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 받은 만큼, 유감없이 돌려주는 거야
양설은 처음 보는 진지한 표정이었다.
단순히 시비 걸러 온 것 같지는 않아 은새가 자세를 바꿨다.
“무슨 의미로 묻는 거예요?”
“당장 몸을 보호할 수단 하나 없으면서 천하태평인 게 이해가 안 가서. 처음에는 그런 척인 줄 알았는데 당신 정말 위기감이라고는 요만큼도 느끼고 있지 않지?”
“음.”
사실이라 은새가 겸연쩍게 빨대를 입에 물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양설이 기가 찬다는 한숨을 쉬었다.
“버티기만 하면 어떻게든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천만에. 당신은 당국에서 만족할 만한 대답을 내놓을 때까지 이 호텔에서 절대 나갈 수 없어.”
“그건 모르는 일이죠.”
“아니. 확실해.”
굳은 얼굴로 양설이 단언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라면 길드장님은…… 무슨 짓이라도 하실 거야. 정말 무슨 짓이든.”
“…….”
“당신은 길드장님이 얼마나 무서운 분인지 몰라. 모르니까 이래.”
늘 날카롭기만 하던 양설의 목소리가 떨렸다.
은새는 그녀에게서 미약한 두려움과 공포를 읽었다.
‘묘한 느낌인데.’
은새가 생각하기로 양설은 분명 자신을 싫어했다. 이유는 짐작할 수 없지만 그건 확실히 느껴졌다.
하지만 직접 찾아와 친절히 상황을 읊어 주고 경고까지 해 주는 게 조금…… 신기했다.
걱정이라고 하기에는 거칠고 -양설도 펄쩍 뛰며 극구 부인할 것이다- 호의라고 하기에도 애매하고.
양설로서는 은새가 어떻게 되든, 무슨 짓을 당하든 상관없을 텐데.
‘근본부터 아주 나쁜 사람은 아닐지도?’
입가를 매만지던 은새가 상체를 낮춰 소곤거렸다.
상대가 나쁘지 않게 대하는데 나쁘게 나갈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그런 소리를 내게 해도 돼요? 또 유길선 길드장님한테 호출받는 거 아니에요?”
“괜찮아, 지금은.”
양설이 왕호연 쪽을 눈짓했다.
설마. 감시자들에게 환상술이라도 건 건가?
하지만 저들은 대다수가 S급 헌터들인데 통한다고?
“얼마 못 가. 아무튼, 무슨 생각으로 여기에 있는 거야?”
“아무 생각 없어요. 계획은 있지만.”
“계획?”
“설마 알려 달라고는 하지 않겠죠? 우리는 적인데.”
“하나도 안 궁금해!”
심각했던 게 언제냐는 듯 금방 원래대로 돌아와 버럭거리는 양설을 보고 은새가 유쾌한 웃음을 터트렸다.
역시 그녀는 심각한 것보다 이편이 잘 어울렸다.
은새가 웃으니 별이와 봄이가 무슨 일인가 해서 머리를 갸웃했다.
여전히 미소를 입가에 매단 채로 은새가 실례되는 질문을 했다.
“양설 헌터, 친구 없죠?”
“있거든?!”
“왕호연 헌터 빼고요.”
“……있어! 내가 이 나이 먹도록 왕호연밖에 친구가 없을 것 같아?”
미안한 말이지만 그래 보였다.
“기왕 왔으니 커피라도 한잔 마시고 가요. 아, 혹시 커피 못 마셔요? 딸기 요거트 스무디 같은 거 좋아할 것처럼 보이는데.”
“아니야! 나도 커피 마실 줄 알거든?”
양설은 발을 쿵쿵 구르며 가더니 은새와 똑같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받아 왔다.
‘호텔 커피 맛없는데.’
은새야 그냥 습관적으로 마시는 거고 딱 봐도 커피 안 좋아할 것 같은 양설은 더럽게 쓰다는 게 표정으로 꾸역꾸역 그것을 마셨다.
보다 못한 왕호연이 망고 소르베를 가져다줄 때까지.
‘당신은 길드장님이 얼마나 무서운 분인지 몰라. 모르니까 이래.’
은새는 말없이 양설을 보다가 통창으로 시선을 돌렸다.
며칠이 흘렀다.
금방이라도 무슨 짓을 벌일 것 같던 유길선은 의외로 조용했다.
은새를 찾아오지도 않고 사람을 보내지도 않았다.
하지만 은새는 벨키오르가 주는 정보와 예민해진 감각으로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느끼고 있었다.
그러니 자다 깬 장소가 룸이 아닌 폐쇄된 공간이라도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깨어났군요, 유은새 헌터.”
“유길선 길드장님.”
은새는 실험대 같은 딱딱한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며 천천히 주변을 돌아보았다.
창문이 없어서 시간을 짐작할 수 없었으나 아마도 깊은 밤중.
고등급 헌터의 무력에도 절대 무너지지 않을, 사방이 튼튼한 벽으로 가로막힌 협소한 장소였다.
구석에 씻는 시설이 있고 어둠을 밝히는 건 오직 희미한 전등뿐이다.
아무리 잘 환기했어도 지하실 특유의 습하고 꿉꿉한 냄새가 맴돌았다.
‘지하? 호텔 지하에 이런 공간이 있었나?’
아무리 잘 쳐 줘도 누군가를 가두기 위한 장소임에 틀림없었다.
‘그런데 날 안 깨우고 어떻게 여기까지 데려온 거지.’
아직 청화 길드가 숨기고 있는 저력이 대단하다는 건 잘 알겠다.
은새가 차가운 눈길로 유길선과 그의 뒤에 서 있는 헌터들을 바라봤다.
“이제야 본모습을 드러내시네요.”
“말했다시피 드릴 수 있는 시간이 얼마 없어서 말입니다.”
의례적으로 짓고 있던 미소조차 지운 채, 유길선이 헌터들을 움직였다.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을 자리를 마련했으니, 유익한 대화를 나눌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
은새를 ‘개조실’로 데려가기 전 유길선은 국가 주석과 통화를 나누었다.
주석은 은새와 춘티엔더야오칭을 중국으로 끌어들이는 일에 진척이 더디자 유길선을 다그쳤다.
-자네만 믿으면 된다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 어째서 아직도 아무런 성과가 없어! 그럴 거면 왜 거기에 처박혀 있느냔 말이야, 무슨 일을 꾸미기에!
주석은 일반인이었다. 헌터의 힘을 두려워하고 그들이 언제 국가에 대항할지 몰라 경계했다.
권력자들이 으레 그렇듯 주석 또한 의심과 편집증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유길선을 이용해 자국 내의 길드들과 헌터들을 통제하기를 원했다.
많은 이권을 주는 대신, 유길선의 충성을 받았다.
하지만 주석은 그런 유길선조차 의심했다.
그가 자신을 따르는 헌터들을 끌어모아 뒤통수를 칠까 봐 다양한 방식으로 압박했다.
들리지 않게 한숨을 쉰 유길선이 언제나 그렇듯 감정을 최대로 죽인 채 대답했다.
“……생각보다 완고합니다. 가장 좋은 그림은 유은새 헌터가 스스로 중국을 선택하는 것이니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십시오. 발을 묶어 두었으니 시간문제 아니겠습니까.”
-자네 말대로 발을 묶어 두었는데 늦어질 이유가 무어 있지? 춘티엔더야오칭을 확보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중국의 부강함을 세계에 알리는 길이라고 내가 누차 얘기했을 텐데. 본국을 위한 일이라고! 그런데 이리도 굼뜨니 내가 자네를 어떻게 믿고 일을 맡기겠나!
‘본국을 위한 일이라고?’
유길선이 저도 모르게 비소를 터트렸다.
그건 순전히 주석의 욕심에 지나지 않았다.
춘티엔더야오칭, 은새가 봄이라고 부르는 그 마수를 얻는다고 중국이 지닌 무력에 큰 변화가 생기지는 않는다.
주석이 놓지 못하는 그 상징성.
중국에서 처음 발견되었고, 후한(後漢) 말기에 살았다는 명의 화타처럼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약과 독을 다스린다는 춘티엔더야오칭의 그 상징성에 대해 유길선은 회의적이었다.
정말 이 나라를 위한다면 주석이 사영을 죽어 가게 내버려 두지 않았을 테니까.
자신처럼 어떻게든 방법을 찾으려고 했겠지.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유은새를 굴복시키겠습니다.”
그것은 유길선도 바라는 바니까.
유은새를 쥐어짜서라도 해주법을 알아내야 했다.
설령 그것이 유은새를 망가뜨린다고 해도.
주석과의 통신을 끊은 유길선이 대기하고 있는 부하에게 명령했다.
“예정대로 진행해. 오늘 밤 유은새를 개조실로 데려간다.”
***
한밤중에도 불이 꺼지지 않은 도천 빌딩.
경비와 비상근무 중인 이들을 제외하면 밤에는 텅 비어 있어야 할 건물이 며칠째 사람들로 북적였다.
길드장실에서 우리는 초조하게 책상 근처를 서성였다.
“길짱, 정신 사납다. 좀 앉아 있어라.”
“그러는 솔이 너는. 다리 좀 그만 떨어.”
“왜 내 다리 기를 죽이고 그래? 얘도 자유 의지가 있는 애야!”
티격태격하는 듯 보이는 유하와 솔은 수시로 벽에 걸린 시계를 확인했다.
“다들 출출할 텐데 뭐라도 좀 먹어.”
“지금 뭐 먹으면 토할 것 같아…….”
미리내가 간식을 담은 그릇을 테이블에 내려놓았고, 인찬은 안색이 파리하게 질린 상태로 입을 틀어막았다.
“어! 방금!”
그러다 자나 깨나 우리가 손에 들고 다니던 단말기에서 불이 반짝 들어왔을 때, 친구들 모두가 반응했다.
우리가 즉시 내용을 확인했다. 그의 표정이 무섭도록 굳어졌다.
“중국이 움직였다. 다들 시작해.”
“좋아! 공주님을 구출하러 가 보자고.”
“훈련의 성과를 시험해 볼 때가 됐다.”
“차라리 일이 터진 게 계속 기다리는 것보다 낫네.”
무한정 대기했을 때보다 생기 넘치는 이들을 보며 미리내가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가자. 받은 만큼, 유감없이 돌려주는 거야.”
앞으로 12시간.
중국을 뒤흔들 도천(滔天)의 역습이 시작되었다.
***
유길선은 묘한 눈길로 은새를 바라봤다.
개조실에 들어온 지 두 시간째.
은새는 처음 그 자리에 강제로 앉혀진 채로 멀뚱하게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기, 길드장님! 아무것도 통하지 않습니다. 아무것도요……!”
“어떻게 이럴 수가…….”
세뇌 및 정신 조작 스킬을 가진 길드원과 저주 스킬을 가진 길드원이 경악하며 외쳤다.
특히 후자는 유길선이 특별히 엄선해서 데려온 이로, 정신 조작이 통하지 않을 경우 은새를 협박하기 위해 준비했다.
술사를 죽이지 않는 한 영원히 고통 속에서 살아야 하는 악랄한 저주.
아라크네의 저주와 마찬가지로 해주법은 따로 존재하지 않으며 힐러의 치유도 통하지 않는다.
‘어떻게 된 일이지?’
하지만 은새에게는 그 무엇도 통하지 않았다.
살피는 그의 눈길에 은새가 ‘음.’ 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다 했나요?”
사실 그녀도 얼떨떨하던 차였다.
정신 조작이야 벨키오르의 마법으로 다 막아 낼 수 있을 거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저주 스킬이 발동되었을 때 그녀는 과거의 경험 때문에 살짝 긴장했다.
‘그러고 보니 아까 저 사람, 스킬 사용할 때 반사동의 신을 모셔 놓고 제의(祭儀)를 올린다 어쩐다 스펠을 외웠었지.’
그녀의 추측이 맞다면 저자가 저주의 근원으로 삼는 대상이 서유기에서 나온 반사동의 거미 요괴인 모양이었다.
‘산체스 님이 말했던 저주 내성이란 게 혹시 특정 매개를 사용하는 저주에만 효력이 있는 건가?’
아니면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강화된 것이거나.
“다른 사람 다 내보내고 둘이서만 대화를 나눴으면 좋겠는데요, 유길선 길드장님.”
궁금한 건 나중에 벨키오르에게 물어보기로 하고 은새는 유길선을 똑바로 응시했다.
“다 나가.”
그는 분기를 여실히 드러낸 채로 은새 앞에 섰다. 존대도 집어치웠다.
“무슨 얘기를 하자는 거지?”
“아라크네의 저주에 걸렸다는 그 사람. 사영 헌터, 맞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