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 이제 떠나 주셔야겠습니다
……정확히는 꿰뚫을 뻔했다.
「아악!」
푸르푸르가 은새의 몸에 닿는 순간 휘몰아친 금빛 마력이 악마종을 멀리 튕겨 내더니 갈가리 찢어 버렸다.
신성이 담긴 공격도 아니었건만 신체가 크게 훼손되었다.
‘벨키오르 님은 대체 무슨 마법을 걸어 놓으신 거야?!’
[우리 아빠 머시써! 강해!]
경악하는 은새와 다르게 별이는 신이 나서 짝짝 박수를 쳤다.
아무튼 무력화된 푸르푸르를 죽이기에는 지금이 기회였다.
은새가 카마엘의 검을 휘둘렀다.
서걱.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푸르푸르의 신형이 무너졌다.
푸르푸르가 죽자 권속들이 역소환되면서 그것들을 상대하던 헌터들이 은새에게로 달려왔다.
박도윤과 엘레나 킴이 그녀를 걱정했다.
“유은새 헌터, 악마종을 해치우는 데 성공했군요!”
“다친 곳은요? 그 검은?”
“운이 좋았어요.”
은새는 그렇게만 말하고 다급히 코순이에게 갔다.
코순이의 상태는 곧 숨이 끊어질 것처럼 좋지 않았다.
포션을 먹였으나 상처가 조금 아물었을 뿐 기운을 차리지 못했다.
“코순아…….”
뿌우우…….
마지막을 직감한 은새가 코순이의 얼굴 이곳저곳을 끊임없이 쓰다듬어 줬다.
결국 코순이가 눈을 감았고 은새는 슬픈 얼굴로 명복을 빌어 주었다.
고맙다는 말을 속삭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멀리서 연달아 들리던 커다란 폭음이 잦아들었다.
아공간에서 꺼낸 부드러운 천과 꽃으로 코순이를 덮어 준 은새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끝났나 보네요. 곧 유인 조가 복귀하겠어요.”
강력한 폭탄으로 인해 지상의 마수는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이 상태라면 지원이 올 때까지 남은 이들만으로 충분히 버틸 수 있을 것이다.
“은새야!”
“응, 얘들아. 수고했어. 다른 헌터분들도 고생 많았어요.”
은새가 달려오는 한국 측 헌터들을 맞아 줬다.
뒤이어 중국 측 헌터들과 유길선의 모습이 보이자 그녀는 그쪽으로 갔다.
“유길선 길드장님, 빌려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이게 뭡니까?”
“‘누군가의 부러진 검’이요.”
유길선은 황당하다는 눈길로 번쩍번쩍 휘광을 두른 새하얀 장검을 바라봤다.
하급 아이템으로 분류되었던 만큼 초라했던 검은 완전히 탈바꿈해 있었다.
이런 기운이라면 최소한 S급 이상.
성 속성 아이템 중에서도 최상급에 속했다.
그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질문했다.
“뭘 어떻게 했길래 이렇게 변했습니까?”
“별이가 신성을 쏟아부었어요.”
“…….”
유길선은 할 말을 잃었다.
그도 그 방법을 안 해 본 것은 아니었다.
천계 던전에서 어렵게 얻은 아이템이 고작 보잘것없는 하급 아이템이라니, 힘이 봉인되어 있지 않을까 해서 다양한 방식을 시도했었다.
하지만 그들이 했을 때는 아무 반응도 없었는데…….
‘새끼 드래곤이 성체가 되면 정말 무서운 적이 되겠군.’
유길선은 습관처럼 방해되기 전에 미리 제거해야 하나, 라고 생각했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유은새를 건드렸다가 중국이 어떤 위기에 처했는지 경험하고 있으면서 또 같은 일을 벌이면 학습 능력이 없다고 봐야 했다.
“이 검은 유은새 헌터가 가져가세요.”
“갑자기 왜요?”
“이 검의 진정한 모습을 이끌어 낸 사람은 당신이니, 유은새 헌터가 주인이 되는 게 맞습니다.”
은새가 미심쩍다는 듯 유길선의 표정을 살폈다.
“……나중에 또 뒤통수치는 건 아니겠죠?”
“네.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유길선이 낮은 웃음소리를 냈다.
호텔에 있는 특파원들은 숨죽인 채 은새의 활약상을 카메라에 전부 담았다.
그녀가 자신의 마수들과 함께 악마종과 싸운 모습이나 부러진 검을 카마엘의 검으로 변화시킨 장면, 결국 악마종을 쓰러트린 모습까지 전부.
헌터들이 남은 마수들과 대치하는 사이 서서히 동이 텄다.
그리고 수백 대의 헬기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날아오는 게 보였다.
긴장이 탁 풀린 헌터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끝났다…….”
“이제 쉴 수 있겠어.”
호텔까지 접근한 헬기의 문이 일시에 열리고 중국 헌터들이 뛰어내렸다.
“길드장님, 괜찮으십니까!”
청화 길드의 부길드장, 진아소가 가장 먼저 유길선에게 달려왔다.
그는 피곤한 기색을 숨기고 가장 궁금했던 걸 질문했다.
주석의 반응도, 여론도 아닌 사영의 상태였다.
“나는 무탈하다. ……사영은?”
“더 악화되지는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됐어.”
유길선은 뒤를 진아소에게 맡기고 은새에게 갔다.
그가 다가오는 걸 눈치챈 은새도 전열에서 살짝 벗어났다.
“이제 약속을 지켜 주셔야겠습니다.”
“중국 정부가 더 이상 저와 봄이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게 해 주신다는 거래 내용, 잊지 않으셨죠?”
“예. 제가 가진 모든 걸 동원해서라도 막겠습니다.”
은새가 벨키오르에게 미리 받아 두었던 간소화된 해주법이 적힌 종이를 아공간에서 꺼내 그에게 건넸다.
“여기요.”
“이게…….”
유길선은 자신도 모르게 감정이 북받쳐서 말끝을 흐렸다.
하염없이 종이를 매만지던 그는 중국어로 쓰인 글자를 읽었다.
“……아하. 이래서 몇 달 전에 한우리 길드장과 팀원들이 거미가 나오는 던전만 찾아다닌 거였군요.”
은새는 어깨를 으쓱했다.
이제 와서 숨길 이유가 없었다.
유길선이 종이를 잘 접어 품에 넣었다.
“고맙습니다. 던전 브레이크를 수습하고 공략까지 진행하려면 다소 시간이 걸리겠지만…….”
“아, 그거 말인데요. 벨키오르 님!”
은새의 부름에 벨키오르가 인기척도 없이 뒤에서 슥 나타났다.
그는 못마땅하다는 시선으로 유길선을 한 번 훑어보고는 무언가를 손바닥 위에 소환했다.
새카맣게 바글바글 모여 있는 날벌레들.
“카니보러스 모스키토. 말하자면 식육 모기 마수예요.”
“마수라고요?”
“네.”
은새가 던전 브레이크를 일으키는 게 낫겠다는 벨키오르의 의견에 찬성한 이유.
그것은 민간인 피해가 발생하기 전에 수습할 방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것을 풀어놓으면 마수들을 집중적으로 공격할 거예요. 식육 모기들이 가장 좋아하는 게 마수들의 피와 살이거든요.”
“네?”
“번식력이 엄청나서 마수들의 살갗에 알을 낳고, 그러면 새끼들이 태어나면서 마수들을 뜯어먹을 거예요. 작다고 무시하면 안 되는 게 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먹이로 삼은 마수를 뼈만 남기고 다 발라 먹는대요. 새끼가 새끼를 낳고 그 새끼가 새끼를 낳고……. 그렇게 되면 던전 브레이크를 무마하는 건 금방 끝날 거예요. 제 말이 맞죠? 벨키오르 님.”
“그래. 인간이 애쓰지 않아도 지상의 마수들은 오래 지나지 않아 섬멸될 거다.”
“하, 하지만. 폭발적으로 늘어난 식육 모기들은 어떻게 처리합니까? 먹을 게 사라지면 인간을 공격할 텐데.”
“이 마수의 치명적인 약점은 기온이다.”
은새가 유길선과 자꾸 말을 섞는 게 신경에 거슬린 벨키오르는 성가심을 무릅쓰고 대신 대답했다.
“기온, 말입니까?”
“이 땅에는 곧 겨울이 온다지. 날씨가 지금보다 약간만 쌀쌀해져도 식육 모기들은 사멸한다.”
식육 모기는 본디 벨키오르의 세계에서 자생하는 마수였다.
엄청난 번식력과 식탐을 자랑하는 만큼 식육 모기가 나타나는 장소는 폐허가 되었다.
다만 기온에 예민하다는 약점이 있었기에 세상이 온통 식육 모기로 뒤덮이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식육 모기는 한번 풀어놓으면 인간이 제어할 수 없다.
그래서 막무가내로 방생하기보다는 체계적으로 다뤄야 했다.
은새와 벨키오르는 식육 모기가 이계 생물이라는 점을 숨기고 또 사용 계획을 온전히 중국에 맡기려는 목적으로 이제야 이 방법을 꺼낸 것이었다.
아무래도 카메라 앞에서 꺼낼 만한 건 아니었으니.
유길선은 은새에게 묻고 싶은 게 많았다.
차라리 중국이 계속 곤경에 빠져 있는 게 그녀에게는 나을 텐데 왜 던전 브레이크를 저지할 방법을 알려 주는지.
식육 모기 마수는 어디서 가져왔으며, 정말 겨울이 오면 전부 사멸하는지.
하지만 은새를 지키고 선 벨키오르의 기세가 매서워서 그는 모든 의문을 삼켰다.
“……알겠습니다. 이 은혜는 언젠가 갚도록 하죠.”
“그 은혜 말인데요. 지금 갚으시면 안 돼요? 양설 헌터와 왕호연 헌터를 한국으로 데려가고 싶은데요.”
“그 두 사람을 말입니까?”
은새는 고개를 끄덕였다.
청화 길드 내에서 ‘배신자’로 찍힌 그들이 이후에 어떻게 될지는 뻔했다.
은새는 개조실까지 자신을 구하러 온 두 사람을 기억했다.
웬만한 각오로는 어려운 일이었을 텐데 그들은 별이와 봄이까지 챙겨서 호텔 지하 그 깊숙한 곳까지 왔다.
‘두 사람에게 의견을 묻는 게 먼저겠지만.’
중국을 떠날 생각까지 하고 있던 그들이니 아마 동행할 것이다.
다른 곳으로 가고 싶다고 하면 그때 보내 주면 되겠지.
“네. 가능할까요?”
“……예. 몇 가지 절차를 거쳐야겠지만.”
배신자는 반드시 처분한다는 게 길드의 수칙이지만 은새에게 진 빚에 대한 보답이라면 예외를 둘 수 있었다.
고작 그 두 사람이 없다고 청화 길드에 피해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때 헬기에서 내린 중국 헌터 협회 소속 인사가 한국 측을 향해 말했다.
“이제 한국 헌터분들은 이곳을 떠나 주셔야겠습니다.”
그녀는 중국 정부와도 긴밀한 연관이 있었기에 당국의 위기를 세계에 퍼트린 특파원들을 노려보았다.
“저 사람들도 함께 돌아가 주셨으면 좋겠군요.”
“뭐라고요……? 중국이 멸망할 뻔한 사상 최악의 던전 브레이크를 초기에 막아 준 우리에게 대접을 이따위로 한다고요?”
우리가 나서서 한마디 했다.
하지만 여자는 지지 않고 말했다.
“무허가 입국을 한 한국 측에게 죄를 묻지 않는 것만으로 당국이 최대한의 호의를 베푼 것입니다. 순순히 돌아가 주셨으면 합니다.”
“이봐요!”
“됐어, 우리야. 돌아가자. 이미 원하는 건 다 얻었어.”
미리내가 우리를 부드럽게 잡아끌었다.
한국 헌터들은 많이 지쳤고, 특파원들을 이용해 기록을 남겼으니 이제 돌아가도 상관없었다.
개고생한 보상은 앞으로 곤두박질칠 중국의 위상을 구경하며 팝콘을 튀기는 걸로 받으면 됐다.
은새는 무사히 구출되었고, 중국은 다시는 은새와 봄이를 노리지 못할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은새가 다급하게 유길선에게 말했다.
“유길선 길드장님, 돌아가는 길에 양설 헌터와 왕호연 헌터를 데려가도 될까요? 여기 놔두는 건 불안해서요.”
“……네. 길드원을 시켜 데려오라고 하죠.”
특파원들은 ‘알 권리’를 주장하며 남겠다고 했으나 중국 측이 가만둘 리 없었다.
그들은 끝까지 반항했지만 무장한 중국 헌터들을 이길 수 없었다.
물론 이 광경도 다 ‘스트리밍’ 스킬에 의해 전 세계로 생중계되었다.
벨키오르가 호텔 옥상에 한국으로 돌아가는 포털을 만드는 동안, 청화 길드원의 손에 붙잡혀 양설과 왕호연이 끌려왔다.
안색이 새하얗게 질려 있던 그들은 은새를 보자마자 맥이 탁 풀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뭐, 뭐야? 당신이 우리를 부른 거야?”
“양설 헌터, 왕호연 헌터. 나랑 같이 한국으로 갈래요? 유길선 길드장님이 허락한 일이에요.”
“한국……? 우리가 왜?”
“당신들이 나를 구해 줬으니 보답해야죠. 내 손을 잡아요.”
은새가 환하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작은 호의. 어쩌면 구원.
길드에게 처분당할 공포로 피가 말라 가던 두 사람은 빛에 이끌리듯 멍하게 은새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들은 울컥 치미는 여러 복합적인 감정을 누르느라 아무 말 없이 은새의 손을 꽉 잡았다.
은새는 그들의 마음을 아는 것처럼 가만가만 다독였다.
다 같이 헬기에 오르는데 은새가 양설에게 짓궂게 속삭였다.
“한국으로 가면 이제 나한테 언니라고 불러야 한다? 설아.”
“뭣?!”
놀랍게도 양설은 은새보다 나이가 어렸다.
당황해서 얼굴이 새빨개진 채로 입을 뻐끔거리는 그녀를 보며 은새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