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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키운 마수가 드래곤을 물고 왔다 (117)화 (117/190)

116화 - 혹시 이렇게 해 줄 수 있으세요?

은가시나무 던전?

당연히 기억하고 있었다. 거기서 은새가 저주에 걸려 하마터면 죽을 뻔했으니까.

하지만 유길선이 이 시점에 그 던전을 언급한 의도가 의미심장했다.

떨떠름한 기분을 삼키며 은새가 느지막하게 대답했다.

“네, 기억나네요.”

“유은새 헌터는 그때 레이드에 참가하고 2년 뒤 잠정적 휴식기를 가졌었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냥 쉬고 싶었어요. 그러다가 우연히 아기를 맡아 키우게 되었고요. 아실 텐데요?”

은새의 충격적인 결혼설은 외신에까지 보도되었다.

결국 오해로 밝혀졌지만 그로 인해 아기의 존재가 알려졌으니 유길선이 모를 리 없었다.

“혹 던전 보스의 저주 때문이 아닙니까?”

“…….”

갑작스레 터진 직구에 은새는 말문이 막혀서 바로 반응하지 못했다.

유길선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가 살짝 떨렸다.

‘어떻게 알았지?’

친구들을 제외하면 누구도 은새가 저주에 걸렸던 걸 알지 못했다.

그때 한 가지 가정이 뇌리에 꽂혔다. 중국에도 저주에 걸린 사람이 있나?

‘……혹시 유길선 길드장 본인은 아니겠지.’

자신의 대답이 불러올 파장을 가늠할 수 없어 은새는 일단 발뺌했다.

“그런 질문을 하시는 이유를 모르겠네요. 제가 저주에 걸린 것처럼 보이세요?”

“그래서 묻고 싶은 겁니다. 어떻게 저주를 없앴습니까?”

하지만 그녀의 잔꾀는 유길선에게 통하지 않았다.

그는 확신에 찬 눈빛으로 그녀를 봤다.

“힐러의 치유도, 고등급 헌터의 해주 스킬도 통하지 않는 그 저주. 긴 시간 동안 장기를 손상시키고 끔찍한 고통에 시달리다가 절명하게 만드는 그것 말입니다.”

심지어 그는 저주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었다.

이로써 확실해졌다.

“그때 레이드에 참가했던 중국 측 헌터 중에 저주에 걸린 사람이 있나요?”

“네.”

결심하고 온 만큼 유길선의 대답은 망설임 없이 나왔다.

“우리가 유은새 헌터를 놓아드릴 수 없는 이유입니다.”

그는 빛 한 점 들지 않는 어둑한 시선으로 은새의 표정 변화를 관찰했다.

처음에 당황하는 듯 보였던 그녀는 이내 상황을 이해하고 침착함을 유지했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유길선은 조급함을 느꼈다.

백방을 뒤져 간신히 잡아낸 실마리이다. 사영을 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은새의 협조가 필요했다.

“안타까운 일이네요. 그분이 많이 힘드시겠어요.”

적요를 깬 은새의 첫 말은 연민이었다.

됐다. 유길선은 기대감에 부풀었다.

이대로 은새가 동질감이라도 느껴 해주법을 흘려주기만 한다면…….

본인도 그 저주에 걸려 봤으니 겪는 고통이 얼마나 괴롭고 끔찍한지 잘 알겠지.

하지만.

“그런데 왜…… 제가 해주법을 알려 드릴 거라고 생각하세요?”

유길선의 기대는 산산이 부서졌다.

“중국이 제게 한 짓이 있는데 그런 걸 쉽게 알려 드릴 리가요. 혹 사람 목숨이 걸린 일이라고 제가 측은지심이라도 발휘할 것 같았어요? 호의를 사고 싶었으면 처음부터 호의로 다가왔어야죠. 그런데 중국과 유길선 길드장님은 제게 어떻게 했죠?”

“……유은새 헌터.”

“봄이에 해주법까지. 중국은 너무 욕심이 과한 것 같네요.”

남들이 잘못 알고 있는 게, 은새는 선한 인물이기는 해도 순진하지 않았다.

적어도 상대가 진정 도움이 필요한 건지 이용하려는 건지 정도는 구분했다.

저주에 걸렸다는 그 사람의 일은 안타깝지만 유길선은 명백히 후자였다.

‘원하는 것만 취하고 입 싹 씻을 생각이겠지.’

사람 목숨을 두고 거래하자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그건 유길선이 하는 짓이었다.

‘생명이 위태로운 사람이 있으니 도와라. 그렇지 않으면 너는 인간도 아니다…… 뭐 그런 건가?’

인간적인 정에 호소하고 싶었으면 처음부터 그랬어야지.

만약 은새가 한국에 있을 때 유길선이 내밀한 사정을 밝히고 도와달라고 했으면 그녀는 선뜻 그에 응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중국과의 관계는 틀어졌고 은새는 순진하게 이용당할 생각이 없었다.

‘사람부터 살리고 보자, 같은 건 은혜를 입은 쪽이 필시 보은하리라는 믿음을 가졌을 때나 가능하지.’

하지만 은새는 중국에 헛된 기대감을 품지 않았다.

오히려 뒤통수 맞는 걸 경계했다.

‘유은새……. 유은새!’

그 순간 유길선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마지막 희망이 날아가자 그는 이성을 잃었다.

유은새한테 이 사실을 알리면 안 됐다.

그건 유길선의 역린이나 다름없었으므로 약점을 들킨 뒤에 은새가 어떻게 나올지는 자명했다.

하지만 사영의 목숨이 위험했다.

앞으로 그녀가 얼마나 버텨 줄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었기에 어떻게 해서든 은새의 입을 열어야 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활화산처럼 이글거리는 눈빛을 한 유길선이 몸을 일으켰다.

“유은새 헌터가 마수들을 위해서라면 못 할 짓이 없다고 했듯, 저 또한 해주법을 얻기 위해서 못 할 짓이 없습니다.”

“…….”

“시간을 많이 드릴 수 없으니 잘 생각해 보시기를.”

성큼성큼 룸을 걸어 나가는 유길선의 뒷모습을 은새가 황당하게 응시했다.

“뭘 어쩌려고…….”

“은새, 저자를 자극해도 되겠나?”

“벨키오르 님, 계셨네요.”

은새는 놀라지도 않고 그를 맞이했다.

면전에서 협박을 듣고도 아무렇지 않은 은새를 유심히 살핀 벨키오르가 유길선이 앉았던 자리를 차지했다.

“저런 눈빛을 한 자는 쉽게 물러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겠죠. 사람 목숨이 걸린 일인데 저도 끝까지 모질게 굴고 싶지 않아요.”

은새가 속눈썹을 내리깔았다.

자신이 저주에 걸렸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친구들이 해주법을 찾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니던 게 생각났다.

‘간절하겠지.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붙잡으려고 안 해 본 게 없을 거야.’

“그나저나 누굴까요? 청화 길드의 길드장이 구하려는 자가…….”

은새는 한중일 연합 레이드 때 참가했던 중국 측 인사들을 떠올려 보려고 했으나 시간이 오래 지나서 그런지 잘 생각나지 않았다.

아무래도 한국에 연락해 목록을 얻어 달라고 해야 할 듯싶었다.

“그런데 벨키오르 님, 제가 걸렸던 저주 말이에요. 아라크네의 저주. 해주법이 정확히 뭐예요?”

“글쎄. 알려 달라고 하면 알려 줄 수는 있지만 다른 이에게 그대로 적용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네? 왜요?”

“그대에게 사용한 방법은 드래곤의 비술이니까.”

비술의 드래곤, 산체스.

벨키오르가 거래를 청한 건 인간이 범접할 수 없는 드래곤의 술법을 다루는 자였다.

그래서 세계수의 뿌리나 드래곤의 피 같은 말도 안 되는 재료가 필요했던 것이었다.

‘내 피를 요구한 건 그저 산체스의 심술일 테지만.’

순전히 은새가 벨키오르의 가호를 받는 인간이었기에 산체스가 직접 나선 것이었다.

그녀가 다른 인간을 위해 술법을 펼칠 이유는 없었다.

진실을 알게 된 은새가 당혹스러워했다.

“어…… 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

“후유증을 완전히 없애지는 못해도 생명을 부지하는 정도로 간소화한 방법을 쓰면 된다. 그거라면 인간도 다룰 수 있을 테니.”

“그럼 다행이에요. 그거라도 알아봐 주실 수 있나요?”

“그러지.”

긴장이 풀어진 은새가 소파에 늘어졌다.

벨키오르가 마법으로 냉장고에서 생수를 꺼내 와 뚜껑을 딴 채로 그녀의 손에 쥐여 줬다.

생수와 벨키오르를 본 은새가 배시시 웃었다.

“고맙습니다. 제가 목마른 줄도 몰랐어요.”

“은새. 봉인된 던전에 대해 할 얘기가 있다.”

“봉인된 던전을 보고 오셨어요?”

“그래. 반경 200km 안에 있는 던전들은 일시에 터질 것이다. 아마도 해가 바뀌기 전에.”

“큭! ……뭐, 뭐라고요?”

물을 마시다 사레에 들린 은새가 기침했다.

벨키오르가 자리를 옮겨 은새의 옆으로 가 등을 쓸어 주었다.

눈가가 빨개진 은새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후아, 깜짝이야. 벨키오르 님은 왜 그런 말을 제가 물 마실 때 하세요.”

“이렇게 놀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미안하군.”

“아니에요. 사과받으려고 한 건 아니고요. 음……. 던전 관리 잘하고 있다고 했는데 소용없나 보네요.”

은새는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겼다. 해가 바뀌려면 몇 달 남지 않았다.

봄이와 중국.

유길선과 저주.

그녀가 반짝 벨키오르를 돌아보았다.

“벨키오르 님, 혹시 이렇게 해줄 수 있으세요?”

***

왕호연과 양설은 다른 층 룸에 있었다.

그들은 한국에서의 공적으로 유길선에게 이곳에 있는 걸 허락받았지만 환영받는 존재는 아니었기에 돌아다니지 않고 대부분의 시간을 실내에서 보냈다.

양설은 모처럼 만에 거울 앞에 섰다.

눈꼬리가 한껏 치켜 올라가 가만히 있어도 사나워 보이는 얼굴.

‘짜증 나.’

이 얼굴 때문에 양설은 어딜 가나 곧잘 시비에 걸리고는 했다. 별의별 오해도 많이 받았고, 맞기도 많이 맞았다.

시선을 내리니 은새가 말한 것처럼 제법 봐 줄 만한 체형이 시야에 들어왔다.

체력 단련을 하지 않아 물 몸이나 다름없었지만 헌터 보정을 받아 일반인보다는 튼튼한 몸.

그동안은 아무 생각 없었는데 이번 작전에 투입되면서 유일하게 유은새와 닮은 점이라 다행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때 양설의 귓가로 단조롭지만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체력은 모든 활동의 밑바탕이 돼요.’

‘셀프 칭찬하는 것 같아서 좀 그런데 체형이 정말 예뻐요. 그러니까 운동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분명 더 근사해질 거예요.’

필연적으로 목소리의 주인을 떠올린 양설이 안 그래도 사나운 인상을 험악하게 구겼다.

“그 여자 진짜 짜증 나.”

무뚝뚝한 표정을 짓고도 본래 생김새가 선해 조금도 미워 보이지 않는 여자.

자신들이 꾸민 계략에 빠져 이곳까지 끌려왔으면서도 조금도 기죽지 않고 유길선 길드장과 당당히 맞서는 여자.

“유은새…….”

짓씹듯이 그 이름을 내뱉은 양설이 거울 앞을 벗어나 터덜터덜 침대에 몸을 던졌다.

게임 하는 척, 그녀의 행동을 살피던 왕호연이 헤드셋을 벗어 던졌다.

“양설, 너 왜 그렇게 그 사람을 신경 쓰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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