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 나도 그대가 그리웠다
허기를 느낀 봄이가 먼저 잠에서 깨 은새를 깨웠다.
삐이. 삣!
“으음……. 봄이 일어났어?”
눈을 비비며 일어난 은새가 낯선 천장을 보고 자신이 집이 아니란 걸 깨달았다.
맞다……. 나 지금 중국이었지.
그녀는 기지개를 켜며 잠을 몰아냈다. 아무리 그래도 애들 밥은 굶기면 안 된다는 생각에 은새는 실내화를 꿰어 신고 침대에서 벗어났다.
굳게 닫힌 문을 열어젖히자, 그 앞을 지키고 있던 청화 길드 헌터들이 뒤를 돌아봤다.
경계 어린 시선이 은새의 얼굴에 달라붙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식사 가져다주세요. 한식으로요. 그리고 봄이 몫은 신선한 채소와 과일, 식용 꽃으로 준비해 주시고요.”
그러거나 말거나 은새는 당당히 제 용건을 밝혔다.
“아, 디저트도 다양하게 챙겨 주세요. 별이가 좋아해서요.”
할 말이 끝나자 그녀는 대답을 듣지도 않고 면전에서 문을 쾅 닫았다. 어차피 갇혀 있는 처지에 저들에게 잘 대해 줄 이유가 없었다.
미리 준비하고 있었던 듯 식사는 생각보다 빨리 준비되었다. 카트에 실려 줄줄이 들어오는 음식을 보며 은새가 팔짱을 꼈다.
‘설마 음식에 장난질을 쳐 놓지는 않았겠지?’
이러기 싫은데 상대가 상대이다 보니 하나부터 열까지 다 의심하게 된다.
그녀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식탁 위에 차려진 음식들을 바라보다 아직 곤하게 잠들어 있는 별이를 깨웠다.
“별아, 일어나서 밥 먹자.”
[으음……. 뉴나?]
“응. 배 안 고파? 별이가 좋아하는 불고기랑 계란찜도 있어.”
[머글래요…….]
별이가 꾸물꾸물 일어나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후아암. 귀엽게 하품하는 별이를 은새가 안아다 식탁 앞에 앉혔다.
그녀가 젓가락을 들자 별이가 스톱을 외쳤다.
[잠깐만요, 뉴나! 아빠가 먹는 거 다 검사하랬어요.]
“벨키오르 님이?”
은새가 눈을 깜빡이고 있자 별이가 개나리색 마력을 피워 올렸다.
마법으로 음식에 해로운 성분이 없나 확인한 별이가 됐다는 듯, 머리를 크게 끄덕이며 입맛을 다셨다.
[이제 머거요! 뉴나, 나 계란찜부터 주세요.]
“응. 덜어 줄게.”
삐빗! 삣!
봄이는 진즉 샐러드가 담긴 보울을 차지하고 앉아서 맛있다고 삐약거렸다.
아이들을 챙기며 된장찌개를 한 번 떠먹은 은새는 내심 놀랐다.
‘제대로인데?’
입맛에 맞지 않아 고생할 걱정은 덜어도 될 듯했다. 은새는 밥 한 공기를 쓱싹 비워 냈다.
다음 식사는 피자와 오븐스파게티, 버팔로윙으로 했다.
민간인이 살지 않는 봉쇄 구역에서 해당 음식이 되는지 어떤지는 은새가 고려해야 할 사항이 아니었다.
그녀는 원하는 걸 요구하고, 청화 길드는 그게 무엇이든 들어주어야 했다.
이 정도도 못 하면서 ‘최상위 대우’ 운운하면 부끄러운 일이지.
‘다음에는 어떤 요리를 시킬까…….’
부른 배를 두드리며 은새가 소파에 앉아 리모컨을 들었다. 별이와 봄이가 조르르 옆에 붙어 앉았다.
티브이를 켜자 채널 목록이 떴다.
‘음? 한국 방송도 볼 수 있네?’
중국은 방송 규제가 심해서 안 되는 거 아니었나?
이유는 모르겠으나 나쁘지 않은 일이다. 은새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어린이 프로그램을 틀어 놨다.
익숙한 오프닝 송이 흘러나오고 별이와 봄이는 푹 빠져들었다.
‘몸을 하도 안 움직였더니 찌뿌드드하네. 땀 좀 빼야겠다.’
마침 공간도 넓어서 적당했다. 은새는 수건 같은 간단한 도구를 이용해 뭉친 근육을 풀었다.
더 찾아오는 사람 없이 하루를 마무리한 은새는 별이와 봄이를 재우고 혼자서 거실 통유리창을 내다봤다.
어둠에 잠긴 황폐한 도시 속, 그녀가 있는 호텔만이 환하게 빛났다.
‘꼭 아포칼립스에서 살아남은 생존자가 된 기분인데…….’
야경이라고 해도 볼 게 없었다. 그녀의 관심이 저 멀리, 건물들 사이로 보이는 희미한 푸른빛에 미쳤다.
낮에는 미처 발견하지 못했는데 분명 던전 포털에서 흘러나오는 빛이었다.
봉인된 던전이었다.
은새는 기가 찬 탄성을 흘렸다.
“와아. 내가 살면서 오션뷰, 리버뷰, 숲뷰, 시티뷰 온갖 뷰란 뷰는 다 경험해 봤지만 위험천만한 던전뷰는 또 처음이네. 무슨 생각으로 이 자리에 호텔을 지었을까?”
공략이 끝난 던전이라면 상관없다. 실제로 민가에서 던전이 발생하기도 하니까.
하지만 저건 시한폭탄이잖아. 저거 터지면 근방이 다 쑥대밭이 될 텐데.
대범한 건지 안일한 건지 모르겠다며 은새가 혀를 쯧쯧 차고 있을 때였다.
통유리창에 그녀 말고도 다른 사람이 비쳤다.
“은새.”
“까, 깜짝이야! 벨키오르 님?”
기척 없이 다가온 인영에 은새의 어깨가 튀어 올랐다.
가슴을 쓸어내린 그녀는 상대와 눈을 맞추고 기쁜 기색을 여실히 드러냈다.
고르고 하얀 이가 다 보일 만큼 환한 미소가 피어났다.
“정말 오셨네요. 믿고는 있었는데 시간이 더 걸릴 줄 알았어요. 헤매지는 않으셨어요?”
“그대가 어디에 있든 내가 그대 곁으로 갈 것이라고 하지 않았나.”
벨키오르가 손을 뻗어 모양이 예쁜 은새의 귓가를 매만졌다.
그녀는 별이가 그러는 것처럼 머리를 기울여 곧고 다정한 손에 얼굴을 기댔다.
익숙한 온기에 닿은 것만으로 은새는 긴장이 풀리고 편안함을 느꼈다.
보기 좋게 발그스름해진 말간 낯을 보며 벨키오르가 그녀에게 조금 더 다가섰다.
“이 건물에 모인 이들이 제법 되더군. 저자들이 그대에게 해를 끼치지는 않았나?”
“전혀요. 아직 특별한 움직임은 없네요.”
그녀는 인간과 전혀 다른, 현실성 없이 아름다운 금색 눈동자를 멀거니 올려다보다가 용기 내어 제 속내를 조심스럽게 털어놓았다.
“보고 싶었어요, 벨키오르 님.”
잠깐 떨어져 있었을 뿐이지만 거리가 멀어져서 그런지 보고 싶더라고요.
벨키오르는 솔직하게 제 마음을 전해 오는 반려를 품에 끌어당겼다. 샴푸 냄새 사이로 그녀 본연의 체향이 맡아졌다.
달콤하게만 느껴지는 향기를 벨키오르는 폐부 가득히 들이마셨다. 그제야 불안하게 날뛰던 신경이 누그러졌다.
그들이 헤어져 있었던 시간은 고작해야 이틀이었다.
하지만 그 짧은 시간마저도 애가 닳아서 다른 데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오직 은새의 향방을 뒤쫓는 것밖에는.
“나도 그대가 그리웠다.”
가감 없는 그의 진심이었다.
은새는 그의 품을 더욱 파고들며 턱 밑에서 찰랑이는 감정을 삼켰다.
‘역시 이분이 좋아…….’
벨키오르가 좋았다.
그를 곤란하게 만들기 전에 이 마음을 멈춰야 하는데, 당장은 아무 생각도 안 들 정도로.
잠시 뒤 벨키오르와 너무 오래 붙어 있었다는 걸 깨달은 은새가 새빨개진 얼굴로 벨키오르에게서 벗어났다.
“흠! 흠흠.”
너무 질척거렸나? 포옹에 사심이 담긴 걸 들킨 건 아니겠지?
은새는 시선을 모로 빗기며 화제를 바꾸었다.
“벨키오르 님, 혹시 제 친구들은 만나셨어요?”
“……그들이 이걸 전해 달라고 하더군.”
벨키오르가 탐탁지 않다는 투로 은새에게 손바닥만 한 무언가를 건넸다.
그녀에게 친구들의 존재가 소중한 건 알지만 마치 중요한 순간을 방해받은 기분이었다.
“이건!”
그것의 정체를 알아본 은새가 반색했다. 도천 전자 자체 기술로 개발한 추적이 되지 않는 단말기였다.
게다가 거리나 지형에 구애받지 않고 교신할 수 있어 특수 목적으로 사용되는 물건이었다.
그만큼 단순한 기능밖에 사용할 수 없었지만 친구들과의 연락 수단으로는 충분했다.
안 그래도 한국을 떠나기 전, 우리가 이 단말기를 은새에게 챙겨 주려고 했었다.
하지만 중국에 도착하면 어차피 소지품을 다 못 쓰게 될 것 같아서 거절했는데.
“이걸로 친구들한테 연락할 수 있겠어요. 아……. 근데 숨길 데가 없네요.”
“왜? 그대에게는 아공간이 있지 않나?”
“이것 때문에요.”
은새가 팔을 들어 셔터 아이템을 내보였다.
팔찌를 살펴본 벨키오르가 미미하게 눈썹을 찌푸렸다.
“별짓을 다 하는군.”
벨키오르가 팔찌를 향해 손을 뻗자 은새가 놀라서 뒷걸음질 쳤다.
“뭐, 뭐 하시려고요?”
“부술 것이다.”
“저도 같은 생각이지만 부수는 건 안 돼요. 어차피 또다시 채울걸요?”
벨키오르가 팔찌를 지그시 노려보다가 기세를 낮추고 은새에게 부드러이 손을 내밀었다.
경계하지 말라는 것처럼.
“그러면 외관만 남기면 되겠지.”
“그게 가능해요……?”
은새가 머뭇머뭇 벨키오르에게 다가갔다.
그는 그녀의 손목을 붙잡고 팔찌에 금빛 마력을 불어넣었다.
작업이 끝났을 때 셔터 아이템은 외관상으로는 멀쩡했다. 은새가 머리를 갸웃했다.
“겉보기에 뭔가 달라진 것 같지는 않은데요?”
“아공간을 불러 봐라.”
“어, 된다! 벨키오르 님, 돼요!”
은새의 손에 들려 있던 단말기가 아공간으로 빨려 들어갔다. 물론 소환도 가능했다.
“이러면 눈속임을 할 수 있겠어요. 정말 감사해요, 벨키오르 님!”
벨키오르는 좋아하는 은새를 보며 흡족해했다.
그딴 장난감으로 은새를 억압하려 하다니. 밖에 있는 자들이 괘씸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런데 벨키오르 님, 이제 어떻게 하실 거예요? 낮에는 사람도 왔다 갔다 해서 벨키오르 님이 여기 계신 걸 들키면 안 되는데.”
“그건 내가 알아서 하겠다. 은신 마법으로 몸을 숨기고 있어도 되고, 적당히 근처에 있어도 되니까.”
은새에게는 말은 안 했지만 그는 미리내에게 부탁받은 게 있었다.
벨키오르가 이곳에 오기 전, 은새가 봉인된 던전이 있는 지역에 억류되었다는 얘기를 들은 도천 크루는 그에게 던전을 살펴봐 줄 것을 청했다.
벨키오르는 이를 거절하려 했으나 은새가 한국에 돌아올 수 있는 시기를 앞당길 수 있다는 말에 마지못해 승낙했다.
‘무슨 생각인지는 알 수 없지만…….’
반려를 위해서라면 자신이 조금 수고로운 일을 해도 상관없었다.
밤이 늦어 은새를 침실로 들여보낸 벨키오르는 한참 동안 어둠에 잠긴 도시를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