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 실제로 만난 건 처음이네?
그 후로 며칠 동안 은새와 청화 길드의 기 싸움이 벌어졌다.
유길선은 이틀, 혹은 사흘에 한 번씩 은새를 찾아와 똑같은 말을 늘어놓았고 은새는 코웃음 치며 한 귀로 흘려보냈다.
유길선과 만나는 동안 은새는 그의 표정을 면밀히 살폈다. 하지만 그는 그린 듯한 미소를 짓고 있을 뿐 쉽게 속내를 내보이지 않았다.
분명 원하는 게 있는데…….
변화는 또 있었다. 은새의 감금 범위가 룸에서 호텔 전체로 확대되었다는 것이었다.
강원도 산골에서 자유롭게 살던 봄이가 한 장소에 억류되자 빼앵 울기 시작한 게 이유였다.
“봄이야, 착하지. 울지 마.”
삐! 삐이이…….
서러운 눈물을 뚝뚝 흘리는 봄이는 왜 은새가 룸에서 자신을 못 나가게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봄이 왜 우러…….]
봄이가 울자 별이도 안절부절못하며 주변을 날아다녔다.
그 광경을 망연하게 보고 있던 은새가 결심한 듯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안 되겠어.”
성큼성큼 거실을 가로질러 걸어간 그녀는 문을 벌컥 열고 헌터들이 반응하기 전에 바로 요구했다.
“봄이가 갇혀 있는 걸 너무 답답해해요. 산책로라든가 다른 시설을 개방해 주세요.”
“불가합니다.”
“봄이가 운다고!”
기어코 은새가 화를 냈다.
그녀 본인은 백날천날 갇혀 있어도 상관없었지만 아이들까지 이래야 하는 건 가혹했다.
애당초 중국의 목표가 봄이가 아니었으면 이런 곳에 데려오지도 않았다.
은새가 위압감을 뿜으며 헌터들에게로 다가섰다.
“당신들이 그렇게나 원하는 봄이가 운다고. 우리 봄이 잘못되면 어떡할 거야? 당신들이 책임질 수 있어?”
“…….”
“유길선 길드장님 불러오세요. 아니면 비협조적인 게 뭔지 제대로 보여 줄 테니까.”
지금까지 은새는 그다지 협조적이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비협조적이지도 않았다.
룸에 있으라고 하면 있었고 요구 사항이 있으면 말하라는 말에 그렇게 했다.
유길선이 찾아오면 들여보내 주고 무어라 떠들면 들어 주기는 했다.
탈출을 시도하지도, 룸을 난장판으로 만들지도, 헌터들을 공격하지도 않았다.
뭐든 그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보여 주겠다는 은새의 선명한 의지에 헌터들이 시선을 교환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한 명이 자리를 벗어났다. 은새는 들어가지 않고 문가에 기대어 서서 통로 끝에서 올 사람을 기다렸다.
“저를 불렀다고 들었습니다, 유은새 헌터.”
얼마 지나지 않아 유길선이 모습을 드러냈다.
은새는 에두를 것 없이 곧장 본론을 얘기했다.
“룸에서 나가게 해 주세요. 봄이는 태어나서 줄곧 자유롭게 지냈어요. 이런 환경은 봄이에게 해로워요.”
“곤란하네요.”
유길선의 시선이 잠시 은새의 얼굴을 훑었다. 다른 의도가 있는 건 아닌지 알아내려는 눈빛이었다.
“유은새 헌터, 현재 자신의 처지를 망각한 건 아니겠지요?”
“길드장님께서 제 요청을 승낙하지 않을 시 당신들이 원하는 그림에서 멀어질 거라는 건 잘 알고 있죠.”
“하지만 그 요구를 받아들인다고 해서 긍정의 대답을 줄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두 사람이 팽팽하게 맞섰다.
은새가 표정을 딱딱하게 굳혔다.
“그럼 협상은 결렬이네요. 더는 여기 있어야 할 이유가 없겠어요.”
“…….”
“저는 제 마수들을 위해서라면 못 할 짓이 없거든요.”
유길선의 입가에서 미소가 걷혔다.
지금 은새는 셔터 아이템으로 아공간도 봉인된 상태고 전력이라고 부를 만한 것도 없었다.
‘그런데 저 자신감은 뭐지?’
숱한 위기를 헤쳐 온 유길선의 감이 그녀가 하는 말이 단순한 허세가 아니라고 경고했다.
‘그러고 보니 잠입시켜 놓은 은신 능력자도 바로 눈치채고 쫓아냈다고 했지.’
S급이었다. 그 헌터의 등급은.
아무리 은새가 기감이 예민해도 며칠은 갈 거라고 생각했는데.
유길선은 냉정하게 따져 보았다.
은새가 이 호텔에 대기 중인 헌터들을 모두 때려눕히고 탈출할 확률.
봉쇄 구역을 벗어나 추적을 따돌리고 한국으로 돌아갈 확률.
그 모든 게 희박하기만 한데 왜…… 선뜻 그러라는 말이 안 나올까.
유길선이 길게 한숨을 쉬었다.
“어쩔 수 없네요. 저는 웬만하면 유은새 헌터와 잘 지내고 싶거든요. 호텔 내 시설을 자유롭게 이용해도 좋습니다. 단, 호텔을 벗어나는 건 안 돼요. 감시하는 인력이 늘 따라다닐 테니 양해 바랍니다.”
“그러시든가요.”
코웃음 친 은새가 문을 쾅 닫고 들어갔다.
유길선이 헌터들에게 당부했다.
“따라다니면서 잘 살펴봐. 그녀는 분명 숨기는 게 있다.”
“예, 길드장님.”
***
호텔을 자유롭게 돌아다녀도 된다는 허락을 얻어 낸 은새는 별이와 봄이를 데리고 곳곳을 누볐다.
벨키오르는 아침에 룸서비스로 시킨 식사를 같이한 뒤 모습을 감췄다. 하지만 근처에 있으리라는 걸 알아 은새는 불안해하지 않았다.
아쉽게도 산책로는 외부에 있어서 나갈 수 없었다. 대신 그녀는 되도록 넓은 공간을 찾아다녔다.
삐! 삐빗!
룸에서 벗어난 것만으로 봄이는 기분이 나아졌는지 활기차게 날아다녔다.
강원도 산천처럼 푸르지는 않았지만 호텔은 커다랗고 반짝반짝하고 화려해서 봄이의 혼을 쏙 빼놓았다.
고급스러운 레스토랑과 바, 헌터 훈련 시설을 갖춘 피트니스 센터와 실내 수영장, 스파 시설 등을 돌아보았다.
‘나중에 피트니스 센터 이용해 봐야겠다.’
설마 구경만 하라고 하지는 않겠지?
은새가 호텔에 대한 평가를 내리고 있을 때 지친 봄이가 라운지에서 관상용 나무를 발견하고 냉큼 그 위에 올라앉았다.
은새네 집 뒷마당에 있는 세계수 분목에서 시간을 보내던 버릇 때문이었다.
삐이?
어라? 이상하네. 항상 올라가는 나무보다 작아.
봄이는 머리를 갸웃갸웃하다가 능력을 사용했다.
작으면 내가 크게 만들면 되겠다!
은새가 말릴 새도 없이 분홍빛 물결이 나무를 휘감았다.
이능을 흡수한 나무는 화분을 깨고 천장까지 닿을 정도로 급속도로 성장했다. 굵은 뿌리가 사방으로 뻗치고 나뭇잎이 무성해졌다.
깔끔하고 세련되었던 라운지 한복판에 갑자기 거목 한 그루가 자리하게 되었다.
“춘티엔더야오칭 님이 능력을 사용했어!”
“과연 화타의 신수…….”
은새를 감시하기 위해 따라다니던 청화 길드 헌터들이 놀라운 광경을 목격하고 흥분을 주체하지 못했다.
무게감을 잡던 그들이 호들갑 떠는 모습이 웃겨 은새는 헛웃음을 지었다.
‘아이고.’
그녀는 약간 곤란하다는 듯 눈썹을 매만졌다.
안 그래도 봄이를 탐내는 이들투성이인데 이런 걸 보여 주고 말았으니.
“봄이야.”
삐이?
“음, 아니야. 너 하고 싶은 대로 다 해. 하지만 건물 안에서는 자제하자.”
봄이가 춘티엔더야오칭인 것도 맞고, 식목과 관련된 능력을 가진 것도 맞다.
영원히 꽁꽁 숨길 게 아니라면 봄이가 원하는 대로 하게 두는 게 나았다. 중국의 눈치를 볼 거였으면 여기 안 왔지.
“얘들아, 다 구경했으면 그만 방으로 돌아갈까?”
봄이가 졸려 하는 게 보여서 은새는 봄이를 안고, 별이를 어깨에 올린 채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그런데 룸 안에 선객이 있었다.
은새가 들어가지 않고 문 앞에 서 있자 청화 길드 헌터들이 내부를 살폈다.
그들이 예고 없이 찾아온 방문객들을 보며 표정을 굳혔다.
“왕호연 헌터, 양설 헌터. 왜 여기 있습니까?”
아는 사이가 분명한데 양측이 팽팽하게 대립했다.
이 호텔에 있는 거 보면 같은 청화 길드원 아닌가?
은새는 끼어들지 않고 상황을 잠시 지켜봤다.
이 자리가 불편한 듯한 왕호연과 달리 양설은 삐딱한 자세로 헌터들을 향해 비아냥거렸다.
“왜? 우리가 오면 안 될 곳에 왔나?”
“길드장님께 허락은 받았습니까?”
“허락이 왜 필요하지? 유은새가 여기 있는 게 다 누구 덕분인데.”
자신이 언급되자 은새가 왕호연과 양설을 주의 깊게 살폈다.
‘처음 보는 얼굴이야. 그런데 방금 한 말은 뭐지?’
은새가 그들에게 관심을 가지는 듯 보이자 청화 길드 헌터가 다급히 막아섰다.
양설의 입을 막으려는 목적이었으나 실패했다.
“길드장님께 보고하겠습니다.”
“그러든가 말든가. 얼른 뛰어가서 우리가 여기 있다고 일러바쳐야 하지 않겠어?”
목줄 맨 개처럼 헐레벌떡 말이지.
우스꽝스러운 시늉을 하는 양설 때문에 모욕감을 느낀 헌터들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러거나 말거나 양설은 단호하게 축객령을 내렸다.
“방해하지 말고 나가. 나는 이쪽에 볼일 있으니까. 길드장님 명령 없이 우리 몸에 손댈 생각은 아니겠지?”
“…….”
헌터들이 말없이 그녀를 노려보다가 물러났다. 아무래도 방문객 쪽이 직급이 높은 듯했다.
“……주제에.”
……뭐?
헌터들이 룸을 나가기 전 중얼거린 말에 은새가 귀를 의심했다.
‘방금 출신이 천한 사람을 부르는 멸칭이 들린 것 같은데?’
그녀는 황당하게 닫힌 문을 바라봤다. 헌터의 감각은 예민하다. 저나 저 양설이라는 사람 들으라고 한 소리 같은데…….
“유은새 헌터, 실제로 만난 건 처음이네?”
하지만 양설은 아무렇지 않게 모욕을 흘려 넘겼다. 익숙한 일인 것처럼.
은새는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보다 거의 잠들기 직전인 봄이의 등을 도닥였다.
“용건이 뭔지 모르겠지만 빨리 끝내고 나가 주시겠어요? 불청객인 건 그쪽이나 저쪽이나 마찬가지라서.”
어깨 위에 앉은 별이가 꼬리를 바짝 세우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쪽이 누군지 저는 잘 모르겠네요. 이름은 들었고, 뭐 하시는 분이세요?”
“……하! 나를 몰라?”
양설은 멸칭을 들었을 때보다 은새가 자신을 모르는 걸 더 분해했다.
씩씩거리던 그녀는 이능을 일으켰다.
은새가 본능적으로 방어 자세를 취했으나 양설이 그녀를 공격하는 일은 없었다.
“이러면 알겠지.”
흘러나온 이능이 양설의 얼굴을 덮었고 이내 그녀의 얼굴이 변했다.
거울을 보는 듯 은새와 꼭 닮은 외형.
“아…….”
[뉴나?!]
당황한 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은새는 그제야 양설의 체형이 자신과 비슷하다는 걸 눈치챘다. 키는 좀 작아도.
두 사람이 마주 서 있으니 마치 은새 본인이 두 명 있는 것 같았다.
“변용 스킬……. 당신이었군요. 나인 척 사건을 꾸미고 다닌 사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