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 별이 그렇게 하길 원했다
아름다운 숲과 어우러진 고풍스러운 성.
아름드리나무에 둘러싸여 우뚝 솟은 성은 평화로운 분위기 속에서 고즈넉한 멋이 있었다.
산체스의 동굴 같은 레어를 생각했던 은새는 당연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사슴과 새, 토끼 같은 숲속 동물들이 성 주변에서 마음 편히 쉬었다 가는 게 보였다.
꼭 저 위에서 동화 속 공주님이 나와 인사를 할 것 같았다.
“들어가지.”
“와아…….”
벨키오르의 손에 이끌려 은새는 성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연신 감탄을 쏟아 내며 구경하기 바빴다.
성의 크기가 큰 만큼 관리해 주는 사람을 두어야 할 텐데 드래곤의 레어라서 그런지 비운 지 오래됐어도 그저 깨끗하기만 했다.
하지만 휑한 느낌이라든가, 빈집 특유의 싸늘한 느낌은 들지 않았다.
벽에 걸린 커다란 화폭에 담긴 그림을 감상하던 은새가 눈동자를 빛내며 벨키오르를 올려다보았다.
“안도 너무 예뻐요. 유럽에 갔을 때 이런 곳에서 묵은 적이 있었는데, 그곳과 비교가 안 돼요. 꼭 동화 속 공주님이 사는 성 같아요.”
자신이 한 말이 웃겼는지 은새가 아하하, 하고 맑은 웃음을 터트렸다.
“드래곤이 사는 성이니 딱히 틀린 말도 아닌가요?”
드래곤과 공주.
그리고 공주를 구하러 온 용사.
그런 게 생각나 은새는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 옆에 있는 드래곤은 공주를 납치하지도, 고작 인간 용사 따위에 지지도 않을 것이다.
“별이 1차 각성을 끝냈을 때 이곳에서 머물렀었다.”
“그럼 별이 방도 있어요? 보고 싶어요!”
은새가 재촉하자 벨키오르는 두말하지 않고 그녀를 위층으로 데려갔다.
계단을 오르면서 은새는 궁금했던 걸 질문했다.
“별이 2차 각성은 언제 해요? 1차 각성 때처럼 갑자기 쑥 크나요?”
그러고 보니 별이는 1차 각성을 한 이후 자라는 걸 보지 못했다.
발음은 점점 정확해지는데 키나 몸무게가 느는 것 같지는 않았다.
여전히 작고 귀여운 아기 드래곤의 모습이었다.
“2차 각성은 500년에서 800년 사이에 이뤄질 것이다. 지금도 성장을 안 하는 건 아니니, 다만 느릴 뿐이지. 저러다가 계기가 생기면 갑자기 자라기도 한다.”
“아…….”
벨키오르의 입에서 까마득한 기간이 나오자 은새는 할 말을 잃었다.
새삼 별이가 자신과 다른 시간을 사는 존재라는 게 와닿았다.
‘내가 살아 있을 때 별이가 다 자란 걸 보는 건 무리겠지……. 아쉽다.’
앞으로 얼마나 더 별이와 함께할 수 있을까.
50년? 정말 힘내서 70년 정도?
일반인에 비해 사망률이 높은 헌터이기에 그마저도 장담할 수 없었다.
500년이라는 세월에 비하면 턱없이 짧다.
‘……별이가 옆에 있는 동안 최선을 다해야지!’
은새는 부러 밝은 낯을 했다.
“그런데 계기라니요?”
“정신적인 충격을 받거나 진리에 가까운 깨달음을 얻었을 때. 혹은 진귀한 영약을 섭취했을 때. 하지만 정신적인 성숙이 먼저이니 2차 각성이 빠르다고 좋은 것은 아니다.”
“그렇군요.”
벨키오르가 장엄하게 세공된 방문 앞에 섰다.
“이곳이 별이 머물렀던 거처다.”
“와! ……아?”
기대감을 안고 들어선 은새는 더 들어가지 못하고 입구 근처에서 멈추어 섰다.
그녀의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
막연하게 생각하기로 벨키오르의 레어에 있는 별이의 방은 아이 방답지 않게 삭막하거나, 그래도 처음 만났을 때에 비해 벨키오르가 많이 달라진 만큼 서툴긴 해도 나름 아이 방같이 꾸며 줬을 거라고 예상했다.
그리고 막상 마주한 별이의 방 풍경은 엄밀히 따지면 후자이기는 했다.
그런데.
“벨키오르 님, 이거 저희 집에 있는 담요 아니에요?”
은새가 침대 위에 반듯하게 개켜진 노란색 병아리 담요를 들어 올렸다.
이건 별이가 아기 때 덮었던 것으로, 부드러운 촉감을 좋아해서 세탁하려고 해도 별이가 손에서 잘 놓지 않으려고 했던 담요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모빌이나 딸랑이, 젖병, 목마, 그리고 블록 같은 것들이 눈에 띄었다.
방 한구석에는 은새네 집 거실에 있는 탁자와 소파, 벽걸이 시계도 보였다.
과거에 솔이 선물했던 해외 예술가의 난해한 조각상도 있었다.
처치 곤란해서 그냥 한쪽 벽에 세워 뒀었는데 그걸 여기서 또 볼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아기였던 별이가 볼 수 있었던 풍경.
그리고 지금은 이세계에 있는 별이의 방을 채운 것들이었다.
“별이 그렇게 하길 원했다.”
“우리 별이 이곳에 있을 때도 내 생각 했구나…….”
은새는 감동받은 눈빛으로 사용감이 없는 분홍색 목마를 조심스럽게 쓸었다.
가끔 가다 별이가 주는 무한한 애정을 깨달을 때면 가슴이 벅차올라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겠다.
과연 이러한 애정을 내가 받아도 될지, 나는 별이에게 잘하고 있는지.
한동안 별이의 방에서 머문 은새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벨키오르를 따라나섰다.
이 방이 별이가 좋아하는 것들로 가득 차길 바라면서.
성을 한참을 돌아보고 1층 홀로 돌아왔을 때 은새는 상기된 얼굴이었다.
대단히 만족스러운 시간이었다.
“벨키오르 님의 부모님…… 그러니까 선대 드래곤님도 여기서 지내신 건가요?”
“아니다. 레어의 위치는 같지만 보통 세대교체가 이루어지면 자기식대로 꾸미기 마련이다.”
“그러니까 이 레어는 온전히 벨키오르 님의 손길이 닿은 곳이란 말이죠? 그래서 그런지 더 정감이 가는 것 같아요.”
배시시 웃는 그녀를 내려다보던 벨키오르가 툭, 제안했다.
“이 성이 마음에 든다면 여기에 그대의 거처를 마련해 주겠다. 원하는 대로 꾸며도 좋아.”
사실 이는 벨키오르의 바람이었다.
반려로 맞이한 은새가 자신의 레어에서 지낸다는 상상만으로 벨키오르는 내심 기분이 좋아졌다.
그가 지키는 땅에서 그녀와 함께 평화롭게 하루하루를 보내는 상상.
파격적인 제안에 당황한 은새가 빠르게 손을 내저었다.
“네?! 아, 아니요……. 그러실 필요는. 저는 이 세계에 올 일도 거의 없는데요.”
너무 단칼에 거절한 듯해 은새가 그의 눈치를 봤다.
“음. 제 방이 생기면 벨키오르 님이 신경 쓰셔야 할 게 느니까, 저는 괜찮아요. 다음에 이곳에서 머물 일이 생기면 그때 생각해 봐요.”
벨키오르는 그녀의 거절을 여상하게 받아들였다.
그저 아직은 부담스러운 건가, 라고 생각할 뿐이었다.
뭣보다 은새가 말한 ‘그날’이 오래 걸리지 않으리라는 직감이 들었다.
“아! 내 정신 좀 봐. 이제 그만 아케이아 님에게 가요. 저희가 오늘 갈 거라는 걸 알고 계시면 기다리실지도 몰라요.”
“그대가 신경 쓸 일이 아니다. 드래곤에게 남는 건 시간뿐이니.”
“그래도요.”
은새가 벨키오르의 너른 등을 꾹꾹 밀었다.
그는 그녀가 미는 대로 밀려 주며 생각했다.
아케이아가 기다리고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은새의 의문을 풀어 주기 위해서 가기는 해야 한다고.
은새와 벨키오르는 위그드라실이 있는 장소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보게 된 광경은.
삐로롯!
삐삐!
아직도 위그드라실의 가지에서 내려오지 않은 봄이가 작은 동물 친구들과 함께 신나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또.
아까까지만 해도 낯을 심하게 가리던 듀가 별이, 마수들과 즐거이 어울려 노는 모습이었다.
[후계자님, 아무리 생각해도 마법은 반칙이에요!]
몇 번이나 술래잡기에서 패배한 듀가 낑낑거리며 별이에게 항의했다.
“웅? 하지만 뉴나네 집에서 항상 이러케 노는걸.”
[……저 마수들이 후계자님의 마법을 간파한다고요?]
“항상 백합이가 제일 먼저 나를 찾아. 그치, 백합아?”
쉭쉭.
백합이는 머리를 쳐들고 맞다고 긍정했다.
사실 맨날 숨는 데에만 숨어서 그런 것인 줄도 모르고 별이는 누나의 마수들이 얼마나 똑똑한지 칭찬했다.
듀는 충격받았다. 위대한 드래곤의 수족인 자신이 저 하얀 보석뱀보다 실력이 떨어진다고?
“괜차나, 듀. 연습하면 잘할 쑤 있어.”
[오늘부터 특훈이에요! 술래잡기에서 반드시 후계자님을 찾아내고야 말겠어요!]
까악, 깍!
이 내가 도와주지!
황새가 기고만장하게 나섰다.
듀는 황새의 허황된 말들을 진지하게 경청했다.
“그 잠깐 새 친해졌나 봐요.”
“듀가 기운을 차렸군. 개인적인 일이 있어서 한동안 처져 있었다.”
“그래요? 다행이에요, 벨키오르 님의 걱정을 덜어서.”
걱정?
벨키오르는 머리를 기울였다.
자신이 듀를 걱정했다고?
애매한 눈빛을 한 벨키오르를 뒤로하고 은새가 별이와 마수들 앞에 나섰다.
“얘들아. 잘 놀고 있었어?”
“뉴나! 아빠! 칭구들이랑 술래잡기했어요!”
“으챠, 별이 또 나무 밑 구덩이 같은 데에 숨었구나? 무릎이 더러워졌네.”
“히히.”
별이는 마법으로 금방 깨끗하게 만들 수 있었으나 은새가 흙을 털어 주는 손길이 좋아서 얌전히 안겨 웃었다.
“이제 누나랑 아빠는 아케이아 님한테 다녀올 거야. 별이, 같이 갈래? 아니면 마수들이랑 여기서 더 놀래?”
“음……. 나 칭구들이랑 더 놀래요! 안녕히 다녀오세요오.”
별이가 은새에게 안긴 채로 배꼽 인사를 했다.
하마터면 떨어질 뻔한 것을 은새가 놀라운 균형 신경으로 잘 지탱하며 별이의 머리에 뽀뽀를 해 줬다.
“응. 금방 다녀올 테니까 배고프면 챙겨 온 간식 친구들이랑 같이 나눠 먹고.”
“네!”
“세계수 님, 별이와 마수들을 잘 부탁드려요.”
[걱정 말고 다녀오렴.]
벨키오르가 내민 손을 잡고 은새는 마법에 몸을 실었다.
“이곳은…….”
금빛 마력이 걷히고 보이는 건 어둑어둑한 하늘과 운무가 낀 거대한 호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