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 지금껏 제가 봐 드린 거예요
류자예는 시간을 멈추고 홀로 움직일 수 있는 사기적인 능력을 지녔다.
한계가 명확했지만 전투 시에나 기밀 작전을 수행할 때 그는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그러니 아무도 모르게, 은새 본인도 눈치채지 못하게 개조실로 옮길 수 있었을 것이다.
왕호연과 양설은 조만간 유길선이 행동에 나설 것을 알고 ‘침묵의 표식’이라는 아이템으로 그의 측근들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예상대로 일이 터졌다.
양설은 손톱을 깨물며 초조하게 방 안을 빙글빙글 돌다가 돌연 박차고 뛰어나갔다.
그런 그녀를 왕호연이 황급히 붙잡았다.
“양설, 너 어디 가?!”
“놔! 개조실이 어떤 곳인지 너도 잘 알잖아. 그 맹한 여자가 얼마나 버틸 수 있겠어? S급이라고 해서 정신까지 철벽인 건 아니거든?”
청화 길드의 그림자에 속한 이들이라면 개조실의 악명을 모를 수 없었다.
그곳에 들어갔다가 나온 자들이 어땠던가.
백치가 되거나 인형이 되거나 시체가 되어서 나왔다.
그 정도로 악랄한 장소였다.
손목을 뿌리치려는 양설을 아예 깍지까지 껴서 왕호연이 못 움직이게 만들었다.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얘가 왜 이러지, 진짜?
“그러니까 그 여자 일에 네가 왜 끼어드냐고. 이게 길드에 반하는 짓인 줄 몰라서 이래?”
“…….”
“들키면 처분당할 거야. 주인을 문 개라며 버려지겠지. 더 이상…… 있을 곳이 없어져도 괜찮아? 그래?”
양설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누구보다 쓸모에 집착하며 인정에 목말라했던 그녀다.
은새의 처우에 반발한다면 필시 응징이 있을 터.
침묵하던 양설이 한참 뒤 입을 열었다.
“왕호연. 우린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해?”
“……뭐?”
“언제 버려질지 몰라 전전긍긍하며 빛도 안 드는 음지에서, 살아도 사는 것 같지 않게 계속 숨죽이고 있어야 해?”
왕호연은 말문이 턱 막혔다.
양설이 느끼는 처절하고 암담한 감정이 심장에 와닿아서, 그 역시도 그걸 잘 알고 있어서.
“그러니까 그런 생각을 왜…… 유은새 때문에 하느냐고.”
“짜증 나. 그 여자가 다 물들여 놨어.”
양설이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헝클였다.
은새가 가진 그 태평함, 무구함.
분명 길드원들이 수런대는 소리를 들었을 텐데도 아무 편견 없이 자신들을 보는 그 시선 때문에 양설은 여태까지와 다른 선택을 하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밑바닥인 인생이었다. 세월이 흘러도 자신들을 보는 사람들의 혐오감 깃든 시선은 변하지 않았고 양설과 왕호연은 체념하기에 이르렀다.
환멸만 남은 이 나라를 뜨면 될까? 그러면 평범하게 살 수 있나.
그러던 찰나 마주한 햇빛은 눈이 부셨다. 그 빛을 따라가면 지금껏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 미지의 영역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양설은 그들이 살던 어둡고 습한 동굴에서 한 번쯤, 벗어나고 싶어졌다.
‘유은새를 개조실에서 빨리 꺼내지 않으면 손쓸 수도 없게 망가질 거야. 그 바보 같은 얼굴도 다시는 볼 수 없겠지.’
있는 대로 짜증을 내면서도 결정을 바꿀 생각이 없어 보이는 양설 때문에 왕호연이 천장을 보며 탄식했다.
“아~ 나도 모르겠다. 사고 치면 우리 어디 가냐?”
“일단 중국을 벗어나야지. 춘티엔더야오칭이 걸린 문제라 국가 역적이 되는 건데. 청화 길드의 그림자가 미치는 곳에서는 물 한 모금도 마음 놓고 못 마셔.”
“무서워 죽겠네.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야, 설아. 근데 너는 유은새 헌터가 좋은 거야, 싫은 거야?”
“싫어! 나는 그런 안전 불감증에 걸린 것 같은 여자 딱 싫어.”
두 사람은 해가 뜨자마자 작전에 착수했다.
무모한 계획이었으나 오랜 시간 작전지에서 구른 짬이 있어서 은밀하게 움직였다.
게다가 이 호텔에 있는 자들은 왕호연과 양설을 무시하고 있었으니 방심하는 상대만큼 손쉬운 먹잇감은 없었다.
왕호연과 양설은 새끼 드래곤과 춘티엔더야오칭을 먼저 찾기로 했다.
몬스터 테이머가 마수도 없이 싸우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환혹의 명주실’로 감시하고 있던 헌터들을 재우고 마수들을 챙겨 나왔다.
낯선 손길에 마수들이 반항할 거라고 생각했으나 무슨 이유 때문인지 얌전했다.
품에 안겨서 멀뚱멀뚱 두 사람을 올려다보는 게 제 주인을 닮아서 위기감을 못 느끼는 것 같았다.
왕호연과 양설은 스킬과 아이템으로 개조실 근처에서 모습을 감추고 있다가 유길선이 나온 틈을 노려 S+급 아이템 ‘명왕성의 새벽’으로 헌터들의 눈을 가렸다.
그리고 조우한 유은새는…….
“세상에, 별이야! 봄이야! 나 여기 있는 거 어떻게 알고 왔어?”
생각보다 멀쩡해 보였다.
‘왜지?’
이상한 노릇이었다. 분명 이곳에 끌려오자마자 별짓을 다 당했을 텐데.
“양설 헌터, 왕호연 헌터…… 당신들이 왜?”
뒤늦게 두 사람을 발견한 은새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양설은 머리를 흔들어 의문을 지우고 아이템을 사용해 은새의 속박을 풀었다.
“설명할 시간 없어. 빨리 여기서 벗어나야 해.”
“잠시 시간을 벌었을 뿐입니다. 호텔에서 나가서 랜덤 좌표로 설정된 공간이동 아이템을 사용해 이 지역을 벗어나죠. 청화 길드원들의 추적이 따라붙을 텐데 그 이후까지는 저희도 책임져 드릴 수 없다는 점 양해해 주시고요.”
양호연이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이제 저희도 역적이 되었거든요.”
“왜 이렇게까지…… 저를 도와주는 거예요?”
은새는 그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자신들이 가진 것을 전부 버려 가며 그녀를 도우려고 하는 거지? 무리하는 게 뻔히 보이는데.
우리가 그럴 만한 사이인가?
“그냥.”
양설이 성의 없이 대답하는 것과 동시에 은새를 묶고 있던 속박이 완전히 풀렸다.
“이걸로 한국에서 빚진 건 없는 셈 치는 거다?”
“…….”
뚱한 표정을 지은 양설을 은새가 새삼스러운 눈길로 바라봤다.
‘그걸 신경 쓰고 있었어?’
역시 근본부터 나쁜 사람들은 아니었다.
“가죠. 길드장님이 오면 금방 알아채실 겁니다.”
왕호연과 양설이 은새를 이끌고 지하를 빠져나갔다.
중간중간 마주치는 사람들을 왕호연과 양설이 스킬과 아이템 등 신묘한 방식으로 기절시키거나 행동 불능 상태로 만들었다.
마치 머릿속에서 여러 번 시뮬레이션 해 본 것처럼.
그들은 이날만 기다려 온 듯 그렇게 막힘없이 전진했다.
숨겨진 통로를 이용해 호텔을 벗어나려는 그들을 은새가 다급하게 붙잡았다.
“잠깐!”
“왜?! 전력으로 뛰어도 모자랄 판에.”
“위로 가죠.”
“뭐? 미쳤어? 궁지에 몰리는 게 당신 취미야?”
“유은새 헌터, 위로 가면 하늘을 날지 않는 이상 도주가 어렵습니다.”
“아니요. 위로 가야 해요. 내가 원래 있던 룸으로. 그래야 우리가 살아요.”
“무슨 생각이야?”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은새가 호소했다.
“내 말 한 번만 믿어 줘요.”
“미치겠네.”
양설이 머리를 쥐어뜯었다.
이성적으로 생각해 봤을 때 은새의 말은 제 발로 사지로 걸어 들어가자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호텔 안에는 청화 길드원들이 쫙 깔려 있었고 그들을 상대하며 최상층까지 가는 것은 하늘이 돕지 않는 한 불가능했다.
“……전에 당신이 말했던 그 계획이라는 것과 연관 있어?”
“네.”
“당신이 한 결정 때문에 우리가 죽을 수도 있는데?”
은새가 한 걸음 다가섰다.
“책임질게요.”
당신들이 그 지하 깊숙한 곳까지 나를 구하러 온 것처럼.
쓴 약을 삼킨 듯 오만상을 찌푸린 양설이 방향을 바꿨다.
밖으로 나가는 게 아닌, 위로 올라가는 쪽으로.
“가자, 왕호연.”
“설아, 우리라도 호텔을 빠져나가는 게…….”
“망설인 순간 우리는 이미 끝났어! 이제 죽으나 사나 저 여자랑 함께해야 한다고!”
왕호연을 질질 끌고 가면서도 양설의 머릿속은 후회와 번민으로 어지러웠다.
‘이게 잘하는 짓일까?’
잘근잘근 깨문 아랫입술에서 피가 나도 양설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들이 호텔을 오르기 시작한 순간부터 청화 길드원들이 쏟아지기 시작했으므로.
“배신자다! 배신자가 저기에 있어!”
“양설, 왕호연! 길드와 조국의 은혜도 모르고…….”
“어, 꺼져!”
양설의 무력은 대단치 않았다.
여기까지 뛰어오는 데 체력을 소진한 그녀는 헌터들의 공격을 막는 것도 버거워했다.
그나마 어디서 구한 건지 모를 희귀한 아이템들이 방어력을 올려주어 버틸 만했다.
공격의 주축은 별이와 봄이였다.
[뉴나, 내가 할게요!]
삐-!
“부탁해, 얘들아!”
저들을 혼내 주기를 벼르고 있던 별이가 마법으로 강한 돌풍을 일으켜 헌터들을 멀리 날려 보냈다.
뒤이어 봄이가 재생력이 높은 그물 같은 식물을 자라게 해 그들의 몸을 묶었다.
“유은새 헌터, 거의 다 왔어. 조금만 더 올라가면 최상층……!”
그런데.
퍼억!
“어윽!”
코너를 돌자마자 갑작스레 복부를 걷어차인 양설이 허공을 붕 날아서 바닥에 처박혔다.
“설아!”
“양설 헌터!”
뚜벅뚜벅.
긴급한 상황과 다른 느긋한 구두 소리가 울리고 유길선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쓰러져 있는 양설의 머리채를 잡아 올렸다.
“윽!”
“요 며칠 수상하게 군다더니 이런 걸 획책하고 있었나.”
“기, 길드장님…….”
양설의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오랜 시간 동안 축적해 온 두려움이 그녀의 눈동자에 차올랐다.
“짐승만도 못한 걸 거둬 주고 먹여 주고 입혀 줬더니 살 만해졌다고 도망칠 생각이나 하고 말이야. 과거에 너희가 어떤 취급을 당했는지 잊었나?”
“아, 흑!”
“양설 헌터를 놓아주세요, 유길선 길드장님.”
얼어붙은 왕호연 대신 은새가 나섰다.
성난 포식자처럼 살기를 뿜어내던 유길선이 느릿하게 숙였던 몸을 일으켰다.
“유은새 헌터. 망종들을 길들이는 재주가 있는지 몰랐습니다. 그 또한 스킬의 영향입니까?”
테이밍 마스터가 마수 말고도 인간에게도 통한다니, 놀라운 사실이군요.
입가에 비소를 그린 유길선의 눈빛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몸도 채 못 가누는 양설 쪽을 힐끔거린 은새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제게 얻으셔야 할 게 있을 텐데요. 이런 식으로 나오신다면 제안은 없던 걸로 하겠습니다.”
“그럴 계제나 됩니까? 주위를 둘러보십시오.”
어느새 청화 길드원들이 그들을 빽빽이 둘러싸고 있었다.
완벽한 포위.
“빠져나갈 구멍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만용을 부릴 만큼 어리석다면 제가 사람을 잘못 본 것이겠지요.”
“착각하고 계시네요, 유길선 길드장님.”
은새가 셔터 아이템인 팔찌를 완력으로 부쉈다.
원래라면 따로 해제하는 아이템이 필요하지만 진즉 빈껍데기만 남은 팔찌는 산산조각이 나 흩어졌다.
“만용이 아니라, 지금껏 제가 봐 드린 거예요.”
“뭐……?”
“벨키오르 님.”
은새가 속삭이듯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자마자 거대한 마력 구가 유길선에게 세차게 쏘아졌다.
콰과광!
“크윽!”
“길드장님!”
스킬로 즉각 몸을 보호했으나 유길선은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떻게 셔터 아이템을 부순 거지? 아니, 이 힘은 대체……?’
은신의 장막이 걷히고 은새의 뒤에서 벨키오르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인간 같지 않은, 섬뜩하리만치 아름다운 외형의 남자.
섬세한 외모와 헌앙한 체구, 그리고 독보적으로 큰 키.
그는 존재감만으로 모든 걸 압도했다.
동공이 샐쭉 세로로 가늘어진 금색 눈동자가 싸늘하게 주변을 둘러싼 이들을 관조했다.
그는 줄곧, 은새가 개조실로 옮겨졌을 때부터 그녀의 곁에 있었다.
그러니 전부 보았다. 저 인간들의 만행을.
“은새.”
차가운 분노를 억누르며 벨키오르가 은새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녀에게 손을 뻗고 싶어서 얼마나 인내했는지 모른다.
은새는 벨키오르의 손바닥 위로 손을 겹쳐 올리며 무릎 꿇은 유길선을 내려다보았다.
“유길선 길드장님께서 선택을 빨리 하셨으면 좋았을 텐데. 결국 이렇게 됐네요.”
쿠궁.
갑자기 외부에서 발산된 충격파로 인해 호텔이 크게 흔들렸다.
멀리서 마수의 커다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은새가 새카만 눈동자를 빛냈다.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