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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키운 마수가 드래곤을 물고 왔다 (135)화 (135/190)

134화 - 제게 왜 이러시는 거예요?

아케이아가 벨키오르를 따로 불렀을 때만 해도 은새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저 두 분이서 나눌 말씀이 있나 보다 했다.

조금 떨어져서 잠시 기다리는데 문득 두 드래곤의 모습이 시야에 담겼다.

‘두 분이 저렇게 서 있으니까 정말 선남선녀네…….’

드래곤은 아름답고 잘생기지 않으면 안 된다는 규칙이라도 있는 것인지 진부한 표현이지만 그림 같았다.

게다가 드래곤 레어라는 공간적 배경이 더해지니 더욱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그때부터 은새는 기분이 약간 가라앉았다.

재벌가 남주인공과 가난한 여주인공이 나오는 드라마에서 한 번쯤 등장하는 ‘당신과 나는 사는 세상이 달라요.’라는 대사.

그 순간 은새는 여주인공의 마음을 십분 공감했다.

막상 그 상황에 직면하니 정말 ‘그사세’였다.

‘……나는 무슨 말도 안 되는 욕심을 부리고 있었던 거지.’

벨키오르의 반려가 되고 싶다는 바람.

그가 자신에게만 곁을 내어 주고 다정하게 대해 주는 걸 보고 은새는 그런 희망을 품었었다.

그런데 동족과 함께 있는 벨키오르의 모습을 보니 그게 얼마나 턱없는 욕심이었는지 깨달았다.

‘벨키오르 님은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계실까.’

조심스럽게 어루만지는 손길, 소중한 것을 바라보는 눈빛.

그리고 때때로 제게 하는 입맞춤.

그런 걸 보면 벨키오르도 자신에게 마음이 있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둘 사이에는 종족이라는 커다란 벽이 있었다.

벨키오르가 언급한 적 있듯이 드래곤은 긴 생을 살아가기에 종종 ‘유희’를 떠난다고 했다.

유희란, 꿈에서 깨어나면 덧없이 사라질 환상 같은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자신은 그에게 유희의 대상인가?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해.’

그동안은 차마 묻기 무서워서, 조금만 더 이 달콤한 시간을 유예하고 싶어서 질문을 미뤄 왔다.

하지만 이대로는 안 된다는 걸 은새도 인정했다.

그런데.

‘나는 드래곤인 벨키오르 님을 받아들일 수 있나?’

여태 벨키오르가 인간인 자신을 어떻게 여길지에 대해서만 고민했지, 자신이 드래곤인 벨키오르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았다.

은새는 곰곰이 생각해 봤다. 자신은 벨키오르가 드래곤이어도 상관없나?

혹시 드래곤이기 때문에 좋아하는 건가?

‘그건 확실히 아니야.’

은새는 단호히 부정했다.

그런 이유로 좋아했다면 첫 만남에서부터 끌렸을 것이다.

은새가 벨키오르를 좋아하기 시작한 건 그와 함께한 시간이 쌓이고 그의 자상한 면모를 발견하면서부터였다.

종족은 벨키오르를 나타내는 한 요소일 뿐이지, 전부가 아니었다.

‘나는 벨키오르 님이 드래곤이어도 좋아.’

생각을 정리한 은새가 고개를 들었을 때였다.

“어……?”

예상치 못한 광경에 은새의 눈이 커졌다.

아케이아가 벨키오르의 품에 안겨 있었다.

‘왜, 왜…… 어째서?’

은새는 큰 충격을 받았다.

지금까지 자신이 한 고민은 뭐지?

왜 벨키오르 님이 아케이아 님과…….

짧은 포옹을 마친 두 드래곤은 대화를 나눴다.

그 모습이 꼭 헤어짐을 아쉬워하는 연인처럼 보여서 은새는 생각을 이어 갈 수 없었다.

이는 순전히 은새의 눈에만 그렇게 보이는 것이었으나 정정해 줄 당사자들이 한 명은 꿍꿍이가 있었고 다른 한 명은 아직 이를 모르는 상태였다.

돌아온 벨키오르는 언짢기 그지없는 표정이었지만 패닉에 빠진 은새는 눈치채지 못했다.

“은새, 신역으로 돌아가지.”

“네…….”

젊음의 샘에서 나와 신역에 도착하고 나서도 은새의 머릿속에는 아까 전 보았던 광경만 맴돌았다.

“뉴나! 다녀오셔써요~”

“응. 우리 별이…….”

습관처럼 별이를 안아 든 은새는 상념이 뒤엉켜서 뒷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의 반응이 이상하다고 느낀 별이가 머리를 기우뚱했다.

“뉴나?”

“아. 별이야, 별일 없었어? 간식은 먹었고?”

“네! 칭구들이랑 다 가치 나눠 먹었어요~”

“잘했네.”

“히히.”

별이와 대화를 나누는데도 정신이 딴 데 가 있는 은새에게 벨키오르가 우려스럽게 질문했다.

“피곤한가?”

“아니요…….”

은새가 벨키오르를 빤히 쳐다봤다.

무슨 말을 할 것처럼 입을 달싹이다가 겨우 내뱉는 말이라고는 ‘아니’라는 말뿐이었다.

은새는 당장이라도 벨키오르에게 아케이아와 무슨 사이인지 묻고 싶었다.

그러나 여기서 할 말이 아니라는 판단하에 꾹 내리눌렀다.

적어도 아이가 보지 않는 데에서…….

벨키오르가 모르는 사이 파란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만 원래 세계로 돌아가는 게 좋겠군. 아무래도 세계를 넘어오느라 무리한 것 같으니.”

“그건 아니지만 좋아요.”

[가는 거니? 항상 금방 헤어지게 돼서 아쉽구나.]

위그드라실이 안타까운 목소리를 냈다.

눈썹을 늘어뜨린 은새가 미안해했다.

“죄송해요. 다음에 오면 꼭 오래 있다가 갈게요, 세계수 님.”

자신이 다시 이 세계에 오게 된다면 말이다.

벨키오르와의 관계가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지금, 은새는 어떤 것도 장담할 수 없었다.

“얘들아, 이만 가자.”

까악, 까악!

쉬익.

듀와 뒤엉켜서 놀던 황새와 백합이가 돌아가자는 말에 냉큼 몸을 일으켰다.

“봄이야! 이제 집에 갈 시간이야!”

삐이이.

봄이는 신역에서 보낸 시간이 퍽 즐거웠던 듯 구슬피 울었다.

위그드라실의 기운을 충만히 흡수한 봄이는 어느 때보다 기운이 넘쳤다.

은새가 거듭해서 부르자 봄이가 포르르 날아와 벨키오르의 품에 안착했다.

이곳이 너무나 마음에 들었지만 봄이는 밤이 되면 집에 가야 한다는 걸 배워서 잘 알고 있었다.

또한 밖에서 오래 놀면 은새가 걱정한다는 사실도.

떠날 준비하는 이들을 보고 듀가 시무룩해했다.

이제 막 친해졌는데 바로 헤어져야 한다니 듀는 쓸쓸한 기분이 들었다.

“…….”

그 모습을 보고 안쓰러운 마음이 든 은새가 몸을 숙여 풀밭에 무릎을 대고 다정히 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듀. 다음에 또 오면 오늘처럼 마수들과 놀아 주겠니?”

[……물론이에요! 안녕히 가세요, 반려님! 너희들도 잘 가! 주인님, 위그드라실 님과 신역을 제가 잘 지키고 있을게요!]

다음을 기약하는 말에 듀의 표정이 확 개었다.

영원한 이별이 아닌 잠깐의 헤어짐이었다.

듀는 다음에는 후계자님이 또 어떤 재미있는 놀이를 알려 주실까, 하고 기대했다.

집으로 돌아온 은새는 타이밍을 쟀다.

아케이아에게 다녀온 뒤로 그녀의 낌새가 어딘가 이상하다고 느낀 벨키오르가 몇 번이고 이유를 물었으나 그때마다 은새는 두루뭉술하게 대답하거나 대답을 회피했다.

그러던 어느 비 오는 날 저녁.

그날따라 은새는 기분이 푹 가라앉아 있었다.

항상 밝고 긍정적인 그녀라도 유난히 지치고 힘든 날이 있는 법이었다.

별이와 마수들 앞에서는 내색하지 않으려고 했으나 은새의 감정 변화에 예민한 그들은 안절부절못했다.

그에 은새가 자신은 못난 보호자라고 자책하고 차라리 일찍 잠자리에 드는 척을 했다.

평소보다 이르게 불이 꺼진 집.

집 안에서 지내는 마수들과 별이가 잠들었을 거라고 판단한 은새가 슬그머니 방에서 나왔다.

역시나 자지 않고 있던 벨키오르가 간접등이 켜진 거실에서 말을 걸어왔다.

“은새, 요즘 무리하는 것 같군.”

“제가요? 무리하는 거 아닌데. 매년 하던 일인데요.”

저쪽 세계에 다녀오고 며칠 동안 은새는 겨울 준비를 한다는 명목으로 바쁘게 집 보수를 진행했다.

잡념을 몰아내고 생각을 정리할 목적이었다.

멍하게 있으면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만큼 즉시 떠오르는 장면이 있어서 더욱 몸을 부단히 움직였다.

당연히 벨키오르가 나섰으나 은새는 이를 거절했다.

그동안 그의 마법으로 너무 편하게만 지낸 것 같아 반성했다.

가족들이 떠난 뒤 줄곧 모든 일을 스스로 해 왔던 은새는 자신이 벨키오르에게 너무 의존한 게 아닌가, 라는 생각을 했다.

은새가 안 볼 때 벨키오르가 마법으로 해치우기도 했지만 이내 그녀가 다른 일을 찾아서 하는 걸 보고 그만두었다.

그저 깊은 눈으로 지켜볼 따름이었다.

은새가 왜 갑자기 저러는지 고민하면서.

“안 주무세요? 저는 바깥바람 좀 쐬고 오려고요.”

“차림이 너무 가볍군.”

드레스룸으로 들어간 벨키오르가 은새의 겉옷을 챙겨 나왔다.

은새는 거절하려다가 어린애도 아니고 괜한 고집을 부리는 것 같아서 느릿느릿 팔을 꿰어 코트를 입었다.

하지만 아랫입술이 툭 튀어나왔다.

뭔가 못마땅한 일이 있을 때 그녀가 종종 보이곤 하는 버릇이었다.

우산을 챙긴 은새가 현관문을 나서자 당연하다는 듯이 벨키오르가 뒤따랐다.

그녀는 그를 의식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묵묵히 걸었다.

그런데 벨키오르가 비를 그대로 맞는 걸 보니 자꾸 거기에 신경이 쏠렸다.

주변에 듣는 귀가 없다는 걸 확인한 벨키오르가 입을 열었다.

“무슨 고민이 있나?”

“…….”

“혼자 끌어안고 있지 말고 말해 보도록. 인간사에 관한 건 어렵지만, 다른 것이라면 내가 적어도 조언 정도는 해 줄 수 있을 테니.”

고민의 당사자가 그리 얘기하니 은새는 울컥했다.

종일 쌓였던 정신적 피로감과 울분이 터져 나오려 하고 있었다.

“벨키오르 님은…….”

은새가 막 말문을 열려는데 벨키오르가 손을 뻗었다.

그녀의 뺨에 손을 가져다 대려던 그는 빗물에 손이 젖은 걸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순식간에 마법으로 건조시킨 뒤 벨키오르는 천천히 은새의 얼굴을 매만졌다.

말해 보라는 듯, 서러워하는 은새를 다정한 손길로 달랬다.

기어코 은새의 검은 눈동자에 눈물이 한가득 차올랐다.

“제게 왜 이러시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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