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 모로 가도 서울로
격랑이 마수들을 집어삼켰다.
뒤이어 양희진이 냉각 스킬, ‘우리 집 냉장고는 얼음 나온다!’를 발동, 한기가 휘몰아치며 마수들을 통째로 얼려 버렸다.
팀원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얼음 동상이 된 마수들을 깨부쉈고, 양희진도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날이 번득이는 도끼를 야무지게 쥐고 휘둘렀다.
그녀가 도끼날로 내리치는 게 마수가 아니었으면 살인 현장이라고 오인할 법했다.
“…….”
이매는 요즘 10대의 무서움을 잠시 지켜보다가 ‘도깨비 현신’ 스킬을 사용했다.
그의 뒤로 그림자가 길게 늘어지더니 붉은 피부에 노란 눈을 가진, 성인 남성보다 머리 두 개는 더 큰 외뿔 도깨비가 벌떡 일어났다.
가죽 같은 넝마를 입은 도깨비의 주변으로 푸른 도깨비불이 일렁였다.
호전적이고 장난을 좋아하는 도깨비의 웃음소리가 음산하게 울려 퍼졌다.
큭큭큭큭.
도깨비가 가시 돋친 방망이를 휘두르자 ‘우우’ 하고 귀곡성을 내는 신령들이 나타났다.
도깨비와 신령들은 귀기를 흩뿌리며 마수들을 희롱하듯 몰아붙였다.
형체가 없는 신령들이나 두려움을 모르는 도깨비는 거침없이 질주했다.
이매의 활약을 뿌듯하게 감상하던 한서리가 ‘타나토스의 낫’을 휘둘렀다.
스킬, ‘저승 명부’를 발동하자 그녀 앞에 검은 표지의 책이 떠오르더니 차르르 책장이 넘어갔다.
그리고 집행되는 영혼 강탈.
“어휴, 젊어서 그런지 다들 팔팔하네!”
마수의 관자놀이에 검을 박아 넣던 김일도가 대한민국의 미래가 밝다며 껄껄 웃었다.
“계속 몰려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헌터들은 점점 지쳐 가는 반면 마수들의 기세는 꺾일 줄 몰랐다.
아무리 힐러들이 용을 쓰고 포션을 들이부어도 삐끗하는 순간 부상자들이 속출했다.
위기에 처한 청화 길드원을 구하려다 한쪽 팔을 희생한 유길선이 소리쳤다.
“부상자들은 호텔로 피신해라!”
부상자들이 빠지면서 남은 자들의 부담이 가중되었다.
뿌우우우!
엘리펀티노소어도 쉴 새 없이 공격해 오는 마수들을 몸으로 막아 내느라 기력이 거의 다한 상태였다.
피가 섞인 침을 퉤, 뱉은 우리가 누군가를 불렀다.
“김일도 길드장님!”
“어, 어! 내 차례냐?”
김일도가 스킬, 세이프 존(Safe zone)을 전개했다.
사방으로 그의 권역이 펼쳐지며 은빛의 막이 생성되었다.
“호텔까지 가지 말고 김일도 길드장님 옆으로 모이세요! 청화 길드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한국말로 말한 뒤 중국어로도 한 번 더 말했다.
생각 같아서는 청화 길드원들은 알아서 생존하라고 하고 싶었으나 지금은 서로 돕는 처지였다.
세이프 존은 길아연의 ‘비상하는 방패’나 사영의 ‘절대불가침’처럼 강력한 보호막을 생성하는 스킬은 아니었다.
하지만 보호막과 더불어 힐러가 아닌데도 다수를 동시에 치유하는 게 가능해 활용도가 높았다.
모든 헌터들이 기력을 짜 가면서 최대한 버텼다.
부상자들도 응급처치만 하고 돌아와 다시 전투에 뛰어들었다.
서서히 해가 저물고 있었다.
하지만 지원은 아직 오지 않았고 마수들은 끊임없이 밀려왔으며 방어선은 무너지고 있었다.
이제 무슨 수를 써야만 했다.
유길선이 청화 길드원, 임신이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스킬이라면 단 두어 시간만이라도 모두가 숨 돌릴 수 있는 시간을 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려면 마수들과 거리를 최대한 벌려야 하는데 어떻게…….
그때 어디선가 불새가 날아오르며 엄청난 불길이 일어났다.
“뭐, 뭐야!”
“아직도 이런 기력이 남은 헌터가 있다고?”
끼에에엑!
불새는 크게 울부짖으며 마수들을 위협했다.
물들어 가는 황혼과 더불어 마치 불새가 하늘을 뒤덮은 듯했다.
“뭐야? 누구야?”
“뭘 봐? 나 아니거든?”
자연스럽게 불 속성 이능을 다루는 헌터들에게로 눈길이 갔다.
사람들의 시선이 몰리자 솔이 인상을 팍 썼다.
은새와 친구들은 단번에 누가 한 일인지 눈치챘다.
솔은 관종이지만 남의 활약으로 젠체하는 타입은 아니었다.
외려 훈련을 거듭했는데도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 벨키오르와의 무력 차이를 깨닫고 분해한다면 모를까.
누가 한 일인지는 몰라도, 아니 도천 측의 반응을 보니 대강 알 것 같지만 유길선은 무너져 가던 방어선이 도로 회복되자 외쳤다.
“임신이 헌터!”
“네!”
그의 의도를 바로 알아챈 임신이가 스킬, ‘무공해 태양’을 사용했다.
저물어 가던 지상에 다시 햇빛이 비쳤다.
호텔과 주변 일대만이 스킬의 영향권 안에 들었다.
‘무공해 태양’은 공간 분리 스킬의 일종으로 빛이 사라지기 전까지 마수들은 이곳에 무엇이 있는지 인지하지 못할 것이다.
다치고 지친 헌터들이 전투를 멈추고 호텔로 모여들자 하늘을 배회하던 헬기들이 착륙했다.
이때만을 기다려 온 특파원들이 우르르 헬기에서 뛰어나왔다.
“모두 무사하십니까? 헌터분들의 활약, 저희가 카메라에 다 담았습니다!”
“한우리 길드장님, 유길선 길드장님! 던전 브레이크를 예상하셨습니까? 한중 연합 레이드인 겁니까?”
“중국 측 유길선 길드장님! 이 위기를 극복할 방안이 있으십니까? 내륙에서 지원은 언제 옵니까?”
“한국에서 안 보이던 몬스터 테이머가 이곳에 있는데, 무슨 사정이 있습니까?”
특파원들이 쌓였던 질문을 쏟아 냈다.
봉인된 던전들이 일시에 브레이크를 일으킨 사상 초유의 사태에서, 제한된 수의 헌터들이 생각보다 잘 버티자 그들은 지나치게 흥분해 있었다.
특히 ‘스트리밍’ 스킬을 사용 중인 특파원들은 전 세계 사람들의 반응을 실시간으로 보고 있으니 헌터들에게서 어떤 대답이라도 이끌어 내야 했다.
“…….”
하지만 헌터들의 눈빛이 싸하다 못해 살의가 흘렀다.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르는 던전 브레이크 상황에서, 전투에 별 도움도 안 되는 특파원들이 주변을 얼쩡거리면 누구라도 화가 나고 거슬릴 법했다.
더군다나 방금까지 전방에서 구르다 왔으니 예민해질 수밖에.
그들을 여기까지 데리고 온 도천 측마저 난색을 표했다.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 특파원들이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던전에서 막 나온 헌터들에게는 너무 가까이 다가가지 말라는 취재 지침은 만국 공통이었다.
그들은 헌터들의 인터뷰를 따는 대신 멀리서 찍거나, ‘무공해 태양’ 영향권 아래에서 붕괴되어 가는 도시의 광경을 카메라에 담았다.
헌터들은 호텔로 들어가 포션과 응급 약품으로 상처를 치유하며 잠시 휴식했다.
유길선이 청화 길드원에게 다가갔다.
“지원은 언제쯤 도착하는 거지?”
“여덟 시간 후에 저희 길드를 포함한 중국 5대 길드에서 공략팀을 파견 보내기로 했습니다. 또한 지역 길드들이 지현과 징하이현에서 위아래로 밀고 들어올 계획이라고 합니다.”
“왜 이렇게 늦는 거야?”
“그게, 국가 주석께서 이곳의 상황을 아시고 대로하시어 책임자들을 불러 문책하는 바람에 대응팀을 꾸리는 게 늦어졌다고 합니다.”
길드원은 자신이 한 일도 아닌데 고개를 들지 못했다.
아마 주석은 특파원들이 내보낸 실황 중계를 본 듯했다.
미처 막을 새도 없이 자국의 위기가 알려져 국가의 위상이 떨어졌으니 격노하는 것도 이해는 갔다.
그리고 모든 책임을 봉인된 던전들을 담당하고 있던 길드들에게 떠넘길 생각이겠지.
주석의 속내가 선명히 읽혀 유길선은 으득 이를 갈았다.
한편 지원이 여덟 시간 후에나 온다는 얘기를 들은 한국 측은 암울한 분위기다.
“저 더 이상 못 서 있겠어요…….”
“희진아!”
기력이 쪽 빨린 양희진이 흐물흐물 바닥에 녹아내렸다.
그녀의 팀원들이 얼른 받아서 단것들을 입에 넣어 주었다.
사탕을 우물거리는 양희진 옆으로 마찬가지로 탈진한 솔이 기어갔다.
“인마, 제일 어린놈이 왜 이렇게 비실거려?”
“솔이 언니, 제가 지금껏 갔던 현장 중에 여기가 제일 빡세요. 엄마 보고 싶어요……. 힝. 우리 무사히 돌아갈 수 있는 거죠? 네? 우리 오빠.”
“그래, 한우리 길드장. 이거 중년 학대야. 아이고, 나 죽네.”
김일도가 차가운 바닥에 벌러덩 누우며 끙끙거렸다.
아닌 게 아니라 정말 죽을 것 같았다.
그는 정말 할 수만 있다면 중국을 탈출해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괜히 왔지, 평소라면 마누라랑 오순도순 저녁이나 먹으면서 티브이 볼 시간인데 말이야.
“다들 그러지 마시고 허기라도 채우죠.”
우리가 미리 준비했던 스태미나 회복에 좋은 음식들을 꺼내 놓았다.
도천 길드원들과 다른 길드 사람들이 좀비처럼 모여들었다.
“끄응. 그래. 먹어야 살지…….”
“밥!”
“이매 길드장님이랑 한서리 부길드장님도 어서 와서 드세요.”
그들이 살기 위해 음식을 느릿느릿 씹고 있을 때 은새는 살짝 빠져나와 벨키오르와 봄이에게로 갔다.
줄곧 그녀를 보고 있었던 벨키오르는 바로 반응했다.
“은새. 고생했군.”
삐잇-!
봄이가 호다닥 날아와 은새에게 덥석 안겼다.
다행히 봄이는 쉬면서 기운을 차린 듯했다.
[봄이, 내 멋진 활약 잘 봐써?]
삐!
은새의 어깨에 앉아 있던 별이가 꿍, 하고 봄이와 이마를 부딪쳤다.
아이들이 교감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은새가 벨키오르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마지막에 불새 벨키오르 님이죠? 정말 멋졌어요.”
“별거 아니다. 그대도 음식을 먹어야 하지 않겠나?”
“음……. 입맛이 별로 없네요.”
은새가 힘없이 웃었다.
“벨키오르 님, 지금 그 방법을 사용하는 건 어렵겠죠?”
“그건 한번 풀어놓으면 인위적으로 통제가 불가능하니 적절한 때를 노리는 게 낫다.”
“그렇겠죠. 알고는 있는데 다들 힘들어해서 한번 물어봤어요.”
무겁게 탄식하는 그녀를 본 벨키오르가 안쓰러운 마음에 입을 뗐다.
“그렇게 힘들면 내가…….”
그때 축 처진 은새를 똘망똘망하게 올려다보던 봄이가 삐이! 하고 울었다.
그러자 근처에 있던 화분에 분홍빛 기운이 맺히더니 무언가 쑥쑥 자라기 시작했다.
청화 길드원들이 가져다 놓은 그 화분이었다.
“앗. 봄이야, 뭐야?”
식물은 화분을 뚫고 나올 기세로 자라더니 이내 무언가를 떠올리게 하는 뭉툭한 형체를 드러냈다.
그것의 정체를 알아본 은새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어, 이거…….”
봄이의 기운을 느꼈는지 한국 헌터들이 그녀 쪽을 돌아보았다.
“뭐야, 무슨 일이야?”
“엥? 뭐냐, 그 숭한 건. 봄이가 한 거야?”
그들은 소여물 먹듯이 먹고 있던 걸 내려놓고 휘적휘적 다가왔다.
그런데 조금 전까지만 해도 숨 죽은 배추처럼 축 처져 있던 김일도가 펄쩍 뛰어올랐다.
“이, 이거 벌떡초 아니야? 몸에도 좋고 여성에게도, 남성에게도 좋고 오만 데에 좋은 진시황의 불로초이자 회춘초로 불리는 그 벌떡초?”
“뭐라고요? 벌떡초라고요?”
그게 뭔지는 몰라도 범상치 않은 이름과 생김새 때문에 한국 헌터들이 모여들었다.
그러자 중국 헌터들도 근처를 기웃거렸다.
무성히 자라난 벌떡초를 보고 놀라서 자기네들끼리 무어라고 빠르게 얘기했다.
김일도가 흥분해서 은새에게 달려들려다가 벨키오르에게 붙잡히고는 ‘이 사람은 누구지?’ 하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는 하려던 말을 했다.
“유은새 헌터! 얘가 그 춘티, 하는 그 애지? 이름이 봄이랬나? 얘, 봄이야. 흙 필요하니? 흙 많이 필요해? 그러면 더 자라게 해줄 수 있어?”
“뭐예요, 아저씨! 좋은 걸 왜 아저씨만 독차지하려고 해요. 저도 줘요! 우리 길드장님 가져다드리게!”
“어허! 이 사람들이. 은새의 마수가 자라나게 한 건 뭐다? 우리 도천 길드 소유다. 줄 서세요, 줄!”
삐삐!
금세 난리가 난 사람들을 보고 봄이가 해맑게 울었다.
기운 없어 보이던 이들이 활기를 띠자 기뻐하는 게 보였다.
‘그래, 모로 가도 서울로 가면 된다고 했으니까.’
이렇게라도 경직되어 있던 분위기가 풀렸으니 다행이다.
은새는 떠들썩한 이들을 보며 웃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