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 더 탐이 나는군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 지역의 봉인된 던전은 청화 길드에서 철저히 관리하고 있습니다.”
은새의 우려를 읽은 것처럼 황자문이 말했다.
잘 관리되고 있거나 어쨌거나 사람이 살지 않는 위험 구역으로 자신을 데려온 의도는 투명하게 느껴졌다.
‘이목을 피하기도 쉽고 나를 심리적으로 압박하기도 좋고.’
하지만 이런 것에 굴할 은새가 아니었다. 무심한 얼굴로 그녀는 별이와 봄이를 잘 추슬러 안았다.
그다지 동요하지 않는 그녀를 본 황자문이 입가를 조금 움찔거렸다. 하지만 금방 아무렇지 않게 그녀를 이끌었다.
“이곳에 계시는 동안 최대한 편의는 봐 드리겠습니다. 들어가시지요. 안에서 유길선 길드장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청화 길드의 유길선 길드장. 은새가 그를 마지막으로 만난 건 한중일 연합 레이드 때였다.
북한의 SS+급 은가시나무 던전. 그녀를 저주에 걸리게 했던 바로 그 던전이었다.
황자문을 따라 호텔로 들어가자 외관만큼이나 내부 역시 엄청났다.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웬만한 5성급 숙박시설을 이용해 본 은새도 살짝 놀랄 정도였다.
‘이 정도면 봉인된 던전 관리는 핑계고 거의 길드 사유지처럼 쓰는 거 아니야?’
한국이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뭐, 중국 정부와 청화 길드가 자국의 땅을 어떻게 나눠 먹든 자신이 상관할 바는 아니었다.
곳곳에서 고등급 헌터들의 기척이 느껴졌다. 짐작건대 다 S급.
그리고 아까부터 그녀의 뒤로 은밀한 기척이 느껴졌다.
아마 은신 능력자가 붙은 모양인데, 벨키오르의 마법으로 감지 능력이 상승한 은새는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설마 방 안까지 따라오는 건 아니겠지……?’
그러면 안 되는데. 벨키오르 님이 들어오셔야 하는데.
은새와 아이들, 황자문과 은신 능력자를 태운 엘리베이터는 최상층으로 향했다.
“와…….”
세상의 호화로움을 이곳에 다 모아 놓은 듯했다.
현대식으로 해석한 중국 특유의 문양이 벽에 금으로 조각되어 있고, 가구 하나하나가 다 최고급이었다.
실내 디자인은 세련되었고 아주 작은 부분까지도 신경 쓴 세심함이 돋보였다.
‘천장에 저 반짝이는 것들은 설마 다 다이아몬드인가……?’
은새는 기가 질려 고개를 돌려 버리고 사방을 둘러싼 통유리창 쪽으로 걸어갔다.
사람이 살지 않는 봉쇄된 도시 속, 홀로 빛나며 우뚝 솟은 이 호텔은 이질적이었다.
이걸 누군가는 특권이라 할 것이며, 또 누군가는 부당한 권력의 산물이라고 하겠지.
“마음에 든 모양이군요.”
“…….”
참, 유길선 길드장이 기다리고 있다고 했지.
은새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유길선이 사람 좋게 생긋 웃으며 악수를 청했다.
“오랜만에 보는군요, 유은새 헌터.”
“네. 유길선 길드장님.”
악수를 외면하며 은새가 쌀쌀맞게 대답했다.
어깨를 으쓱한 유길선이 자연스럽게 손을 거둬들였다. 그는 눈동자를 굴려 은새의 품에 안겨 호기심 어린 눈을 반짝이는 봄이를 바라봤다.
“이게 부화한 춘티엔더야오칭이군요.”
“봄이라고 불러 주세요.”
제가 길드장님을 인간이라고 부르면 좋겠어요?
은새의 도발적인 언사에 유길선이 나지막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앉죠. 해야 할 말이 많지만 서서 하기에는 적합하지 않군요.”
은새와 아이들이 룸 한가운데에 자리한 응접 테이블에 앉았다.
유길선이 마주 보는 위치에 착석하며 가장 궁금했던 걸 질문했다.
“어떻게 봄이를 부화했습니까?”
“운이 좋았네요. 저 혼자만의 노력으로 태어난 건 아니에요.”
삐-?
자기 얘기하는 걸 득달같이 알아들은 봄이가 천진하게 고개를 갸웃했다.
은새는 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낯선 곳에 와서도 활발해 보여 다행이었다.
“가능하다면 방법을 알고 싶지만 쉽게 알려 주지 않겠죠?”
“참고로 말하자면 던전을 벗어난 알은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포기하세요.”
마치 한국에 넘긴 알 외에도 더 있으리라는 걸 아는 것처럼 은새가 얘기하자 유길선의 표정이 묘해졌다.
“하지만 유은새 헌터는 부화시켰지 않습니까?”
“…….”
“오직 유은새 헌터만이 가능한 일이라니, 더 탐이 나는군요.”
은새가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유길선은 착각하고 있었다. 은새의 테이밍 능력이 알을 부화시켰을 거라고.
‘엄밀히 말해서 세계수의 힘과 벨키오르 님의 지식으로 해결한 거지만…….’
밝힐 이유가 없었다. 은새가 입을 다물자 유길선이 사람을 시켜 서류를 가져오게 했다.
“아시다시피 주석께서는 춘티엔더야오칭에 대한 관심이 지대하십니다. 반드시 중국으로 데려와야 한다는 강경한 입장이시고요. 그래서 봄이의 소유주인 유은새 헌터의 이민을 적극 권장합니다. 이민을 선택할 경우, 저희 측에서 유은새 헌터에게 드릴 수 있는 혜택입니다.”
곧장 이민 제안이었다.
“유은새 헌터의 경우 최초로 춘티엔더야오칭을 길들인 것 말고도 세계 유일의 몬스터 테이머라는 점, 그리고 국제 사회에서의 지위 등을 고려해 중국 내 최상위 헌터 대우를 약속드리죠.”
“무얼 제시하시든 제가 국적을 바꾸는 일은 없을 거예요.”
서류를 펼쳐 보지도 않고 은새가 딱 잘라 거절했다.
그럴 걸 예상했다는 듯이 유길선이 서류의 내용을 요약해 읊었다.
“자국의 헌터로 활동하면 상상도 못 할 만큼의 천문학적인 부를 거머쥐게 될 겁니다. 단언컨대 지금껏 유은새 헌터가 벌어들인 돈보다 앞으로 5년 내에 벌어들일 돈이 더 많을 것이라고 말씀드리죠.”
“…….”
“그에 더해 주거, 식생활, 문화생활 등 전반적인 생활 양식을 최고 수준으로 제공해 드릴 겁니다. 땅과 부동산, 청화 길드의 주식도 상당량 보유하게 될 거고요. 정책적으로는 세금 감면 혜택과 헌터 특별법에 의거, 면책 특권과 불체포 특권 등이 발효됩니다. 죄를 지어도 법이 유은새 헌터를 최우선으로 보호할 겁니다.”
후자는 현재 한국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두고 하는 말 같았다.
은새는 미미하게 눈썹을 찌푸렸다. 누굴 예비 범죄자로 아나?
그런 건 줘도 안 갖는다.
유길선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유은새 헌터가 원하는 것, 말하는 것, 생각하는 것까지 모두 실현될 겁니다. 당신이라는 인재를 품기에 한국이라는 나라는 너무 좁지 않습니까?”
여태 듣기만 하던 은새가 느릿하게 입을 뗐다.
“저를 높게 평가해 주시는 건 감사합니다만 지금까지 그런 제안을 한 나라가 없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 돈은 벌 만큼 벌었고 원하는 것은 제 손으로 이룰 수 있어요. 딱히 끌리는 제안은 아니네요.”
“그렇습니까.”
유길선이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옷매무시를 가다듬었다.
“각자의 입장이 팽팽하니 오늘 더 나눌 말이 없겠군요. 계약서는 두고 갈 테니 읽어 보길 권합니다. 뭐, 이곳에 있다 보면 생각이 바뀔 수도 있는 거죠.”
그는 나가기 전 말을 덧붙였다.
“필요한 게 있으면 문밖에 있는 사람을 시키면 됩니다. 그럼 또 뵙죠.”
은새가 유길선을 붙잡았다.
“하나만 물을게요. 정말 원하는 게 봄이인가요?”
“…….”
“다른 게 있지는 않으시고요?”
은새는 유길선의 눈을 지그시 바라봤다. 그의 눈동자가 일순 흔들리더니 금방 제자리를 찾았다.
“……성급한 태도는 계약을 그르치기 마련이죠. 그럼 이만.”
은새는 유길선이 나간 문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그는 아니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벨키오르 님의 말이 맞았어. 분명 뭔가가 더 있는 거야.’
[뉴나, 괜찮아요?]
은새가 생각에 잠겨 있자 별이가 걱정스럽게 그녀의 허벅지를 두드렸다.
은새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응, 우리 별이. 오래 이동했는데 힘들지는 않아? 봄이도.”
삐-삐.
봄이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폭신한 침대를 얼른 차지하고 즐겁다는 듯이 울었다.
별이가 세모눈으로 봄이를 째려봤다.
누나가 지금 누구 때문에 고생하고 있는데!
[나는 괜차나요. 근데 아빠가 너무 멀리 왔다구 뉴나 걱정해요.]
“아…….”
벨키오르가 별이에게 전음을 보낸 모양이었다. 외국이라 핸드폰 사용도 제한될 테니 이런 건 편했다.
“베…….”
벨키오르 님한테 나는 무탈하다고 전해 달라고 하려는데 거슬리는 기척이 느껴졌다. 아까 그 은신 능력자였다.
역시 룸 안까지 감시하려는 모양이었다. 여기는 사생활 보장도 없나?
‘그건 절대 용납 못 하지.’
은새가 그자가 있는 쪽으로 뾰족하게 말했다.
“언제까지 거기 있을 거예요?”
“…….”
당연하게도 은신 능력자는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은새는 조금 더 강한 어조로 말했다.
“거기 있는 거 다 알아요. 좋은 말 할 때 나가세요. 아니면 청화 길드는 손님을 이런 식으로 감시하나요?”
은새의 시선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녀가 자신의 존재를 명확히 인지하고 있다는 걸 깨달은 은신 능력자가 뜸 들이다가 스킬을 해제했다.
복면을 쓴 여성 헌터가 애써 당혹스러움을 감추며 질문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럼 설마 내가 그런 것도 눈치 못 챌까 봐요? 나가세요.”
당장.
은새가 문을 손으로 가리켰다. 그녀는 움찔하더니 고개만 약간 숙여 보이고 조용히 룸을 나갔다.
‘한 번은 우연인 줄 알고 또 시도할지도 모르겠네……. 도청 장치가 있나 살펴봐야겠다.’
그녀는 자신의 스킬과 별이의 마법으로 방을 싹 한 번 훑었다. 예상과는 다르게 도청 장치는 발견되지 않았다.
‘이게 더 찝찝한데…….’
“됐다, 일단 좀 쉬자.”
은새는 욕실로 아이들을 데리고 들어가 씻기고 본인도 씻고 나왔다.
머리가 덜 마른 채로 은새는 침대에 몸을 던졌다. 어차피 당분간 여기서 꼼짝없이 갇혀 있어야 할 테니 급할 게 없었다.
탁자 위에 올려진 계약서는 단 한 번도 건들지 않은 채 그녀는 아이들과 함께 단잠에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