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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키운 마수가 드래곤을 물고 왔다 (136)화 (136/190)

135화 – 이런 마음이었나

은새의 손에서 우산이 떨어졌다.

주룩주룩 내리는 비를 맞으며 은새는 서러운 눈물을 뚝뚝 떨어트렸다.

비도 오고, 바람은 불고, 춥고, 서러웠다.

은새가 우는 모습을 눈앞에서 보게 된 벨키오르는 동족에게 꼬리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처럼 큰 충격을 받았다.

그녀가 벨키오르 앞에서 우는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때와 지금은 달랐다.

떠나간 가족들의 얘기를 했을 때는 그리움의 눈물이었고 지금은 원망과 자조, 후회 등이 뒤섞인 눈물이었다.

그것도 자신 때문에.

벨키오르는 이유가 뭐든 일단 은새를 진정시켜야겠다는 생각에 재차 손을 뻗었다가 조금 전 은새에게 거부당했던 걸 깨닫고 허공에서 멈칫했다.

그에 은새가 더 크게 울었다.

체면이고 부끄러움이고 다 내려놓고 정말 온 힘을 다해서 통곡했다.

“허어어엉…….”

“은새…….”

벨키오르는 충격을 받은 건 받은 거고, 날도 추운데 비를 맞는 그녀가 걱정돼 마음이 조급해졌다.

은새가 건강 체질이라고 해도 인간은 아주 어이없고 사소한 일로도 아프거나 죽을 수 있으니까.

SS급 헌터를 손에 쥐면 부서질 유리 몸 취급하며 마법을 쓰려던 벨키오르는 그마저도 은새가 싫어할까 봐 바닥에 떨어져 있는 우산을 주워서 그녀의 머리 위로 씌워 줬다.

그러면서 본인은 여전히 비를 맞는 채였다.

“왜…… 우는 거지?”

“벨키오르 님은 제 마음 같은 건 하나도 모르죠. 그러니까 방금처럼 쉽게 손을 뻗을 수 있는 거죠!”

“은새, 천천히 얘기해 봐라. 내가 그대에게 실수한 게 있었나?”

잠깐 사이 빗물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푹 젖은 은새가 그렁그렁한 눈으로 벨키오르를 원망스레 올려다봤다.

그러면서도 그를 향한 애정이 눈빛에서 선연히 묻어나서 벨키오르는 더욱 혼란스러웠다.

“벨키오르 님이 다정하게 대해 주실 때마다 자꾸 욕심이 나서 괴로워요. 벨키오르 님이랑 함께 있으면 좋은데, 행복한데.”

“…….”

“언제 마음 바뀌어서 떠나실지 몰라서 무서워요. 어느 날 갑자기 진짜로 소중한 상대가 생겼다면서 제게 차갑게 대하시는, 그런 악몽을 꿔요…….”

벨키오르는 침묵했다.

언뜻 표정 변화가 없는 듯 보였지만 그는 은새의 말을 이해하느라 맹렬히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벨키오르는 은새와 함께 있는 모든 순간이 좋았다.

가능한 한 최선을 다해서 그녀에게 잘해 주고 싶었다.

드래곤의 최선이란, 원한다면 세상을 그녀 앞에 무릎 꿇릴 수도 있었다.

이 세계에는 신이나 드래곤이 존재하지 않으니 그다지 어려운 일도 아닐 듯했다.

그런데 괴롭다니.

악몽을 꾼다니?

그리고 무슨 욕심?

은새의 불안감을 이해하려면 조금 더 얘기를 들어 봐야 할 듯했다.

“은새. 내게 그대보다도 더 소중한 이가 생길 리 없다.”

“벨키오르 님은 오래도록 반려를 기다리셨잖아요! 뒤늦게라도 반려를 만나게 된다면요? 그래도 확신할 수 있으세요?”

그런데 그녀의 말을 들을수록 점점 더 미궁으로 빠져들었다.

이미 벨키오르는 은새를 반려로 맞이했다.

수없이 고뇌해서 스스로 운명을 선택했고, 자신의 목숨이 다하는 그날까지 은새를 아끼고 보듬으며 사랑할 것이다.

이제 와 어긋난 인연과 조우한다고 해도 벨키오르가 흔들릴 일은 없었다.

벨키오르가 잠깐 할 말을 고르는 사이, 은새가 고개를 푹 숙였다.

이런 식으로 제 마음을 전하고 싶지 않았는데.

날씨도, 상황도 모두 최악이었다.

그중 가장 최악은 자신이었다.

‘나한테 질리셨겠지…….’

은새는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고해하듯 벨키오르에게 고민하고 있던 모든 걸 털어놓았다.

“……벨키오르 님과 함께 있는 시간이 좋아서 차라리 제가 벨키오르 님의 반려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게 얼마나 말도 안 되는 바람이었는지 깨닫고 포기할까 했어요. 하지만 포기가 안 돼서, 자꾸 미련이 남아서 그럼 유희라도 괜찮다고 생각했어요.”

“유희?”

집으로 돌아온 은새는 그렇게 합리화를 해 버렸다.

반려가 안 된다면 유희라도 괜찮지 않을까?

벨키오르는 다정하고, 모든 행동에서 절 아껴 주는 게 느껴지니 유희라도 행복하지 않을까.

창작물에서 드래곤의 유희는 제법 다루는 소재고, 나름대로 낭만도 있었다.

은새 자신은 고작해야 백 년 정도 살 테니 긴 세월을 살아가는 벨키오르에게 조르고 조르면 죽을 때까지는 곁에 있어 줄 것 같았다.

그걸로 만족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대로는 저 너무 가슴이 아파요. 못 버티겠어요…….”

그때서야 벨키오르는 그동안 은새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를 알게 되었다.

‘……이런 기분은 온 생애를 통틀어 처음이군.’

뒷목이 뻐근해 와, 그는 잠시 고개를 들어 비 내리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황당하고, 허탈하고, 미안하고, 마음이 아팠다.

지성체인 스스로가 이렇게 어리석게 느껴진 적은 처음이었다.

‘이런 마음이었나.’

벨키오르가 가슴을 주먹으로 꾹 눌렀다.

진심이 전해지지 않는다는 게 이렇게도 막막하고 슬픈 것이었나.

은새는 오래 전부터 이런 기분을 느끼고 있었나.

그녀와 마음이 통했다고 생각했다.

은새가 그에게 품은 감정은 명확했고, 벨키오르 또한 같은 마음이었으니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진심은 은새에게 하나도 전해지지 않았다.

그에 더해 그녀는 종족이 다르다는 것과 지금까지 나타나지 않은 반려의 존재를 과하게 신경 쓰고 있었다.

그런 건 그들에게 있어서 무의미한데. 은새가 홀로 고민하고 괴롭게 만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유희라니.’

자신이 그런 덧없고 가벼운 마음으로 은새를 대할 리 없지 않은가.

가장 귀한 것으로 주변을 가득 채워 주고 땅에 발이 닿을 일 없게 품에 안고만 다니고 싶었다.

“좋아해요.”

그때 실낱같이 희미한 목소리가 들렸다.

놀란 벨키오르가 시선을 내리니 덜덜 떨면서도 제 마음을 말해 오는 은새의 모습이 보였다.

“제가 벨키오르 님을 사랑하고 있어요.”

거의 체념에 가까운 표정과 목소리였지만.

벅찬 기분을 느끼며 벨키오르가 입을 뗐다.

“은새.”

“벨키오르 님, 혹시 아케이아 님을 좋아하세요……?”

서둘러 은새에게 제 감정과 그간의 사정을 고백하려던 벨키오르는 갑작스레 튀어나온 이름에 미간을 찌푸렸다.

그만큼 너무 뜬금없는 타이밍이었다.

“아케이아가 여기서 왜 나오지?”

“저번에 갔을 때 껴안고 계셨잖아요.”

“그런 일 없었다. 나는 그대가 아닌 이와 닿는다는 생각만 해도 구역질이 치미니까.”

벨키오르가 진정 학을 떼는 기색을 보이자 은새는 당황했다.

“그리고 아케이아는 반려가 있다.”

광륜의 드래곤 세크레온이 아케이아의 반려였다.

수천 년을 살았어도 어리숙한 세크레온과 세상 모든 이치를 섭렵한 아케이아의 조합이라니,

예상 밖이라고 느껴질 수 있으나 의외로 그 둘은 잘 지냈다.

세크레온이 덜떨어진 행동을 하면 아케이아가 따라다니며 수습했다.

귀찮을 법도 한데 되레 귀여워하는 걸 보면 천생연분이었다.

“네? 그게…… 사실이에요?”

“그래. 하필 아케이아를 상대로 그런 오해를 하다니. 치욕스럽군.”

“어…….”

혼란에 빠진 은새가 눈꺼풀을 빠르게 깜빡였다.

이때가 기회라고 느낀 벨키오르가 바짝 다가섰다.

“은새. 그대가 아닌 다른 이를 반려로 맞을 생각은 없다.”

“…….”

“그리고 나는 지금껏 그대를 반려로 대했다. 정작 중요한 말을 하지 않아 그대를 마음고생 하게 했지만.”

“저를요……? 반려요?”

물기 어린 검은 눈동자에 놀람이 들어찼다.

운 흔적이 여실히 남은 흰 낯을 안타깝게 보던 벨키오르가 손을 들어 은새의 뺨을 조심스럽게 매만졌다.

“나는 그대와의 시간을 소중히 여기고 있다. 다른 누가 오더라도 이 시간을 빼앗기기 싫을 만큼.”

“벨키오르 님…….”

“그대가 인간인 건 내게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 이미 각오했고, 어떻게 할지 생각해 둔 바가 있으니까.”

“어떻게 하시려고요?”

“그건 함께 살아가면서 그대와 내가 상의할 부분이다. 결코 혼자 결정하지 않겠다.”

열기 띤 아름다운 금색 눈동자를 올려다보던 은새는 간신히 멈췄던 눈물을 도로 터트렸다.

벨키오르가 저를 반려로 맞아 준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았고 그저 세상의 모든 것에 감사했다.

살아 있어서 다행이다. 오늘처럼 행복한 날은 다시 오지 않을 것 같았다.

“정말 제가 벨키오르 님의 반려가 돼도 괜찮아요?”

“오히려 내가 묻고 싶군. 드래곤인 내가, 그대의 남은 생을 함께해도 되겠나? 평범한 인간과 다른 삶을 살게 될 거야.”

“이미 각오했어요.”

그가 했던 말을 은새가 그대로 따라 했다.

기운을 차린 듯한 모습에 벨키오르가 고개를 숙여 그녀와 이마를 맞댔다.

“그대를 은애한다.”

은새의 입이 동그랗게 벌어졌다가 기쁜 웃음을 와르르 쏟아 냈다.

“저도요. 사랑해요, 벨키오르 님.”

그녀는 우산을 들고 있는 벨키오르를 향해 팔을 벌렸다.

“안아 주세요.”

그는 기꺼이 품을 벌려 주었다.

끌어안은 은새를 마법으로 뽀송뽀송하게 말려 주고 따뜻하게 해 주었다.

혹시 몰라 기력을 회복시키는 마법까지 빈틈없이 걸었다.

그런데 벨키오르의 품에 안겨 있던 은새가 작게 속삭였다.

“조금 더 따뜻하게 해 주실 수 있어요?”

그 말에서 무언가 느낀 벨키오르가 그녀를 떼어 내고 표정을 살폈다.

은새는 얼굴이 새빨개진 채였다.

“…….”

벨키오르는 끓어오르는 기분을 삼키며 은새를 번쩍 안아 올렸다.

동공이 세로로 가늘어진 금색 눈에 어떤 열망이 휘몰아쳤다.

그대로 벨키오르는 집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들이 머물렀던 자리에는 우산 하나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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