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 우리처럼 될 것 같아?
“내가 뭘.”
베개에 얼굴을 묻은 양설이 불퉁하게 대꾸했다.
게임기를 내려놓고 침대 곁으로 다가온 왕호연이 그동안 생각했던 바를 다다 쏟아 냈다.
잔소리 스킬(양설 한정) Lv.10이 발동했다.
“싫다, 싫다 하면서 유은새가 어디 나타났다 하면 부리나케 쫓아가고. 가서 시답잖은 소리나 해 대고. 좋아하는 여자애 관심 끌려는 꼬마도 아니고 왜 그러는 거야? 보는 내가 웃겨서, 원.”
“…….”
“잊었어? 우리가 유은새한테 한 짓. 그 사람 입장에서 우리는 자신을 모함에 빠뜨린 천하의 개자식들이야. 그녀가 왜 네가 치대는 걸 참아 주는지는 모르겠지만 의도가 있지 않겠어? 증거를 잡아낸다거나.”
왕호연이 반응은 없지만 아마 속으로 부글거리고 있을 양설을 걱정스러워했다.
“너는 대체 유은새랑 뭘 하고 싶은 거야?”
“짜증 난다고!”
결국 양설이 벌떡 일어나 성을 냈다. 새빨개진 얼굴로 그녀는 숨을 몰아쉬느라 가슴을 들썩거렸다.
“전부 다 짜증 난다고. 그깟 춘티엔더야오칭이 뭐라고 야단법석을 떠는 높으신 분들이나, 하필 춘티엔더야오칭을 길들인 게 한국인인 것도 짜증 나. 그래 봐야 마수 아니야? 헌터보다 중요하겠냐고.”
“…….”
“잘난 스킬 하나 타고나서 유은새는 헌터로 각성한 뒤로 인생이 순탄 대로였겠지? 고만고만한 것들끼리 경쟁할 필요도 없고 아득바득 살아남으려고 애쓸 이유도, 밑바닥을 전전한 적도……. 가만히만 있으면 주변에서 대단하다, 어쩐다 떠받들어 줬을 테니까.”
“양설.”
“여기까지 끌려온 주제에 긴장감 없이 태평한 것도 마음에 안 들어. 뭘 믿고 저러는 건지. 아직 진짜 무서운 꼴을 못 봐서 그래. 여기는…… 길드장님은 아마도.”
지그시 입술을 깨문 양설의 눈빛에 두려움이 스몄다. 오한이라도 느끼듯 덜덜 몸을 떠는 그녀를 왕호연이 끌어안았다.
그들은 청화 길드의 그림자 속에서 정체를 감춘 채 암약했다. 그러니 가장 어둡고 추악한 면을 잘 알고 있었다.
화려함 속에 감춰진 실체를.
“하나부터 열까지 다 우리랑 다른 게 짜증 나. 우리가 지금껏 어떻게 살아남았는데. 거기서 어떻게 빠져나왔는데.”
“…….”
양설이 말하는 ‘거기’가 어디인지를 떠올린 왕호연의 눈동자가 급격하게 가라앉았다.
그들은 격변의 시대 이후에 생겨난 중국의 최대 범죄 도시 시호우 출신이었다.
던전과 헌터라고 불리기 전의 이능력자들이 등장한 초기.
전 세계가 혼란에 빠진 그 시기에 중국은 안보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국가 봉쇄령을 내렸다.
중국 정부는 나라 안의 혼란이 외부에 새어 나가는 걸 원치 않았다.
하지만 그를 이용해 평소 국가에 반감을 가지고 있던 이들이 강력한 힘을 손에 넣어 날뛰기 시작했다.
도시를 점거하고 테러를 일으키는 건 기본, 대량 학살까지 자행했다.
중국이 던전과 마수보다 이능력자들을 통제하는 데 더 애를 먹었다면 말 다 했을까.
그리고 시호우는 역대 최악의 빌런, 재희현이 지배하던 곳이었다.
‘네가 그러고도 사람이야!’
……라는 외침이 가장 많이 들려오던 곳.
시호우의 뒷골목에서 태어난 왕호연과 양설은 최약체나 다름없는 고아에다 어린애였다.
‘도망쳐, 설아!’
어린 왕호연이 인신매매단을 막으며 양설을 도피시키려고 했다.
재희현이 다스리는 도시는 무법지대였다. 주변 지역으로부터 고립된 도시는 식량이 점차 말라 갔고 그로 인해 범죄 발생률이 급증했다.
살인, 절도, 폭행, 납치, 마약, 인신매매 등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모든 죄악이 한 도시에서 벌어졌다.
사람들은 인간성을 상실했고 오직 살아남기 위해 서슴없이 타인의 생명을 해쳤다.
그리고 보호받지 못하는 어린아이는 손쉬운 먹잇감이었다.
‘웃기지 마, 나 혼자는 절대 안 가!’
약하고, 겁도 많은 양설이지만 자신이 도망치면 왕호연이 어떻게 될지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이 무법 도시에서 오직 왕호연만을 의지한 채 버틴 양설이었다.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소녀는 짱돌을 손에 쥐고 막무가내로 인신매매단에게 달려들었다.
‘이 꼬맹이들 아주 웃기는 짓을 하네.’
‘야, 적당히 손 봐 주자.’
‘이 새끼들아, 설이를 놔 줘!’
‘왕호연, 살려 줘……!’
흠씬 두들겨 맞은 양설이 무력하게 남성들에게 끌려가는 걸 바라보던 왕호연은 그 순간 각성했다.
스킬, 환상술.
위기의 순간 얻게 된 왕호연의 능력은 그들이 목숨을 부지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두 사람은 식량을 훔치고 빈집에서 잠을 자며 오랜 시간을 필사적으로 살아남았다.
시간이 흘러 중국 정부는 혼란을 수습하고 헌터들에 대한 강력한 통제력을 발휘해 점거된 도시를 차츰 해방시켰다.
드디어 재희현이 몰락하고 사람들은 자유를 되찾았다.
하지만 도시를 벗어나서도 왕호연과 양설은 시호우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저 애들 그 도시 출신이래. 무슨 범죄를 저질렀을지 몰라. 가까이 가지 마.’
‘사람도 죽였을까? 죽였겠지. 거기선 식량이 부족해서 먹어서는 안 될 것까지 먹었다던데…….’
악명 높은 범죄 도시 출신이라는 꼬리표는 어딜 가나 그들을 따라다녔다.
일부러 인적이 드문 곳을 찾아다니기도 하고 반대로 대도시로 나가기도 했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생업에도 지장을 받았다.
시호우 출신이라는 걸 들켜 아르바이트에서 잘리고 돌아온 날, 지칠 대로 지친 양설이 방에 틀어박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아무도 나를 못 알아봤으면 좋겠어. 내가 누군지 몰랐으면 좋겠어.’
그리고 그녀의 간절한 소망을 들어준 것처럼 양설은 변용 스킬을 가진 헌터로 각성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지 청화 길드 소속 헌터가 그들을 찾아왔다.
그리고 유길선과 만났다.
‘시호우 출신의 떠돌이 헌터라는 게 너희들인가?’
경계심이 심한 두 사람을 앞에 두고 유길선은 상품을 품평하듯 위, 아래로 훑었다.
‘쓸 만한 스킬을 가졌던데. 갈 곳이 없으면 내 밑에서 일하지 그래. 물론…… 너희의 활동 영역은 빛이 아닌 어둠 쪽이겠지만.’
그편이 너희들에게도 낫겠지?
유길선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쓸모를 증명해 보인다면 갈 곳 없는 너희에게 있을 곳을 제공해 주지. 세상 어느 곳에서도 받아들여 주지 않는 너희를, 내가 거둬 주겠다고.’
그날 이후로 왕호연과 양설은 유길선의 제법 쓸모 있는 패가 되었다.
어둠 속에서 온갖 더러운 일을 도맡아 처리하며 버려지지 않기 위해 아등바등 살았다.
회상을 끝낸 왕호연이 머리를 거칠게 털어 냈다.
“그게 유은새랑 무슨 상관이야. 네 말대로 그 사람은 능력도 출중하고 가진 것도 많은 사람인데. 청화 길드에 들어온다고 우리처럼 될 것 같아?”
“…….”
“그 사람 신경 쓰지 말고 너나 잘해, 너나. 길드장님 신경 거스르지 말고.”
왕호연이 등을 돌렸으나 양설은 고집스럽게 대답하지 않았다.
***
은새는 밤을 틈타 단말기를 꺼내 조작했다.
[여기는 은새. 응답 바란다 오버.]
그리고 여유롭게 기다리자 작은 깜빡임과 함께 답변이 왔다.
[여기는 우리. 은새야, 괜찮아? 무슨 일 없어?]
“푸핫.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네.”
그리운 감정을 곱씹으며 은새는 한 글자, 한 글자 신중하게 눌렀다.
긴 대화는 불가능했기에 짧은 문장이 오갔다.
[은가시나무 던전 레이드에 참가했던 중국 측 헌터 목록이 필요.]
[왜?]
[내가 걸렸던 저주에 걸린 사람이 있는 듯. 협상에 이용할 생각.]
[OK. 더 필요한 건?]
“필요한 건 글쎄……. 아, 이것도 말해야지.”
은새는 벨키오르가 알려 준 사실도 우리에게 전했다.
[봉인된 던전이 위험. 던전 브레이크 예상됨.]
생각하고 있는 듯 우리에게선 한동안 답장이 오지 않았다.
느지막하게 단말기가 깜빡였다.
[언제?]
[조만간.]
벨키오르는 몇 달의 시일이 남았다고 했지만 은새는 그렇게 대답했다.
이번 답장은 빨랐다.
[구하러 갈게.]
[괜찮아. 곧 한국으로 돌아갈게.]
일이 잘 풀린다면 분명 그럴 수 있을 것이다.
은새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소파에 기대 누웠다.
이대로 대화가 끝날 줄 알았는데 우리가 답장을 보냈다.
[단말기 벨키오르 님한테 맡겨 줘.]
“벨키오르 님한테……? 뭐지. 할 얘기가 있나.”
은새는 별 의심 없이 그러겠다고 답장했다.
***
최근 청화 길드원들의 이상한 행보가 관찰되었다.
은새가 의심 가득한 시선으로 커피를 마시며 그들을 유심히 살폈다.
그들은 자꾸 아닌 척 은새 옆에 앉은 봄이를 힐끔거렸는데, 눈빛에서 어떤 기대와 갈망이 엿보였다.
뭣보다.
‘왠지 자주 가는 장소 근처에 유독 식물이 늘어난 것 같지?’
은새가 목 스트레칭을 하는 척 주변을 돌아보았다.
전에는 안 보이던 화분들이 곳곳에 놓여 있었다. 종류별로, 꽃과 나무 가릴 것 없이 다양했다.
은새가 헛웃음을 삼켰다.
‘아마 봄이가 라운지에 있는 나무를 거대하게 만든 이후부터인 것 같은데.’
속 보이는 짓이었다. 그들은 봄이가 또 기적을 보여 주기를 기대하는 모양이었다.
무시하고 별이와 딸기 생크림 케이크를 나눠 먹고 있는데 앞자리에 누군가 털썩 앉았다.
‘안 나타나면 서운할 뻔했네.’
이미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양설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보호자도.
은새와 눈이 마주친 왕호연이 어색하게 웃었다.
“양설 헌터, 또 왔네요. 왕호연 헌터도요.”
은새는 천연스럽게 인사를 건넸다. 대꾸도 없이 양설이 뚫어질 듯이 그녀를 노려봤다.
그래 봐야 무섭지도 않아서 은새는 용건을 말하라는 듯 눈을 깜빡였다.
늘 그렇듯 되도 않는 시비를 걸어올 거라 생각했는데, 양설은 의외로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당신, ……무슨 생각으로 여기에 있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