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 이렇게 될 줄 알았지
“어서 와, 얘들아.”
차 소리를 듣고 나온 은새가 친구들을 반겼다.
12월 초에 강원도 산골로 오느라 패딩과 목도리, 모자로 중무장한 이들이 기자 흉내를 내던 것을 때려치우고 덜덜 떨었다.
“으어어, 겨울에 산속에 있기 안 춥니? 그냥 서울로 와! 돈도 많으면서. 아니면 내가 통 크게 오피스텔 한 채 해 줘?!”
“남궁솔 또, 또 나댄다. 얼마 전에 출시한 가상 현실 게임에 전 재산 탕진한 주제에, 은새가 너보다 돈 많아.”
“나도 앎. 그냥 말해 봤음. 아니 그런데 게임 속에는 또 다른 세상이 있다고요!”
“어어, 그래. 전형적인 게임 폐인이 할 법한 소리구나.”
불의 이능을 다루는 솔이지만 능력과 체질은 별개라 겨울만 되면 솔은 춥다 소리를 입에 달고 살았다.
냉기 면역 스킬이 있으면 모를까, S급 헌터라도 한파와 폭염에는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겨울만 되면 솔은 몸 주변에 불길을 두르고 다녔는데 이곳이 산이라 자제하는 것이었다.
춥다고 호들갑 떨었으나 사실 친구들은 모두 보온 아이템을 사용 중이었다.
은새가 웃으면서 말했다.
“나도 그 게임 광고하는 거 봤어. 솔이가 좋아하겠다 싶었는데 결국 하는구나?”
“엉. 근데 마당에 들어오니까 확 따뜻해지네? 이거 마법이야?”
“응. 벨키오르 님 덕분에 올겨울은 따뜻하게 보낼 것 같아. 가져온 건 뭐야?”
인찬이 차 트렁크에서 박스를 꺼내 마당에 착착 쌓고 있었다.
친구들의 표정이 음흉해졌다.
“연말이잖아! 파티 해야지. 파티에 빠지면 안 되는 건 뭐다?”
“설마 저거 다 술?”
“빙고! 정답을 맞힌 어른이에게는 로얄 살루트 38년산을 한 박스 선물로 드립니다!”
죄다 한패라서 박수 치고 난리가 났다.
은새가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연말이니 그냥 넘어갈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지만 정말 작정하고 들고 왔구나.
‘애들 정신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을 때 벨키오르 님과 그런 사이가 됐다고 빨리 말해야겠다.’
은새는 오늘 친구들을 부르면서 이유를 알려 주지 않았다.
깜짝 발표를 할 계획이었다.
“사양할게……. 오늘 마시고 남으면 챙겨 가.”
“다른 것들도 기대해도 좋아! 오늘 특별히 엄선해서 가져왔으니까 원하는 대로 골라 마셔. 아! 이건 모다온 씨가 체코에서 보내 준 건데…….”
은새가 친구들한테 붙잡혀 있는 동안 유하가 슬쩍 빠져나와 현관 앞에 서 있는 벨키오르에게 다가가 허리를 꾸벅 숙였다.
“스승님, 안녕하셨어요? 불초한 제자가 인사드립니다.”
그가 눈동자만 굴려 유하를 슥 보고는 바로 고개를 돌려 버렸다.
“나는 너 같은 제자 둔 적 없다.”
“아직 제가 많이 부족하니 부끄러우신 것 이해합니다. 하지만 가르침을 주셨으니 존경하는 마음을 담아 스승님이라 부르는 걸 허락해 주세요.”
하여튼 말은 잘한다.
원하지 않았지만 유하의 뻔뻔함에도 슬슬 적응이 되는 것 같았다.
한숨을 쉰 벨키오르가 머리를 쓸어 올렸다.
“내가 기술을 다 연마하기 전까지 분명 찾아오지 말라고 했을 텐데?”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 제자가 뼈를 깎는 노력으로 훈련에 매진했습니다만 약간의 문제가 생겨서…….”
유하가 벨키오르의 눈치를 봤다.
“마지막 기술 말입니다, 나무를 통과하게 하는 그것. 도저히 감을 못 잡아서 그런데 힌트를 주시면 안 될까요……?”
“내가 그래야 하는 이유는?”
“은새가 지금까지 출연한 CF 영상 원본.”
“……?”
“특히 20XX년 4월에 찍은 명품 C사 향수 광고는 유은새 신드롬을 일으킬 정도로 두고두고 회자되고 있죠. 쓰리피스 정장을 차려 입은 은새가 즉위식을 치르는 장면이 담겨 있습니다. 그걸 드릴게요.”
“너…….”
어김없이 뇌물이 등장했다.
아마 유하는 헌터가 되지 않았으면 정치인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같은 수법에 벨키오르가 두 번 넘어갈 리 없었다.
“헛수작 부리지 마라.”
“당연히 벨키오르 님께서는 영상에 담긴 모습 따위 흥미가 없으실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직접 보면 생각이 달라지실 겁니다. 여기…….”
유하가 미리 핸드폰 대기 화면에 켜 놓은 영상을 재생했다.
또각또각.
아무런 배경음도 없이 정갈한 구두 소리가 흘러나오자 벨키오르는 기막혀하면서도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구두를 신었어도 그의 귀에 익숙한 은새의 발소리였으니까.
CF는 은새가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착장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고급스럽고 품격 있는 디자인의 쓰리피스 정장.
영상 안의 은새가 주름 하나 없는 드레스셔츠에 팔을 꿰고 자로 잰 듯 딱 맞게 떨어지는 인디핑크 컬러의 베스트, 바지, 그리고 재킷을 걸친다.
투명한 병에 담겨 찰랑거리는 향수를 손목에 뿌리는 것으로 마무리.
그 모든 게 한없이 여유롭고 느긋한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졌다.
붉은 양탄자가 깔린 로열 로드를 걷는 은새는 사뭇 다른 인상이었다.
황제의 망토가 그녀의 어깨에 내려앉고 왕관이 씌워지기 직전.
-무릎 꿇고 경배하라.
유려한 필기체로 카피 문구가 새겨지고 은새가 시선을 들어 정면을 응시했다.
독선적이되 오만하지 않은 눈빛.
절로 시선을 빼앗기게 만드는 위압감이 느껴졌다.
헌터들이 연예인과 같은 위상을 누리며 CF를 찍는 건 이제 흔한 일이 되었다.
이 광고는 은새가 도저히 자신과 안 어울린다고 거절하려고 했으나 C사에서 그녀를 콕 집어 앰버서더(Ambassador)로 삼고 싶다며 강력하게 밀어붙였다.
은새가 이 광고를 하지 않으면 향수를 출시하지 않겠다고 했을 정도였다.
“이런 게 총 다섯 개나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너는 장사치를 하는 게 더 적성에 맞겠군.”
“제 적성까지 고려해 주시고, 감사합니다.”
어쩜 말하는 것마다 얄미운지 모르겠다.
벨키오르는 잠시 갈등했다.
안 가져도 그만인 물건이었으나 솔직히 탐이 났다.
자신은 모르는 은새의 모습이 담겨 있었고, 특히 방금 본 영상은 몇 년 전에 ‘유은새 신드롬’을 일으켰을 만큼 임팩트가 강했다.
영상 마지막에서 본 은새의 눈빛이 뇌리를 맴돌았다.
“나중에 따로 찾아오도록.”
“네! 감사합니다!”
유하가 뛸 듯이 기뻐하며 허리를 넙죽 숙였다.
술 상자를 들고 나르던 은새가 의아하다는 듯 그들을 쳐다봤다.
“둘이 무슨 대화를 했어요?”
“사제 간에 중요한 대화를 나눴지.”
“저자랑 가까이하지 마라, 은새. 이로울 게 없는 인간이다.”
“어…….”
유하와 벨키오르의 대답이 상이했다.
벨키오르는 마법으로 은새가 들고 있는 상자와 마당에 쌓인 것들을 전부 집 안으로 옮겼다.
겨우 이런 일을 은새가 하게 둘 수 없었다.
친구들이 왁자지껄하게 떠들며 거실로 들어섰다.
거기에는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가득한 음식이 차려져 있었다.
보쌈과 불고기전골 같은 한식에서부터 중식, 일식 등 메뉴가 다양했다.
“이게 다 뭐야? 은새야, 뷔페 불렀어?”
“벨키오르 님이 직접 하신 거야.”
은새가 뿌듯하게 얘기했다.
“음식 사 들고 오지 말라던 이유가 이거였어? 장난 아니다. 너 매일 이런 것만 먹어? 이러니까 강원도에서 안 나오지!”
“매일은 아니고. 손부터 씻고 와.”
은새가 친구들을 욕실로 밀어 넣었다.
그녀가 친구들과 편히 대화할 수 있게 벨키오르는 별이와 봄이가 있는 놀이방으로 잠시 자리를 피해 줬다.
“아, 아. 그럼 지금부터 도천 길드 배 연말 파티를 시작하겠습니다. 다사다난한 한 해였습니다만 올해도 수고 많으셨습니다.”
우리가 대표로 숟가락 마이크를 들고 말했다.
분위기를 잡던 그는 돌연 씩 웃었다.
“그럼 먹자!”
이다음은 평소처럼 흘러갔다.
미리내와 유하가 화려한 기술을 선보이며 전투적으로 소맥을 말았다.
웃고 떠들며 분위기가 점차 고조되어 갔다.
시끄러웠는지 별이가 빼꼼 문을 열고 내다봤다가 도저히 끼어들 수 없는 분위기라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얘들아, 내가 중요하게 할 말이 있어서 오늘 보자고 했어.”
“……뭔데? 나 트라우마 도지려고 해. 또 저주 같은 건 아니지?”
“아니야. 그때는 정말 미안.”
은새가 저주에 대해 고백한 것도 술자리에서였다.
방금과 똑같이 ‘중요하게 할 말이 있어.’라고 서두를 열었었지…….
체할 것 같은 표정을 짓던 친구들이 도로 활발해졌다.
“그래서 할 말이 뭔데?”
“혹시 벨키오르 님이랑 관련된 거야?”
“어? 미리내야, 어떻게 알았어?”
미리내와 유하의 시선이 마주쳤다.
혹시.
그들은 이다음에 은새가 할 말을 충분히 예측할 수 있었다.
“나 벨키오르 님의 반려가 됐어.”
은새가 수줍게 뺨을 붉히고 고백했다.
“……으응? 벨키오르 님? 반려가 혹시 우리가 아는 그 의미야?”
“은새 너 우리 몰래 도둑 결혼했어?!”
“아니! 정확히는 드래곤의 반려가 됐다는 뜻이야. 그…… 음. 그렇게 됐어.”
“잠깐만, 너 인간이잖아? 어떻게 그게 가능해?”
“벨키오르 님은 그래도 상관없으시대.”
그렇게 말하는 은새는 정말 행복해 보였다.
할 말이 많은데, 수천 살은 어린 여자를 양심도 없이 채간 그 드래곤 놈은 어디 있냐고 물어야 하는데 은새의 웃는 얼굴을 보니 말문이 턱 막혔다.
‘이렇게 될 줄 알았지.’
미리내가 물을 마시며 생각했다.
솔직히 한 지붕 아래에서 잘생기고 예쁜 남녀가 함께 사는데 정분이 안 나고 배기겠나.
더군다나 호감으로 시작한 관계라면.
은새를 대하는 벨키오르의 태도는 명확했으니 조만간 이렇게 되리라고 예상했다.
‘그나저나 우리 길짱께서 상심이 크겠는데?’
눈동자를 굴려 바라본 우리는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