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 SS급이 된 거 발표할까?
은새와 다른 동족들을 절대 만나게 하고 싶지 않았지만 아케이아는 예외였다.
그녀라면 절대 은새에게 쓸데없는 말을 하지도 않을 테고 은새가 가진 의문에 현명한 답을 내어 줄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찾아가면 실례이지 않을까요?”
“아케이아라면 그대와 내가 찾아가리라는 것쯤은 이미 예상하고 있겠지.”
“어떻게요?”
“그녀의 능력은 예지와 관련이 있으니까.”
“와……. 신기해요.”
그가 아케이아를 만나러 가자고 한 게 조금 전이다.
그런데 이미 알고 있을 거라고?
새삼 드래곤은 정말 특별한 능력을 지녔구나, 하고 생각한 은새는 고민하다가 결정을 내렸다.
“그럼 갈래요. 그분을 만나러.”
“그래. 지금 가겠나?”
“바로는 말고요. 며칠만 늦춰도 돼요?”
“그대가 원하는 대로.”
그 후로 며칠 동안 은새는 자신의 마수들에게 온전히 시간을 쏟으며 강원도 집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않았다.
밖에 나가 봤자 톈진 사태에 대한 얘기만 들려오니 궁금하면 티브이를 시청하면 되었다.
게다가 그녀는 본의 아니게 세간의 관심을 받고 있었다.
바로 코순이를 테이밍한 순간에 꺼냈던 각성석 때문이었다.
-은새야, SS급이 된 거 공식 발표할까?
늦은 밤, 아직 일이 끝나지 않았는지 잠기운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우리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마침 은새도 마당에 나와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기에 바로 받았다.
중국에서 봤던 황량한 밤 풍경이 기억이 남아 유독 자주 하늘을 올려다보게 되었다.
늦가을이 되면서 날씨가 쌀쌀해져 벨키오르가 겉옷을 가져다 은새의 어깨에 걸쳐 주었다.
그녀는 눈짓으로 고맙다고 인사하고 핸드폰 너머로 답했다.
“그거 꼭 해야 하나?”
-사람들은 이미 그렇게 믿고 있는 분위기야. 거기다 대고 아니라고 하면 거짓말이 되고, 계속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는 것도 경우가 아닌 것 같아서 말이야.
“각성석의 출처는 어떻게 하려고?”
도천이 가지고 있던 각성석은 정부 소유의 던전에서 발견되었다.
만약 정부가 소유권을 주장하면 일이 복잡해졌다.
-그거 그냥 중국 갔을 때 청화 길드에서 줬다고 하게.
“뭐? 그래도 돼? 유길선 길드장이 가만히 있을까?”
-그쪽 지금 정신없어서 한국 일에는 신경도 못 쓸걸? 중국이 언론 통제 중이라 개인적인 루트로 알아봤는데 거기 지금 난리도 아니래. 톈진 사태를 제대로 무마하기도 전에 대형 길드들이 들고 일어나서.
우리의 설명은 이러했다.
국가 주석이 톈진 사태에 대한 모든 책임을 길드들에게 전가하려고 하자 참아 왔던 분노를 터트리며 대형 길드들이 정면으로 맞서는 바람에 심한 역풍을 맞았다고.
중국은 헌터에 대한 억압이 심한 나라 중 하나였다.
헌터들의 삶이 겉으로는 화려해 보여도 격변의 시대 초기, 이능력자에 의해 도시가 무력 점거되는 일이 벌어졌기에 중국 당국은 헌터를 잠재적 위험 분자로 규정, 이런저런 제약을 두어 통제했다.
시간이 흘러 던전을 공략하기 위해 헌터들과 공생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기본적인 체제는 그대로였다.
-주석의 편에 선 길드도 많아서 거의 전란의 분위기야. 유길선 길드장이 대형 길드들과 연합해서 이끌고 있고. 주석한테 맺힌 게 좀 많았나 봐?
은새는 어쩐지 유길선의 분노가 사영과 관련이 있을 것 같다는 예감을 받았다.
‘사영 헌터는 구했으려나?’
은새가 본 개량된 해주법에는 구하기 어려운 희귀한 재료들도 많았다.
하지만 유길선이라면 어떻게든 구했을 것 같다.
그토록 살리고 싶었던 사람이니 그가 말했던 것처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해냈겠지.
-아무튼 톈진 사태가 완전히 끝나지 않은데다 봉인이 풀린 던전들의 공략도 남았으니 나중에 따지고 들면 그때 가서 해명해도 안 늦어. 근데 안 그럴걸?
은새와 유길선의 거래에 대해 알고 있는 우리는 확신을 가지고 얘기했다.
외부에는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톈진 내에서 식육 모기가 인간 헌터들의 계획하에 무서운 속도로 번식하고 있었다.
가끔 돌발 사태가 벌어질 때도 있었지만 아직까지는 수습이 가능한 수준이었다.
-그래서 은새야, SS급이 된 거 발표할까?
“음……. 사실을 인정하는 게 낫다면 그렇게 하자. 미안해, 하나 있는 각성석을 내가 써 버려서.”
-무슨 그런 말을 해, 은새야. 원래 필요한 사람이 쓰기로 했잖아. 축하해, SS급이 된 거.
은새가 나직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옆에서 벨키오르의 시선이 느껴졌다.
사람이 있는데 계속 통화하는 것도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은새는 전화를 끊으려다가 마지막으로 딱 한 가지만 더 질문했다.
“양설 헌터랑 왕호연 헌터는 어디서 지내?”
-길드 빌딩 근처에 거처를 마련해 줬어. 그런데 은새야, 그 사람들은 왜 데려온 거야? 네게 해를 끼친 자들인데.
양설과 왕호연을 데려온 것은 순전히 은새의 의지였다.
친구들에게 의견을 묻지도 않고 귀국하는 길에 날치기로 데려와 버렸다.
그래 놓고 뒷수습을 맡겨 놓았으니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
“그냥.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사기 사건의 범인이라고 밝힐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도움이 된다는 거야?
“으음. 두 사람의 시너지가 괜찮으니까 어떤 식으로든? 길드에 자리 마련해 줄 수 있어?”
-중국인이라 드러내 놓고 길드원으로 받아들이기는 어렵고 정보부 쪽에 알아볼게. 신뢰가 없어서 큰일을 맡기지는 못하겠지만. 그들이 청화 길드에서 하던 일도 그런 쪽인 것 같고.
“일단 양설 헌터랑 왕호연 헌터한테 물어보고, 하겠다고 하면 자리 마련해 줘. 다른 곳으로 가고 싶다고 하면 그렇게 해 주고.”
-……은새야, 너 그 사람들이랑 중국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은새가 아무 이유 없이 그들을 신경 쓸 리 없다고 생각한 우리가 진지하게 물었다.
은새는 여상스레 대답했다.
“빚진 거 청산하기로 했어.”
분명 양설과 그런 대화를 나눴었다.
‘한국에서 빚진 건 없는 셈 치자’고.
-나는 모르겠다. 그게 용서가 돼?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되겠지. 내가 사람을 제대로 봤는지 아닌지는.”
은새가 통화 시간을 확인했다. 벌써 30분이 넘어가고 있었다.
“알겠어, 우리야. 이만 끊자. 너무 무리하지 말고.”
-응. 잘 자.
“그자와 유독 자주 연락하는군.”
전화를 끊자마자 벨키오르가 말을 건넸다.
“우리요? 아무래도 그런 편이죠. 친구들을 잘 챙겨 주는 성격이에요.”
단순히 그 이유 때문만이 아니라는 걸 눈치챘으면서도 벨키오르는 내색하지 않았다.
우리에 대한 은새의 감정이 담백했기에 그다지 경계할 일도 아니었다.
대신 은새에게 손을 내밀었다.
“잠이 오지 않으면 좀 걷겠나?”
“그럴까요?”
아직 자러 갈 생각이 없던 은새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둘이서 오붓한 시간을 보내기에는 밤중이 최적이었다.
낮에 활발하게 논 별이와 봄이는 쪼쪼의 털에 파묻혀 자고 있었고 다른 마수들도 각자 잠자리에 들었다.
일각수 쿠키만이 다각다각 발소리를 내며 그들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어스름한 등이 켜진 산책로를 걸으며 은새가 재잘거렸다.
“정말 겨울이 머지않았다는 게 느껴져요. 별이는 괜찮은데 봄이가 추위를 많이 타는 편이라 걱정이에요. 한국으로 돌아와서 왠지 잠이 는 것 같지 않아요?”
“날씨와 연관이 있을 수도 있지만 성장할 시기라는 게 영향이 클 거다.”
“애들은 정말 빨리 크는 것 같아요. 사진 많이 찍어 놔야지. 크리스마스에는 뭘 할까요? 아, 크리스마스는 종교 창시자인 예수 그리스도의 성탄을 기념하는 날이에요. 트리 꾸미기는 꼭 해야겠어요. 매년 하는데 마수들의 반응이 좋거든요. 아이들도 무척 좋아할 거예요.”
은새는 트리를 꾸미는 방법에 대해 설명하다가 아이들과 마수들의 선물을 뭘 준비하면 좋을지 고민했다.
크리스마스가 오려면 한 달 이상 남았기에 때 이른 고민이었다.
“은새.”
“네?”
아무 생각 없이 고개를 든 은새는 가까워지는 벨키오르의 얼굴을 보고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이거 그거지? 키…… 스.’
그녀는 소매 아래로 주먹을 꽉 쥐었으나 피하지 않았다.
그녀가 스르륵 눈을 내리감자 벨키오르가 부드러이 입을 맞췄다.
“으음…….”
그는 한 팔로 은새의 허리를 휘어 감고 다른 손으로는 그녀의 귀를 어루만지며 입맞춤에 몰두했다.
먼젓번의 경험을 살려 틈틈이 숨 쉴 여유를 주기도 했다.
하지만 은새는 온몸을 부딪쳐 오는 그와의 키스가 여전히 버거웠다.
겹쳐졌던 두 인영이 떨어졌을 때 은새의 주변으로 금색 마력이 반짝반짝 맴돌다 그녀에게 스며들었다.
‘마법?’
“너무 오래 밖에 있었군. 이만 들어가지.”
“네……. 저기 근데.”
은새는 입맞춤의 이유를 물으려다가 불현듯 입을 다물었다.
이전과 같은 이유 때문이 아니라, 동공이 세로로 가늘어진 벨키오르의 금색 눈동자에서 어떠한 욕망이 선연히 읽혔기 때문이었다.
“베, 벨키오르 님?”
은새는 자신이 잘못 본 건가 해서 눈을 비비고 다시 그를 올려다봤으나 달라지지 않았다.
외려 한 번도 그녀의 시선을 피한 적 없는 벨키오르가 미간을 찌푸리고 고개를 돌렸다.
“가지.”
“잠깐, 잠깐만요.”
은새는 앞서 걷는 벨키오르를 신기해하며 부리나케 쫓아갔다.
차게 식었던 은새의 몸은 어느새 벨키오르의 마법으로 따뜻해져 있었다.
***
“다들 준비됐지?”
“네!”
삐-!
까악!
쉭쉭.
짐 가방을 멘 은새가 거실에 모인 일동을 불렀다.
예쁘게 차려입은 별이와 봄이, 그리고 열심히 몸단장을 한 황새와 백합이가 목청 높여 대답했다.
“우리 애들 너무 예뻐! 사진 찍을까?”
올망졸망 모여 있는 그들이 귀여워서 은새는 카메라 어플을 켜 찰칵찰칵 찍었다.
별이와 마수들은 그녀가 그러는 게 익숙하다는 듯 자연스럽게 포즈를 취했다.
“은새. 이만 움직여야 한다.”
“앗, 제가 또……. 준비 끝났으니 이제 가요!”
오늘은 신탁의 드래곤을 만나러 벨키오르의 세계로 가기로 한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