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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키운 마수가 드래곤을 물고 왔다 (120)화 (120/190)

119화 - 제게 원하는 걸 말하세요

은새가 ‘사영’이라는 이름을 꺼내자마자 짙은 살기가 덮쳐 왔다.

아귀처럼 일그러진 얼굴로 유길선이 섬뜩하게 그녀를 쳐다봤다.

“세 치 혀를 놀리는군, 유은새 헌터. 목숨이 아깝지 않은가 보지?”

“글쎄요. 제가 유길선 길드장님이 원하는 걸 가지고 있는 이상 과연 그럴 수 있을까요?”

은새는 마른 입술을 혀로 축였다.

생각보다 더 격렬한 반응에 그녀는 자신의 추측이 들어맞았음을 직감했다.

“생각해 봤어요. ‘그’ 청화 길드의 유길선 길드장님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살리려는 사람이 누굴까……. 어떤 가치가 있는 사람일까.”

청화 길드는 거대한 중국 내에서도 다섯 손가락에 꼽히는 길드였다.

그에 더해 국가 주석과 긴밀한 연관이 있는 모양.

원하는 건 모두 손에 넣을 수 있는 막강한 세력을 지닌 유길선이, 부와 권력, 인재 무엇 하나 아쉬울 것 없는 그가 필사적으로 이 일에 매달리는 이유가 뭘까.

사람을 도구로 부리는 그에게 인간적인 감정을 일으킬 수 있는 대상이 몇이나 될지.

“그랬더니 한 사람밖에 없더라고요. 중국 1세대 헌터 중 하나인 사영 헌터.”

그녀는 이렇게 불리는 게 더 익숙했다.

절대불가침(絕對不可侵)의 사영.

격변의 시대 초기, 혼란에 빠진 중국을 구하고 정신적 지주가 된 이.

함락의 수호자 길아연만큼이나 강력한 보호 스킬을 가진 헌터였다.

은새가 단말기로 한국에 연락한 다음 날, 우리는 은가시나무 던전 레이드 때 참가했던 중국인 헌터 목록을 보내 줬다.

그중에서 은퇴했거나 3년 사이 언론에 노출되지 않은 헌터를 추렸고, 중국 내에서 큰 공헌을 했거나 중요한 인물을 선별했다.

그렇게 남은 헌터는 둘.

두 사람 중 유길선과 연이 있는 이는 사영, 그녀뿐이었다.

“유길선 길드장님, 저와 거래하시죠.”

뜬금없는 은새의 말에 유길선이 경계하는 기색을 보였다.

은새는 이 순간을 기다려 왔다.

“아라크네의 저주를 없앨 방법을 알려 드릴게요. 대신 저와 봄이는 포기하세요.”

“……그게 가능할 거라고 생각합니까? 당국이 원하는 건 춘티엔더야오칭입니다.”

흥분을 내리누른 유길선이 존대로 돌아왔다.

“하지만 유길선 길드장님이 원하는 건 봄이가 아니잖아요.”

“…….”

허를 찔린 듯 그에게서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지난날 은새는 유길선과 몇 차례 면담하면서 알게 된 사실이 있었다.

봄이를 볼 때 그의 눈빛.

은새를 감시하던 청화 길드원들조차도 봄이를 볼 때면 경외감과 고양감을 드러내고는 했다.

하지만 유길선은 무가치한 걸 보는 듯한 매정한 눈길로 봄이를 있는 듯 없는 듯 대했다.

거기서 은새는 유길선이 따로 원하는 바가 있음을 눈치챘다.

그리고 어쩌면 그걸 이용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판단했다.

“제게 원하는 걸 말하세요. 명령을 내리기만 했을 뿐 아무것도 하지 않은 중국 정부 대신 유길선 길드장님 본인이 원하는 걸요.”

유길선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은새는 지금 어떤 상황에서도 봄이와 해주법, 두 가지 모두를 내어줄 수는 없으니 하나를 선택하라고 종용하고 있었다.

“……그게 말이 되는 제안이라고 생각합니까?”

“네. 그럴 만한 힘이 있으시잖아요.”

중국이라는 거대한 나라를 은새 개인이 상대할 수는 없다.

하지만 청화 길드가 반발하고 나선다면 다르겠지.

모든 건 명분 싸움이다. 유길선에게 명분만 만들어 준다면 어렵기는 해도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 명분이라는 것도 곧 생길 테고 말이지.’

“협상은 결렬입니다. 어차피 이곳에 온 이상, 당신은 저희가 원하는 대답을 내놓을 수밖에 없습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유길선 길드장님. 시간을 많이 드릴 수 없으니.”

일전에 유길선이 했던 말을 그대로 인용하며 은새는 위기감을 느끼지 못하는 듯, 웃었다.

***

은새가 사라진 뒤, 별이와 봄이는 다른 방으로 옮겨져 갇혀 있었다.

불만 가득한 시선으로 별이가 감시하는 이들을 노려봤다.

‘우리랑 누나를 떼어 놓는다고 내가 누나를 못 찾을 것 같아?’

별이가 이를 드러내며 아르릉거렸다.

함부로 인간 앞에서 마법을 보이지 말라는 은새의 말이 아니었으면 별이는 진작 드래곤의 위용을 가감 없이 떨치며 저 인간들을 두려움에 떨게 했을 것이다.

[잠시 자리를 비울 테니 경솔하게 행동하지 마라.]

새벽에 벨키오르가 남긴 전언 또한 별이의 행동을 막고 있었다.

저들이 은새를 어디로 빼돌렸든 벨키오르가 그녀의 옆에 있을 걸 알아 참고 있었지만 슬슬 인내심에 한계가 오고 있었다.

삐…….

[봄이 울지 마! 마수는 이런 일로 우는 거 아니야!]

바로 봄이가 눈물을 글썽거리며 그렇게 좋아하는 밥도 거부한 채 은새를 애타게 찾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무슨 상황인지 몰라 마냥 해맑았던 봄이지만 은새가 오래도록 보이지 않자 슬슬 불안해했다.

삐빗, 삐.

엄마 어디 갔어? 나만 두고 어디 갔어?

봄이가 구슬피 울자 감시자들이 움찔하는 게 보였다.

그들을 향해 눈꼬리를 세운 별이가 봄이를 꼭 끌어안았다.

[알겠어, 봄아. 뉴나한테 가자!]

치사하게 아빠만 누나랑 놀구!

별이는 위풍당당하게 날개를 펼쳐 봄이와 함께 날아올랐다.

그런데 개나리색 마력이 피어오르기 전, 갑자기 헌터들이 무너지듯 바닥에 쓰러졌다.

그들 사이에 던져진 웬 아이템을 의아하게 보던 별이가 막 룸으로 들어온 누군가를 쳐다봤다.

[으응? 저 사람은……?]

별이가 놀란 눈을 깜빡였다.

***

은새는 침착하게 기다렸다. 시간이 흐르기를.

감시자들은 최소한의 물만 주며 식사도 가져다주지 않았다. 호텔 룸에 있을 때와는 대우가 천지 차이였다.

아마 여기서 더 하면 잠도 못 자게 하겠지.

신체적인 고통 없이 사람을 고문하는 방법은 다양했으므로 은새가 장기간 여기 붙잡혀 있는다면 필시 고통스러울 것이다.

그러니 유길선도 자신했을 테고.

“왜, 왜 안 통하는 거야. 대체 왜!”

하지만 사람 일이 어디 뜻대로만 흘러가던가. 특히 그들은 모르는 초월종이 개입해 있다면.

온갖 스킬과 아이템으로 은새의 정신을 무너뜨리려던 이들이 분개했다.

그녀가 방금 막 망가진 아이템을 질린 눈으로 쳐다봤다.

‘나바스의 악몽을 여기서 보게 될 줄은 몰랐네.’

나바스는 지옥 궁의 광대이자, 환각과 꿈을 관장하는 악마였다.

천사나 악마의 이름이 붙는 아이템은 천계, 혹은 마계와 관련된 던전에서만 얻을 수 있으며 지극히 위험하여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사용이 금지되어 있었다.

하지만 보다시피 암암리에 유통되는 모양이고.

‘벨키오르 님의 마법이 대단하긴 하구나.’

은새는 속으로 감탄하다 멀리서 도깨비처럼 눈을 부릅뜬 유길선에게 말을 걸었다.

“아직 결정 못 하셨어요?”

“유은새 헌터……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겁니까?”

“그럼 아무런 방비 없이 여기 왔을까 봐요? 제가 대책 없이 사는 것처럼 보여도 다 생각이 있거든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그녀를 노려보던 유길선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리 S급 헌터라고 해도 이 정도로 정신 방벽이 튼튼한 건 도무지 말이 안 됐다.

‘뭔가 숨기고 있을 거라고 예상했지만 대체 무슨 수를 쓴 거지? 사실 SS급이라도 되는 건가? 아니,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이건 흡사 무효화나 상쇄가 아닌가. 몬스터 테이머가 그런 스킬을 가지고 있을 리가…….’

“잠시 쉬었다 하죠.”

“네에. 앉아만 있었던 저는 팔팔하지만 잘 쉬다 오세요.”

은새가 생글생글 웃으며 그를 배웅했다.

감시자들이 약이 바짝 오른 게 느껴졌다.

‘으음. 몇 시간이나 지났지?’

은새가 무료하게 의자에 등을 기대며 생각했다. 창문도, 시계도 없으니 체감만으로 계산해야 했다.

그런데 다음 순간, 은새의 예민한 감각에 이질감이 느껴졌다.

황급히 고개를 돌리자 바뀐 게 없는데 낯설게 느껴지는 풍경.

‘이건…… 환술계 장막?’

어느 틈에?

그와 동시에 헌터들의 초점이 일순 흐릿해졌다.

유길선이 나간 두꺼운 철문이 스르륵 열리더니 익숙한 두 인영이 빠른 속도로 날아왔다.

[뉴나! 왜 이런 춥고 어두운 곳에 이써요!]

삐잇! 삐삐삐삐삐.

“세상에, 별이야! 봄이야! 나 여기 있는 거 어떻게 알고 왔어?”

은새가 자신도 모르게 큰 목소리를 냈다.

깜짝 놀라 감시자들을 쳐다봤으나 그들은 아까 본 자세 그대로 서 있었다.

환술에 걸려 있는 걸 확신한 은새가 목소리를 낮춰 아이들에게 속삭였다.

“나 찾아온 거야? 기다리고 있으라니까. 데리러 간다고.”

[하지만……. 저 사람들이.]

할 말이 있는 듯 별이가 우물쭈물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 시선을 따라간 은새의 눈동자가 커졌다.

“양설 헌터, 왕호연 헌터…… 당신들이 왜?”

감시자들이 깔린 공간에 거침없이 밀고 들어온 건 왕호연과 양설이었다.

***

일을 저지르면서 왕호연은 이건 미친 짓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다 유은새와 이렇게 지독하게 얽혔을까? 국적도 다르고, 소속된 길드도 다른데.

유길선의 명령을 받은 게 하필 자신들이라서? 아니면 양설이 그녀를 신경 썼기 때문에?

‘다 부질없다.’

이제 와서 생각하기에는 다 부질없는 것들이었다.

왕호연과 양설이 은새가 개조실로 옮겨진 걸 알아챈 것은 거의 일이 벌어진 즉시였다.

“양설! 야, 설아 일어나 봐.”

“왕호연, 미쳤냐? 지금 몇 시인데…….”

“좀 전에 류자예 헌터가 움직였다고!”

“류자예 헌터……? 뭐!”

잠에 취해 있던 양설이 튕기듯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캄캄한 창밖을 한 번 바라보고 시계를 확인했다.

“유은새는?”

“……류자예 헌터가 움직였으니 룸에는 없겠지.”

“아, 그 여자 계획이 있긴 뭐가 있어! 결국 이렇게 됐잖아!”

류자예는 청화 길드 내에서 특별히 대우하는 인재였다.

그는 시간과 관련된 특수 스킬을 가진 헌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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