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 봉쇄 구역
은새의 애절한 눈빛 공격에 결국 벨키오르가 백기를 들었다. 그렇다고 꽁한 게 풀어진 건 아니었다.
“……은신 마법을 사용하고 뒤따른다면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거다.”
“중국 측에서 그런 것까지 다 대비해 놨을 거예요. 제 친구들이 워낙 극성맞으니까 혹시 길드에서 붙인 사람이 없나, 하고.”
“인간이, 드래곤인 나의 마법을 간파할 수 있다고?”
“당연히 아니겠죠. 그런데요, 아주 잠깐 떨어져 있을 뿐이잖아요? 비행기가 육지에 착륙하면 벨키오르 님은 제 위치를 간파하시고 공간이동으로 오실 거잖아요?”
“…….”
변경된 계획은 그랬다.
벨키오르는 별이가 어디에 있든 그 흔적을 더듬어 찾아갈 수 있다.
그것 말고도 은새에게 따로 추적 마법을 걸어 벨키오르는 그녀를 뒤쫓을 예정이었다.
중국이 아무리 용을 써서 노선을 복잡하게 한들 그에게는 무용한 일이었다.
설사 던전 안으로 들어간다고 해도 벨키오르는 은새와 별이를 찾아낼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도 불안한 생각이 드는 건.
‘답지 않게 감정에 심취했군.’
뒤늦게 벨키오르가 자신의 상태를 진단했다.
그로서는 수천 년 만에 정을 준 상대와 예기치 못하게 떨어지게 된 것이다.
그것도 그 스스로가 마음을 인정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참이었다.
불안 요소는 또 있었다. 은새가 인간이라는 점.
인간이란 잠깐 눈을 뗐을 뿐인데 스러져 없어지는 존재이니 벨키오르가 안달 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반려의 인이라도 있었으면 제 생명을 공유할 수 있을 텐데 그것조차 불가능했다. 혹시 잠깐 떨어진 사이 은새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하지만 결국 이 모든 게 그가 유난 떠는 것이라는 자각이 들었다.
벨키오르는 할 수 있는 모든 방비를 할 것이고 또 별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은새를 지킬 테니까.
“……그래. 그대의 말이 맞아.”
은새가 인간이라 가지는 불안은 그가 그녀를 반려로 받아들인 시점부터 오롯이 그가 짊어져야 할 몫이었다.
그걸 그녀에게 전가해서는 안 됐다.
“그대가 어디에 있든 내가 찾아갈 것이니 그대는 헤매지 말고 그곳에서 나를 기다리도록.”
“……네!”
은새는 어쩐지 기분이 새콤달콤했다.
그저 중국으로 벨키오르가 찾아오겠다는 소리일 뿐인데 그게 꼭 이번 일이 아니어도 은새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반드시 만나러 오겠다는 다짐 같아서.
출국하기 하루 전날 밤, 중국은 은새의 요구를 일부 수용했다.
사람들을 습격했던 마수 두 마리의 사체가 거리에서 발견된 것이다.
예상했던 것처럼 조룡 마수와 검은뿔표범 마수였다.
사람들은 은새의 마수 말고도 조룡 마수와 검은뿔표범 마수가 도시를 활보하고 있었다는 것에 놀랐고, 왜 그것들이 갑자기 사체로 발견됐는지에 대해 갑론을박을 펼쳤다.
당연히 도천 길드가 사건을 덮기 위해 사체를 준비한 게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하지만 중국은 사기 건만은 수습하지 않았는데, 아마도 밝히기 어려운 사정이 있거나 은새에 대한 여론을 나쁜 채로 두는 게 그들에게 더 유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인 듯했다.
그런데 커뮤니티에 한 게시물이 올라오면서 악화일로를 걷던 여론이 잠시 주춤했다.
[익명게시판] ‘유은새 사기 사건’ 사장단이 공개한 사진 말인데
이거 나만 이렇게 생각하는 건지 몰라서 되도록 많은 사람이 보라고 써방 없이 올림.
(증거물로 언론에 공개된 사진)
(팬이 올린 유은새 사진1)
(팬이 올린 유은새 사진2)
…
각도가 그런지 몰라도 귀 모양이 다르지 않아?
그리고 유은새 헌터 프로필상 키 170 넘는데 사장단 사이에 서 있으니 묘하게 작아 보이는 것 같은…….
왜 예전에 북측 수령님 대역 있다고 음모론 떠돌던 거 생각나고ㅇㅇ
님들은 어떻게 생각함?
누리꾼들은 아주 작은 의혹의 불씨를 지나치지 못했다.
인터넷상에서 한바탕 설전이 일어났고, 그때 누군가 ‘그럼 변용 스킬 가진 헌터라도 있단 말이야?’라며 농담처럼 던진 말에 혼란이 들끓었다.
사실관계가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채로 은새는 청화 길드가 보낸 전용기에 몸을 싣고 비밀리에 출국했다.
국내에 남은 일은 길드와 변호인단이 맡기로 했다.
떠나기 전, 우리는 은새와 단둘이 있는 자리에서 몰래 각성석을 건넸다.
“은새야, 혹시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사용해.”
“응. 돌아올 때까지 건강히, 잘 지내야 해.”
부디 이것을 쓸 일이 없길 바라며, 은새는 부적의 의미로 각성석을 아공간에 잘 챙겨 넣었다.
은새는 우리를 힘주어 꼭 안았다. 영원한 이별이 아닌데도 우리는 다시 못 볼 것처럼 그녀를 한참 동안 끌어안고 있었다.
은새가 못 보는 각도에서 우리의 눈동자가 아픈 듯 결연하게 빛났다.
***
“곧 비행기 착륙합니다.”
승무원의 안내에 은새가 창밖 풍경을 내다봤다.
자정이 넘은 시각이었기에 사방이 어둠에 잠겨 있었으나 중국의 수도, 베이징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은 환했다.
[뉴나, 다 온 거예요?]
“응, 별아. 봄이 조금 이따가 깨우자.”
은새는 다른 마수들은 다 놔두고 별이와 봄이만 챙겨서 왔다.
다른 마수들까지 데려오기에는 이목도 있고, 중국에 억류될 경우 마수들의 안전을 보장하기 어렵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은새가 안전에 신경 쓰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녀는 온갖 상황에 대비해 만반의 준비를 갖춘 상태였다.
은새가 한국에 두고 온 벨키오르를 생각했다.
‘벨키오르 님도 참. 정신 방벽에, 보호 마법에, 추적 마법…… 그것 말고도 마법을 몇 개나 걸어 주신 거야.’
조금 유난이다 싶을 정도로 벨키오르는 물샐틈없이 은새에게 마법을 걸어 두었다.
과장을 조금 보태 지금 은새는 거의 걸어 다니는 요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대비는 아무리 해도 과하지 않다.’
그 말을 하는 벨키오르는 이 세상에서 은새에게 해를 끼칠 수 있는 존재는 전부 섬멸할 것처럼 굴었다.
또한 그는 별이에게도 은새에게서 절대 떨어지지 말라며 단단히 일러두었다. 별이만 있어도 웬만한 상황에서는 대응이 가능할 테니.
‘덕분에 안심이 되지만.’
벨키오르를 떠올리자 은새의 표정이 부드럽게 풀렸다. 그녀가 손가락을 꼼질거렸다.
‘……벌써 보고 싶네.’
은새는 멀리 있는 벨키오르 대신 별이를 꼬옥 끌어안았다.
[뉴나?]
“으응. 착륙하느라 비행기 흔들리면 별이 무서울까 봐.”
[히히, 나 하나두 안 무서운데! 그래도 뉴나가 안아 주면 조아요.]
아이는 아무 의심 없이 은새의 목에 매달렸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여기까지 은새를 수행해 온 황자문이 무언가를 내밀었다.
“먼저 이것을 착용해 주십시오.”
“뭐죠?”
“셔터(Shutter) 아이템입니다.”
은새가 눈썹을 찡그렸다. 팔찌 형태의 그것은 아공간을 봉인하는 아이템이었다.
그녀가 불편해하는 낌새를 보이자 황자문이 첨언했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니 따라 주셨으면 합니다.”
‘만일의 사태는 무슨, 감금을 예고하는 거겠지.’
아이템을 착용하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을 거란 무언의 압박에 은새가 셔터 아이템을 착용했다.
그러자 그녀의 손목 크기에 알맞게 줄어들었다.
이제 은새는 해제 아이템을 따로 사용하지 않는 한 아공간 사용이 불가했다.
대기하고 있던 공간이동 능력자가 다가왔다.
“피곤하시겠지만 바로 이동하겠습니다.”
“어디로요?”
“…….”
황자문은 대답하지 않았다.
예상했던 일이기에 은새는 이능의 흐름에 순순히 몸을 내맡겼다. 종적을 감추기 위한 목적이겠지.
그런 식으로 황자문은 두어 번 더 공간이동을 이용해 은새를 이전시켰다.
그리고 허허벌판에 세워진 안가가 나타났을 때 이곳에서 하룻밤 쉬시라며 물러났다.
씻고 아이들과 함께 누우려는데 사방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감시를 요란스럽게 한다고 생각하며 은새는 가까스로 잠을 청했다.
날이 밝자마자 그녀는 다시 비행기에 태워졌다.
‘도대체 어디까지 가는 거람?’
마지막은 헬기였다. 두두두, 프로펠러 돌아가는 소리가 요란했다.
은새가 드디어 지상에 발을 붙이고 본 풍경은 황량했다.
문명의 흔적은 그대로 남았으나 사람이 떠난 지 오래인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곳에 멀쩡한 건물이 딱 하나 있었는데, 외관부터 으리으리한 호텔이었다.
아마 특수 목적으로 사용되는 곳이 아닐까 싶었다. 지금은 은새를 잡아 두는 곳이고.
“이곳은 어디죠?”
“톈진의 베이천 구입니다.”
“톈진?”
은새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과거 수상 운상의 요지였던 톈진은 격변의 시대가 도래한 후 몇몇 구를 제외하고는 봉쇄되었다.
이유는 ‘봉인된 던전들’ 때문이었다.
대부분의 나라가 격변의 시대 초기, 시행착오를 거쳤으나 중국은 특히나 잘못된 대응을 했다.
물론 당시에는 몰랐고 나중에 이르러서 그게 잘못된 것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고등급 헌터가 등장하기 전 발생한 S급 이상의 던전을 중국 정부는 공략하기보다는 봉인 능력자로 하여금 봉인시킨 것이다.
‘봐라! 우리 중국은 미지의 차원마저 정복했다!’
하지만 문제는 봉인 능력자가 급사하면서 일어났다.
시간이 흘러 고등급 헌터를 다수 보유한 중국은 봉인 능력자의 죽음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이제는 던전을 공략할 만한 인적, 물적 자원을 갖추었으니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죽었어도 던전의 봉인은 당장 풀리지 않았다. 단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 되었다.
던전 공략이 늦어지면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던전 브레이크.
게다가 봉인된 던전은 전부 S급 이상이고 안에는 어떤 마수들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른다.
봉인된 던전은 예고된 재앙이나 다름없었다.
몇 차례 위기를 겪은 중국은 결국 봉인된 던전이 있는 지역에서 사람들을 강제 이주시키고 봉쇄령을 내렸다.
그중 톈진은 가장 많은 봉인된 던전이 있는 곳으로 위험 지역으로 분류되었다.
‘여기가 그 톈진 한복판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