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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키운 마수가 드래곤을 물고 왔다 (134)화 (134/190)

133화 - 길을 잃게 하지 마

짙은 운무 때문에 호수가 한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하지만 웅장하고 운치 있는 풍광이었다.

그야말로 드래곤의 레어가 있을 법한 곳.

은새는 입을 동그랗게 벌리고 감탄했다.

“‘젊음의 샘’이다.”

“샘? 샘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크지 않아요?”

그녀는 시선을 옮겨 먼 곳을 쳐다봤다.

“꼭 전설에서 나올 것 같은 이름이네요.”

은새는 웃어넘겼으나 이 호수에는 실제로 그러한 효능이 있었다.

그래서 탐욕스러운 인간들의 접근을 막기 위해 드래곤이 지키고 있는 것이었고.

주변을 돌아보던 은새가 질문했다.

“그런데 아케이아 님의 레어는 어디에 있어요?”

“이 호수 아래에.”

“네? 설마, 물속에 들어가야 해요?”

은새가 당혹스러워했다.

수영을 할 줄 모르는 건 아니었으나 하도 깊어 아득하게만 보이는 물속으로 들어가는 게 조금 꺼려졌다.

뭔가가 도사리고 있을 것 같다고 할까.

그런 은새의 심경을 알아챈 벨키오르는 기꺼이 그녀의 등과 오금을 받쳐 안아 들었다.

붕 떠오르는 느낌에 은새가 깜짝 놀랐다.

“어!”

“금방이니 눈을 감고 있어라.”

“음…… 네.”

잠시 망설이던 은새는 벨키오르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그를 꼭 껴안았다.

설마 위험하지는 않겠지만 든든한 팔이 받쳐 주고 있으니 아무렴 어떤 일이 생기더라도 괜찮을 것 같았다.

벨키오르는 이제 들어갈 거라는 신호를 주듯 은새의 등을 토닥이고 호수 아래로 뛰어내렸다.

첨벙!

뽀르르 하고 공기 방울이 위로 솟구쳤다.

질끈 감았던 눈을 조심스럽게 뜬 은새는 검푸른 물속을 넋을 놓고 바라봤다.

‘아름다워…….’

아케이아의 레어까지는 금방이었다.

땅 위로 올라선 벨키오르는 젖어서 얼굴에 달라붙은 은새의 검은 머리칼을 쓸어 넘겨주고 마법으로 뽀송뽀송하게 말려 주었다.

“고맙습니다.”

“별거 아니다.”

은새는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가 호숫가에 서 있는 누군가를 발견했다.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새하얀 머리카락과 눈.

그리고 하늘하늘한 차림새와 세로로 샐쭉 가늘어진 동공.

‘벨키오르 님과 같은 존재다.’

은새는 본능적으로 눈앞의 인물이 드래곤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하지만 벨키오르나 산체스와는 다른, 범접할 수 없는 기묘한 분위기를 감지했다.

이곳에 있으나 없는 것 같은, 자신들이 있는 곳과 저곳이 유리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녀가 놀라서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으니 그쪽에서 먼저 입을 열었다.

“어서 와, 벨키오르. ……그리고 인간 손님.”

“마중 나와 있었군. 이쪽은 은새다. 그딴 호칭으로 부르지 마라.”

벨키오르가 단호히 경고했다.

어차피 은새가 누구인지 다 알고 있을 거면서 가탈을 부리는 아케이아가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아케이아는 알 수 없는 눈빛으로 벨키오르와 은새를 바라보다가 사붓이 몸을 돌렸다.

“들어와. 묻고 싶은 게 있는 거지?”

쭈뼛쭈뼛 아케이아의 뒤를 따르면서 은새는 벨키오르에게 작게 속삭였다.

“그런 식으로 말하셔도 돼요?”

“아무 문제 없다.”

은새는 동족 앞에서 인간인 자신의 역성을 드는 벨키오르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하지만 그로 인해 그와 아케이아의 사이가 틀어질까 봐 걱정되었다.

레어는 소담하게 꾸며져 있었다.

넓지도 좁지도 않고, 꼭 필요한 것들로만 채워져 있었다.

인간 식으로 말하자면 생활감이 느껴졌다.

은새가 많은 드래곤을 만나 본 것은 아니지만 레어에서 각자의 개성이 드러나 신기했다.

“저…… 안녕하세요, 아케이아 님. 유은새라고 합니다. 인사가 늦었어요.”

은새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진즉 인사했어야 했는데 타이밍을 놓쳐서 이제야 자기소개를 하게 되었다.

아케이아가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는 두 사람을 테이블로 안내했다.

“앉아.”

“네!”

은새는 빠릿빠릿 움직여 그녀가 가리킨 곳에 앉았다.

아케이아는 가냘픈 외관이었으나 이상하게 박력이 느껴졌다.

두 사람을 자리에 앉힌 뒤 아케이아는 차를 준비했다.

달그락달그락 다기 부딪치는 소리만 들렸다.

잠시 기다리니 잎이 띄워진 투명한 빛깔의 차가 은새와 벨키오르 앞에 놓였다.

코끝을 맴도는 그윽한 향기에 은새는 약차를 대접해 주던 산체스가 떠올랐다.

‘손님이 오면 마실 걸 내어 주는 건 인간이나 드래곤이나 똑같구나.’

은새는 조심스럽게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색이 투명해서 아무 맛도 안 날 줄 알았는데 산뜻하니 새콤달콤한 맛이 입안에 퍼졌다.

은새는 몰랐지만 드래곤이 내어 주는 차들은 흔히 ‘영약’이라고 불리는 것들이었다.

아무렴 지고한 그들이 아무거나 마실까.

벨키오르는 차를 거리낌 없이 잘 마시는 은새를 흡족하게 바라봤다.

잔을 내려놓은 아케이아가 서두를 열었다.

“내게 용건이 있는 건 그대지?”

“네. 어떻게 아셨어요?”

“벨키오르가 그대를 데려왔으니까.”

아.

은새가 머쓱하게 웃었다.

그렇지, 벨키오르 님이 볼일이 있었으면 혼자 왔겠지.

“그럼 혹시 제가 무엇 때문에 왔는지 아세요……?”

“아니. 그러니 말해 주면 좋겠어. 원래라면 내게 진리를 청하는 대가를 지불해야 하지만.”

“대가요?”

예상치 못한 말에 은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맞다, 드래곤에게는 오직 정당한 거래만 있을 뿐이라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벨키오르가 대신 대가를 치를 테니 그대는 원하는 것을 얻어 가도록 해.”

“벨키오르 님이요? 아니, 그 정도로 궁금한 건 아닌데. 저기, 벨키오르 님…….”

“은새. 그대는 아무 생각 하지 말고 하고 싶었던 질문을 해라.”

여기까지 오게 한 것은 미안하지만 자신은 괜찮다고 말하려는 은새의 말을 끊고 벨키오르가 대답했다.

은새가 침음을 삼켰다.

끄응…….

이대로 돌아가자고 해도 움직일 것 같지 않아 은새는 고심했다.

‘대가가 무엇이든, 나중에 반드시 갚아 드려야지.’

결국 질문을 하는 쪽으로 마음이 기운 은새가 입을 뗐다.

“제가 신경 쓰이는 말을 들었어요. 미래가 끊어졌다는, 산 것이 아닌 인간이라고요. 이게 예전에 걸렸던 저주 때문이 아닌가 해서…….”

“산 것이 아닌 인간이라.”

아케이아가 은새를 빤히 쳐다봤다.

새하얀 눈동자가 자신을 직시하자 은새가 요리조리 시선을 피했다.

왠지 똑바로 바라보기 어려웠다.

“신탁을 듣는 내게도 그대의 미래에 관한 건 들리지 않아.”

“네?”

“하지만 ‘산 것이 아닌 인간’이라는 말은 틀렸어. 그대는 결코 무너지지 않는 단단한 땅에 발을 딛고 서 누구보다 환하게 빛나고 있으니.”

“그게 무슨…….”

은새가 눈을 깜빡였다.

아케이아의 단호한 부정은 은새를 안도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미래가 안 들린다는 건 무슨 뜻이지?

그건 자신이 다른 세계의 사람이라서?

그럼 내가 이곳에 올 거라는 건 어떻게 알았지.

아케이아가 말을 이었다.

“미래가 없다는 건 정해진 운명을 벗어났다는 뜻. 그대는 스스로 길을 개척하고, 나아가는 존재야. 아마도 그 말을 한 자는 끊어진 단면만 보고 그런 얘기를 한 것이겠지.”

“잘 모르겠어요. 다른 사람들도 그런가요?”

“이런 경우는 극히 드물어. 보통 죽음을 맞이했다가 되살아나거나, 혹은 신의 눈에 띄어 승천했을 때.”

그리고 아케이아가 파악하기로 은새는 벨키오르의 개입으로 인해 운명이 크게 뒤틀렸기 때문으로 보였다.

드래곤은 신은 아니나 세계의 균형을 지탱하고 자연을 관장하는 존재.

그런 존재의 반려가 되었으니 일반적인 삶은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아케이아는 이 사실을 의도적으로 숨겼다.

수천 년 만에 반려를 찾아낸 벨키오르 앞에서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말을 꺼냈다가 혹 두 사람의 관계에 균열이라도 생기면 그 원망을 어떻게 다 감당할까.

“제게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면 다행이에요. 제가 그 말을 신경 썼던 이유는…….”

평소라면 마수의 허황된 말 따위 그냥 흘려 넘겼을 것이다.

하지만 별이를 키우고, 벨키오르를 만나면서 이 생에 욕심이 나서.

미래가 끊어졌다는 건 통상적으로 생각해 봤을 때 수명이 다했다는 뜻 아닌가.

그래서 확답이 필요했다.

벨키오르와 아케이아 덕분에 상관없다는 걸 알게 됐으니 은새는 후련해졌다.

“궁금증은 풀렸니?”

“네. 정말 감사해요.”

아케이아는 찻잔을 매만지는 은새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벨키오르가 그녀를 반려로 맞이한 건 명확하건만 은새는 모호했다.

벨키오르에게 마음이 없지는 않은 것 같은데 상념이 실타래처럼 뒤엉켜서 매듭이 지어지지 않았다.

흐음.

두 사람이 떠나기 전 아케이아가 벨키오르만 따로 불렀다.

이대로라면 반려를 찾고도 독거 드래곤 신세를 면하지 못할 벨키오르를 위해 약간의 도움을 주기로 했다.

은새의 시야가 닿는 곳에서 아케이아는 나긋하게 속삭였다.

“저 아이의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은 삶에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할 이정표는 너야, 벨키오르.”

“…….”

“길을 잃게 하지 마. 길을 잃은 자의 말로가 어떤지는 너도 잘 알겠지.”

“말 안 해도 그렇게 할 거다.”

“그리고…….”

아케이아가 거리를 확 좁혀 벨키오르의 목깃을 매만졌다.

뒤에서 보면 껴안은 것처럼 보이도록.

아무 이유 없이 간격을 좁힐 아케이아가 아니라서 굳이 쳐 내지는 않았으나 벨키오르는 불쾌한 내색을 감추지 않았다.

여전히 그는 은새가 아닌 이들과의 접촉은 거슬리기만 했다.

“뭐 하는 짓이지?”

“얼룩이 묻었길래.”

물러나는 아케이아의 시선이 흘긋 은새 쪽을 향했다.

그녀는 이쪽을 보며 어딘가 충격받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할 일을 마쳤다는 듯 아케이아가 산뜻하게 그들을 배웅했다.

“잘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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