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 누군가의 부러진 검
사슴에게도 표정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푸르푸르는 흥미롭다는 기색이었다.
「미래가 끊어진 인간이 어떻게 살아 움직일 수 있는 거지. 사자 소생? 아닌데. 그거랑은 결이 다른데. 흐음.」
[이익, 뉴나한테 나쁜 말 하지 마!]
“별이야, 저 마수의 말에 귀 기울이지 마! 우리를 동요하게 만들려는 속셈이야.”
격분해서 날뛰는 별이를 은새가 달랬다.
가끔 마수 중에서 이지를 가진 개체는 이렇듯 사념을 전해 와 인간들을 흥분하게 만들거나 공포에 빠지게 만들었다.
악마에 대한 기록에서 푸르푸르는 거짓말만 한다고 했다.
눈앞의 마수와 악마를 완전히 동일시할 수는 없으나 외관과 능력처럼 어느 정도 일치하는 부분이 있으니 참고해 볼 법했다.
사슴의 입이 쩍 벌어지며 섬뜩한 이가 드러났다.
「재미있네. 인간, 널 데려가서 내 실험체로 삼아야겠다.」
크르렁!
민들레의 그림자가 솟구쳐서 푸르푸르를 옭아맸다.
하지만 악마종은 날개를 쫙 펴고 비행해서 추격을 벗어났다.
뿌우우우!
코순이가 코를 높게 쳐들고 휘둘렀으나 아예 높이 올라가 버리니 잡을 도리가 없었다.
비행형 마수를 상대할 때의 어려운 점이었다.
푸르푸르가 힘을 끌어올리니 한낮처럼 일대에 뇌우가 쏟아졌다.
“얘들아, 피해!”
검은뿔표범 하늘이나 영호 민들레는 전투 경험도 많고 몸이 날렵해서 뇌우를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코순아!”
덩치가 워낙 큰 코순이는 미처 피하지 못했다.
거체로 전격을 모두 받아 내다시피 한 코순이가 비틀비틀하다가 쿵, 쓰러져 버렸다.
가쁘게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걸 보니 즉사는 면한 것 같았지만 위험했다.
은새가 바로 곁에 있었으면 포션이라도 먹여 줬을 텐데 안타깝게도 지금은 하늘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아랫입술을 깨문 은새가 베일 카라스의 봉을 움켜쥐었다.
시간을 끌수록 악마종은 활개 칠 것이니 코순이를 위해서라도 속전속결로 마무리 지어야 했다.
“별아, 시작하자!”
[네!]
별이는 ‘축복’의 힘이 담긴 마법을 시전했다.
신성을 응축한 마력 구가 푸르푸르에게 쉴 새 없이 쇄도했다.
[아 왜 안 맞아!]
별이가 요령 없이 날리는 마법을 푸르푸르는 아주 여유롭게 회피했다.
사념은 들려오지 않았으나 푸르푸르가 비웃는 것처럼 키득거렸다.
오히려 번개를 이용해서 그들이 다가오지 못하도록 견제했다.
그에 별이가 더 약이 바짝 올랐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내가 꼭 맞추고 말 거야!]
별이가 공격에 집중하는 사이 은새가 지상의 마수들을 불렀다.
“하늘아, 민들레야!”
그들은 부름을 듣자마자 어딘가로 흩어져 달려갔다.
그 모습이 꼭 겁을 먹어 꼬리를 말고 도망가는 것처럼 보여, 푸르푸르는 기고만장해졌다.
그때 별이의 머릿속에 벨키오르의 음성이 들렸다.
[마력을 더 정교하게 가다듬어라.]
별이는 습하습하 숨을 내쉬고 마력을 세밀하게 움직였다.
그러자 낭비되던 마력이 줄어들고 위력은 강해졌다.
「……!」
마력 구가 푸르푸르의 상체를 스치자 살갗이 타들어 갔다.
당황하던 악마종은 눈이 뒤집혀 별이에게 마기 덩어리를 날려 보냈다.
[으앗, 앗, 뉴나!]
“별이야, 조심해!”
작은 날개를 퍼덕이며 마기 덩어리를 피하던 별이는 아예 방어막을 펼쳐 막아 냈다.
위치가 고정되니 공격이 집중되었다.
아슬아슬한 광경.
끼에에엑!
위기에 처한 별이를 구하기 위해 도다리가 피어를 내질렀다.
별이에게만 향하던 마기 덩어리가 은새와 도다리에게도 향했다.
‘지금이야!’
그녀의 손에는 어느새 베일 카라스의 봉이 사라지고 은은한 빛이 감도는 웬 나뭇가지가 쥐어져 있었다.
‘신목의 가지’.
성 속성 아이템으로, 미미한 신성을 품고 있어서 쥐고 있으면 원기가 회복되고 독성을 미약하게나마 해소해 주는 하급 아이템이었다.
고작 이거 가지고 뭘 할 수 있겠냐마는 은새는 도다리의 등을 두드려 급강하하면서 소리쳤다.
“별아!”
[네!]
별이의 모습이 순간적으로 사라지더니 푸르푸르의 머리 위에서 나타났다.
별이가 손을 앞으로 뻗어 묵직한 마법을 쏘아 냈다.
신성이 전혀 담기지 않은, 그저 큰 충격을 주는 것에만 치중한 공격이었다.
콰광!
은새가 바닥에 신목의 가지를 꽂는 것과 동시에 방심한 푸르푸르가 땅에 처박혔다.
“벨키오르 님!”
그녀는 벨키오르를 불렀으나 왠지 봄이가 ‘삣!’ 하고 우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신목의 가지에 분홍빛 기운이 어른거리더니 뿌리를 내리고 쑥 자라났다.
그게 하나가 아닌 셋.
두 그루는 민들레와 하늘이가 사전에 은새가 미리 말한 장소에 꽂아 두었다.
“별이야, 할 수 있지?!”
[웅!]
별이가 정신을 집중해 마력을 방출했다.
신목을 잇는 신성을 머금은 진이 생겼다.
「이건!」
그들이 뭘 하려는지 눈치챈 푸르푸르가 당장 그 자리를 벗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삼각형의 진이 완성되자마자 악마종은 빠져나올 수 없게 되었다.
마기를 뿜어내도 멀리 퍼지지 못했다.
“됐다!”
[뉴나, 해냈어요!]
별이가 기쁨의 공중제비를 돌았다.
전설에서 이스라엘 왕국의 세 번째 왕, 솔로몬이 악마들을 봉인한 방법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나와 있지 않다.
강대한 마법을 사용했다든가 신에게서 악마를 굴복시킬 수 있는 반지를 받았다든가 하는 설이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제34 위(位)의 악마 푸르푸르가 삼각형 안에 넣어지면 천사의 모습으로 변하게 되며 거짓이 아닌 진실만을 말하게 된다는 건 세상에 알려져 있었다.
전에 바티칸으로 출장 갔을 때 은새는 천사종과 악마종 마수만 사냥하는 이들과 만난 적이 있었다.
비밀스러운 집단이었으나 교황의 배려로 그들의 공략 과정을 참관했다.
해당 헌터들은 악마종과 천사종을 사냥할 때 특이하게 ‘설화’를 이용했다.
그들이 주장하기를, 던전에서 등장하는 마수들이 현세에 전해지는 악마 혹은 천사에 대한 묘사와 유사한 외형을 띤 데에는 이유가 있을 거라고 했다.
바티칸의 헌터들은 던전이 지구와 다른 세계를 잇는 문(Gate)이라는 가설과 다른, 오래도록 지구인들의 입에서 오르내린 설화가 현실화되었다는 가설을 믿었다.
실제로도 설화에 나온 방법을 이용해 공략에 성공했기에 그들의 믿음은 확고했다.
이 방법은 모든 악마종과 천사종에게 통하는 건 아니라 잘 알려지지 않은 개체라거나 전혀 생뚱맞은 개체가 튀어나오면 아무 소용없었다.
그러나 그때는 무력 -숙련된 성 속성 스킬과 무수히 많은 아이템들- 으로 밀어붙이면 끝이었다.
설화를 이용하는 방법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건 일단 바티칸에서 함구했고 -그래야 공략 의뢰가 들어오니까- 마계 던전 자체가 흔하지 않은 이유도 있었다.
「고작 이런 걸로 이 나를 붙잡아둘 수 있을 것 같으냐!」
푸르푸르의 기세는 조금도 꺾이지 않았다.
진에 가두었을 뿐, 악마종을 해치운 건 아니었다.
은새가 아공간에서 부러진 검을 꺼냈다.
푸르푸르 앞에 나서기 전, 호텔에서 이것을 건네주면서 유길선이 말했다.
‘이 검은 ‘천국으로 들어가는 문’이라는 던전에서 나온 아이템입니다. 왜 이걸 달라고 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유용하게 썼으면 좋겠군요.’
하급 아이템, ‘누군가의 부러진 검’.
은새는 검 손잡이를 잡고 자세를 취했다.
물론 그녀의 주 무기가 아니었기 때문에 어색했다.
인간에게는 악마종이나 천사종이나 똑같은 마수였으나 악마종의 천적은 천사종이었다.
그러니 은새의 생각이 맞다면.
“별이야, 이 검에 신성을 최대한 불어넣어 줘!”
[네, 뉴나!]
별이는 기운을 일으켜 검에 쏟아부었다.
처음엔 아무 변화도 없던 검이 별이가 온몸이 새빨개질 때까지 힘을 쥐어 짜내자 비로소 환한 빛을 터트렸다.
새끼 드래곤의 마력을 남김없이 빨아먹은 검은 자체적으로 수복되면서 화려한 원형을 되찾았다.
[흐어어어……. 뉴나 나 힘들어요.]
“별이야, 고생했어!”
되돌아온 하늘이의 등에 드러누운 별이를 향해 은새가 칭찬을 쏟아 냈다.
그녀가 든 검을 보는 푸르푸르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사슴은 발버둥 치면서 어떻게든 달아나려고 했다.
은새의 키만 한 새하얀 장검은 사악한 악을 쫓아내는 신성한 빛을 뿜어냈다.
아마도 아이템 감별사가 이 검을 다시 감정한다면 ‘카마엘의 검’이라고 이름을 붙일 것이다.
파괴의 천사 군단 총사령관 카마엘.
은새가 바티칸에서 머무를 때 얻은 지식으로는, 카마엘은 파괴의 천사 군단을 이끌고 최전방에서 악마들과 전쟁을 하는 천사라고 한다.
유대 전설에서 예언자 모세는 하느님으로부터 천국으로 오라는 명을 받고 천국으로 올라간다.
이때 천국의 문을 지키고 있던 카마엘은 잠시 한눈을 팔아 하느님의 지시를 듣지 못했기 때문에 천국의 지킴이로서 모세와 싸우게 된다.
그 결과 카마엘은 모세에게 패배함은 물론 모세의 공격에 소멸까지 당한다.
‘천국으로 들어가는 문’ 던전, 그리고 그곳에서 드롭된 부러진 검.
은새는 그 단서들로 검의 주인을 카마엘로 추정했다.
그리고 지금 상황에서는 이보다 적절한 무기가 없었다.
“끝내자.”
은새가 푸르푸르에게 다가서며 검을 높이 쳐들었다.
검사인 우리를 부르는 게 좋을까 하는 생각이 일순 들었으나 멀리서 커다란 폭음이 들리는 걸로 봐서 정신없을 듯했다.
「고작 인간 따위가!」
눈을 부릅뜬 푸르푸르가 마기를 두른 채로 돌진했다.
“헉!”
은새가 멈칫한 그 순간, 푸르푸르의 사슴뿔이 은새의 배를 꿰뚫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