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 안녕하세요, 주인님의 반려님!
이번에는 별이와 봄이뿐만 아니라 황새와 백합이도 함께 가기로 했다.
봄이는 어려서 혼자 둘 수 없었고, 백합이는 은새를 따라 저쪽 세계에 가 본 경험이 있어서 나들이 삼아 데려가기로 했다.
그리고 황새는 백합이가 간다고 하니 저도 따라가겠다고 나섰다.
“얘들아, 집 잘 보고 있어. 금방 다녀올게.”
세계수 분목 앞에서 은새는 황새와 백합이를 안아 들고 남아 있을 마수들에게 인사했다.
꾸우, 꾸!
크러앙.
푸르릉.
“그래, 알겠어. 내 걱정은 하지 말고 밥 잘 챙겨 먹어야 해?”
다 같이 갈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러지 못하는 게 아쉬웠다.
별이와 봄이를 챙긴 벨키오르가 마법을 펼쳤다.
마력의 흐름에 몸을 맡기자 한순간 풍경이 바뀌었고 은새가 잠시 휘청했다.
이전처럼 정신을 잃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세계를 넘는 건 여전히 몸에 부담이 되었다.
‘이런데도 벨키오르 님은 양쪽 세계를 오가시는구나. 어라, 그런데 이런 것도 적응이 되나?’
벨키오르가 꾸준히 은새에게 제 마력을 나눠 줬기 때문에 기절하지 않은 것이라는 걸 모르고 은새는 머리를 갸웃했다.
“괜찮은가?”
“네……. 안녕하세요, 세계수 님.”
[안녕. 은새, 또 방문해 줬구나. 아기도 안녕.]
“별이에요! 안뇽하세요.”
별이가 또랑또랑하게 은새에게 받은 제 이름을 알리며 배꼽 인사를 했다.
그에 세계수가 나직한 웃음을 터트렸다.
[예절 교육을 아주 잘 받았구나. 같이 온 아이들은 친구들이니?]
“네! 봄이, 황새, 백합이에요! 같이 살아요.”
삐삐!
봄이가 신엄한 기운을 내뿜는 거대한 세계수를 보고 흥분해서 주위를 빙글빙글 날아다녔다.
세계수 분목의 힘을 받아 태어났기에 그 근원인 위그드라실에 반응하는 것이었다.
그게 아니어도 호기심 왕성한 봄이는 위그드라실에 관심을 보였겠지만.
아주 높은 가지에 올라앉아 삐삐 우는 봄이에게 ‘어디 가면 안 돼, 여기 있어야 해!’라고 외치는 은새의 머릿속으로 위그드라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둘 사이에 진전은 있었니?]
“네?”
“허튼소리.”
벨키오르와 위그드라실이 나눴던 대화를 모르는 은새는 눈을 깜빡였고, 벨키오르는 정색을 하고 위그드라실의 말을 칼같이 잘랐다.
[흐음. 듣지 않아도 알 것 같구나. 잘된 일이야.]
“어…….”
은새가 의아하다는 시선을 보냈으나 벨키오르는 입을 굳게 다문 채 세계수를 노려볼 뿐이었다.
은새와의 관계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위그드라실의 말속에서 놀리는 기색을 알아채지 못할 그가 아니었다.
신역을 돌아보는 은새의 시야에 무언가 들어왔다.
“벨키오르 님, 저 마수는……?”
“듀. 이리 와라.”
멀리서 이쪽을 바라보며 눈을 댕그랗게 뜨고 있던 가고일이 벨키오르의 부름에 부리나케 달려왔다.
듀는 벨키오르의 뒤에 숨어 은새와 마수들을 신기하게 바라봤다.
하지만 워낙 덩치가 커다래서 다 숨겨지지 않았다.
까악!
친화력 갑인 황새가 먼저 듀에게 다가가 친한 척을 해 댔다.
[뭐, 뭐야! 쪼끄만 게, 겁도 없이!]
황새에 더해, 어느새 발치까지 기어 온 백합이를 밟을세라 듀가 펄쩍 뛰었다.
집에서 다른 대형 마수들과 부대끼고 사는 황새와 백합이는 듀를 무서워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듀는 마수치고 잘생겼기에 황새와 백합이가 호감을 갖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말을 하네요?”
“내 수족이다. 나 대신 신역을 지키고 있지. 듀, 인사해라.”
[안녕하세요, 주인님의 반려님!]
듀는 황새와 백합이가 더 다가오지 못하게 그르렁거리다가 벨키오르가 은새를 소개하자 냉큼 인사했다.
말로만 들었던 벨키오르의 반려를 만나게 되어 듀는 뛸 듯이 기쁜 마음이었다.
‘와, 인간! 신역에 인간이 발을 들인 게 얼마 만이지? 이제 우리 주인님도 반려 있어! 놀라지 않게 친절하게 대해 드려야지.’
한편 은새는 듀가 자신을 부른 호칭을 듣고 멈칫했다.
‘반려님이라고……? 그러고 보니 예전에 산체스 님도 나를 그렇게 부르셨지. 뭐를 착각하셨는지는 몰라도.’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내가 벨키오르 님의 반려였으면.
씁쓸함을 감춘 은새가 습관처럼 가고일의 턱을 쓰다듬었다.
능숙한 손길에 듀가 기분 좋은 소리를 냈다.
“안녕. 듀…… 라고 불러도 될까?”
[편한 대로 부르세요! 신역에는 왜 오셨나요? 이제 여기에서 사시는 거예요? 잘 생각하셨어요. 주인님의 레어는 정말 크고 멋져요. 반려님도 마음에 드실 거예요!]
“어, 어? 아닌데. 볼일이 있어서……. 그런데 벨키오르 님의 레어?”
은새가 놀란 눈으로 벨키오르를 돌아보았다.
전에 왔을 때는 신역의 경관에 정신이 팔려 그의 레어를 보지 못했다.
“숲 안쪽에 있다. 보러 가겠나?”
“그래도 돼요?”
“당연하다. 오래 걸리지 않을 테니 들렀다 가지.”
벨키오르는 선뜻 은새를 레어가 있는 방향으로 안내했다.
은새는 기대감을 품고 그를 따라갔다.
그리고 그 자리에 덩그러니 남은 듀와 황새, 백합이, 별이는 멀뚱멀뚱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들은 탐색전을 벌였다.
은새와 벨키오르를 쫓아가지 않은 건 서로에 대한 호기심이 더 강했기 때문이었다.
듀도 아닌 척했으나 신역에 놀러 온 낯선 마수들이 신기했다.
봄이는 위그드라실이 마음에 들었는지 도통 땅으로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깍깍!
황새가 먼저 적극적으로 자기소개를 했다.
마수들은 벨키오르를 이미 가족으로 받아들였기에 그에게 속한 듀도 친구라고 생각했다.
백합이는 하얀 꼬리를 살랑거리며 콩알 같은 까만 눈으로 듀를 올려다보았다.
듀는 마르모르 말고도 서슴없이 다가오는 작은 마수들이 낯설어서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뭐야, 다가오지 마!]
쉭쉭.
다가오지 말라는 경고에도 백합이는 풀밭 위를 빠르게 기어 듀의 다리를 타고 올라 머리에 아예 똬리를 틀어 버렸다.
듀는 얼음 동상이 된 것처럼 굳었다.
[너희…… 내가 누군 줄 알고, 겁도 없이…….]
반려님의 마수들은 겁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드래곤의 수족인 만큼 듀는 강인한 생명체였다.
듀가 실수로 밟거나 장난 친다고 툭 건드리면 꿱 하고 죽어 버릴 나약한 마수들이 왜 이리 두려움을 모르는지.
조심성 많은 듀가 그럴 리는 없지만 아무튼 그러했다.
“듀우. 우리 뉴나랑 아빠 올 때까지 술래잡기할까?”
그때 별이가 방긋방긋 웃으며 듀를 잡아끌었다.
듀는 백합이를 행여 머리에서 떨어뜨릴까 봐 조심조심 끌려갔다.
차라리 황새나 백합이보다 별이를 대하는 게 안심이 됐다.
인간 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어도 별이의 본체는 드래곤.
듀가 아무리 용을 써도 해칠 수 없는 존재였다.
[후계자님, 술래잡기가 뭔가요?]
“알려 줄게. 대신 듀가 술래야!”
[네? 네?]
“우리가 숨을 테니 찾아바! 눈 감고 있다가 ‘다 숨었다!’ 하면 찾으면 돼~”
[후계자님? 어디 가세요, 후계자님!]
별이가 까르르 웃으며 풀밭을 뛰어갔고 황새도 깍깍거리며 날개를 활짝 펴고 날아올랐다.
놀이가 시작되자 스르륵 듀의 머리 위에서 내려온 백합이는 수풀 사이로 사라졌다.
다급해진 듀가 목청 높여 외쳤다.
[후계자님, 후계자님! 멀리 가시면 안 돼요, 곧 주인님과 반려님이 돌아오실 거예요!]
“웅!”
듀는 걱정됐으나 일단 별이가 시킨 대로 눈을 감고 기다렸다.
하지만 감각을 곤두세워 별이와 마수들이 향한 곳을 탐지했다.
신역의 지리는 듀에게 더 익숙했으므로 사실상 결과가 정해진 승부였다.
그런데 별이가 마법을 사용했는지 갑자기 인기척이 사라졌다.
당황한 듀가 감았던 눈을 뜨고 주변을 휙휙 돌아봤다.
그러자 이쪽을 보고 있었는지 어딘가에서 별이가 ‘어, 눈 떴어! 듀, 다 됐다고 할 때까지 눈 뜨는 거 금지야~’ 하고 소리쳤다.
그때 웃음기 가득한 위그드라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재밌어 보이는구나, 듀.]
[후계자님과 마수들이 어디로 갔는지 위그드라실 님은 보셨죠?]
듀가 초조하게 가만히 있지 못하고 엉덩이를 들썩였다.
신역은 넓다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광활했다.
위험하지는 않겠지만 혹시 길을 잃으면 어떡하지?
하지만 위그드라실은 태연했다.
[그걸 알려 주면 놀이가 아니잖니. 모처럼 새로 친구들을 사귀었으니 성심을 다해 놀아 주렴.]
[친구 아니에요! 저들은…… 후계자님과 반려님의 수하들이잖아요. 친구가 될 수 없어요.]
[하지만 저 아이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인데?]
정곡을 찌른 위그드라실의 말에 듀가 움찔하더니 몸을 웅크리고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솔직한 말로 듀도 오랜만에 신이 났다.
죽은 마르모르에게 미안할 만큼.
‘친구가 죽은 지 얼마나 됐다고……. 마르모르가 나를 원망할 거야.’
듀의 생각을 알아챈 것처럼 위그드라실이 가만가만 듀를 다독였다.
[듀, 자책하지 말렴. 네가 슬퍼하지 않는다고 마르모르를 애도하지 않는 건 아니란다.]
[…….]
[마르모르를 추억하는 한 너는 언제까지고 그 아이의 친구란다. 그러니 슬픔은 잠시 내려 두렴.]
[……정말 그럴까요?]
“듀우, 우리 다 숨었다! 이제 찾으러 와!”
깍깍!
황새가 자신만만하게 울었다.
그 바람에 듀는 황새의 위치를 대강 알 수 있었다.
[물론이지. 어서 가렴. 저 아이들이 기다리고 있구나.]
[네!]
듀는 킁킁거리며 별이와 마수들의 흔적을 쫓아갔다.
[오랜만에 신역이 활기를 띠어서 좋아. 다 은새 덕분이구나.]
위그드라실이 은은한 빛을 뿌리며 느릿하게 가지를 흔들었다.
삐빗?
봄이가 똘망똘망한 눈으로 위그드라실을 올려다보았다.
[꽃을 닮은 아이야, 한창 자랄 시기인데 기운이 부족하구나. 내 곁에서 충분히 빛을 쬐렴.]
한편 벨키오르의 레어에 도착한 은새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와, 엄청 멋진 성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