쥔 천창현이 싸늘하게 말했다.
“순순히 넘기지 않겠다면 무력으로 빼앗는 수밖에.”
그 말을 끝으로 그들이 천천히 이매를 에워쌌다.
이매가 입가에 흘러내린 피를 거칠게 닦았다.
그가 스킬로 불러낸 도깨비와 신령들은 현재 회복 불가능한 타격을 입어서 역소환될 위기에 처했다.
S급 헌터인 그가 같은 헌터를 상대로 이렇게까지 몰린 건 처음이었다.
그것도 단 세 명에 의해.
“……유물을 가져가서 뭘 하려는 거지? 내가 가진 이 유물이 대체 뭐기에.”
“모든 것의 시작과 끝이지. 당신은 어차피 제대로 쓰지 못할 테니 내가 가지려는 거다.”
이매가 시간을 끌며 이능을 끌어모았다.
설령 자신이 여기서 죽더라도 유물을 절대 저들에게 넘겨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죽으면 유물은 영영 사라지게 된다.”
유물은 아공간에 넣어 두었다.
헌터가 죽으면 아공간을 강제로 열 방도는 없었다.
천창현이 양손검을 든 채로 이매에게 다가갔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하지. 가는 길이 외롭지는 않을 거다. 네가 죽으면 네 길드원들이 사방을 들쑤시고 다닐 테니, 길동무로 보내 주지.”
갑화 길드원들의 이매에 대한 충성심은 유명했다.
특히 한서리 부길드장.
일부러 이곳에 오지 못하게 수를 썼으나 만약 그녀가 이 자리에 있었으면 천창현은 계획을 다시 세워야 했을 것이다.
한서리의 ‘타나토스의 낫’과 ‘저승 명부’는 천창현에게도 까다로운 능력이었으므로.
“이만 끝내지.”
이매가 마지막 힘을 짜내 저항했으나 무수히 많은 헌터들의 스킬을 ‘강탈’한 천창현은 이전과 비교할 수 없는 경지에 올라 있었다.
“성공이에요?”
“빨리 자리를 벗어나는 게 좋겠어. 꼬리가 잡힐지도 모르니.”
천창현은 제작자 김일문이 만든 특수한 아이템으로 죽은 이매의 아공간을 강제로 열어 유물을 빼냈다.
아직 감정받기 전이었으나 그는 이 유물이 무엇인지, 어떤 용도로 사용하는 것인지 알고 있었다.
강림석.
이 세계를 멸망으로 몰아넣었던 단초를 손에 넣었다.
“돌아간다.”
떠나는 그들의 뒤로 이매와 갑화 길드 헌터의 시체가 불길에 타올랐다.
***
[헌터일보] 골드스타 백찬민 길드장! 한국에서 두 번째 SS급 헌터로 등극!
백찬민이 SS급 헌터가 됐다는 소식이 헌터계를 강타했다.
던전 공략 일정이 잡혔다는 말을 듣고 모처럼 길드를 방문한 은새는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길드장실로 들어섰다.
뉴스를 보고 있던 솔이의 분개한 목소리가 가장 먼저 들렸다.
“아오, 분명히 은새가 SS급 됐다니까 배 아파서 따라 한 거라니까? 저 인간 줏대 없이 저러는 거 창피하지도 않나?”
은새를 본 다른 친구들이 인사를 해 왔다.
“은새야, 왔어?”
“하이. 밖에 춥지?”
“응. 많이 쌀쌀하네. 그런데 솔이 아직도 저래?”
은새가 목도리를 풀고 미리내가 건네주는 코코아를 받아 들었다.
유하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런데 백찬민 길드장이 너 SS급 된 거 보고 자극받아서 해외에서 각성석 사들인 건 맞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