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 가서 결판을 내고 올게요!
밤늦은 시간이 되어서야 조사가 끝났다. 앞으로 몇 차례 더 조사가 있겠지만 일단 은새는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쇼, 유은새 씨. 상황이 좋지는 않습니다만 저희 로펌의 모든 걸 걸고서라도 무죄를 입증해 내겠습니다.”
“네……. 잘 부탁드려요.”
변호사는 관련 자료를 모아야겠다며 급히 자리를 떠났고 은새는 도천 길드에서 보내 준 차에 올랐다.
움직이는 차체를 느끼며 창문에 머리를 툭 기댄 채로 은새는 생각에 빠졌다.
‘사진이 찍혔다는 건 현장에 실제로 마수가 있었다는 뜻이야. 환영 같은 걸로는 증거물이 남지 않으니까.’
그럼 마수는 어디에서 튀어나왔을까?
그리고 왜 하필 조룡 마수와 검은뿔표범이었을까.
‘……예전에 무심코 지나쳤던 정황들.’
이제 와 그게 밟혔다.
은새가 가지 않은 곳에서 그녀를 보았다는 목격담. 그녀가 하지 않은 일들에 관한 소문.
그리고 이번 일까지.
다분히 악의성이 느껴졌다. 은새는 누군가 자신을 계획적으로 곤경에 빠트린 거라는 걸 알아챘다.
‘하지만 누가?’
그 질문에 대해서는 답을 내릴 수 없었다. 짐작 가는 곳이 없어서가 아니라, 너무 많아서.
은새는 멍하게 움직이는 창밖 풍경만 응시했다.
“도착했습니다, 유은새 헌터.”
“데려다줘서 고마워요. 조심해서 돌아가요.”
여기까지 운전해 준 도천 길드원에게 은새가 감사 인사를 전했다.
그녀의 힘 빠진 미소를 본 길드원이 울상을 지었다. 그는 우물쭈물하다가 응원의 말을 건넸다.
“저…… 유은새 헌터. 힘내세요. 저는 유은새 헌터와 마수들의 결백을 믿습니다.”
“고마워요.”
차가 떠난 뒤에도 은새는 한동안 집에 들어가지 않고 서 있었다.
머리가 복잡해 근처를 걸으며 바람이나 쐴까 하고 걸음을 옮겼을 때였다.
“안녕하세요, 유은새 헌터.”
어둠 속에서 기척을 지우고 있던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은새가 눈살을 찌푸렸다. 이 근방은 다 사유지였다.
게다가 늦은 시간이었고, 은새는 의도치 않게 사건에 휘말린 상태였다.
누군지 몰라도 좋은 의도로 찾아왔을 것 같지 않았다. 은새가 경계하며 상대의 정체를 물었다.
“누구시죠?”
“중국 청화 길드 소속 황자문이라고 합니다. 전해 드릴 말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중국?
그 말에 은새는 경계를 더 끌어올렸다. 그녀가 생각한 배후 리스트에는 중국도 있었다.
그리고 이어진 황자문의 말이 거의 확신을 주었다.
“유은새 헌터께서 곤란한 상황에 처한 걸 알고 있습니다. 좀 더 온건한 방법으로 모시고 싶었는데, 안타깝게 됐군요.”
사실상 자신들이 범인이라고 시인한 것이었다.
은새는 주머니 속의 핸드폰을 건드려 녹음 기능을 켰다. 늦었지만 혹시 증거를 잡을 수 있을지 몰라서였다.
“그 말은, 현재 벌어진 일들이 중국의 소행이라는 것처럼 들리네요.”
“…….”
황자문은 말없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었다. 마치 은새가 녹음 중인 걸 아는 것처럼.
은새가 속으로 혀를 찼다. 하긴, 전령을 어수룩한 이로 보내지는 않았을 테니.
“중국은 언제나 유은새 헌터와 춘티엔더야오칭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S급 헌터의 은혜를 모르는 한국인들에게 지켜야 할 의리가 있습니까? 저들은 당신이 여태 해 준 것을 잊고 비난하기 바쁜데요. 중국이라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거 전부 당신들이 꾸민 짓들 때문이잖아.
은새가 날 선 목소리로 말했다.
“제 조국에 대해 나쁜 말을 하는 게 듣기 좋지는 않네요.”
“주석께서 유은새 헌터를 만나기를 몹시 고대하고 계십니다. 결정하신다면 빠르게 이민 문제를 해결해 드리죠. 또한, 최대한의 혜택도 보장해 드리겠습니다.”
“거절하죠. 뭘 제시하든 저는 대한민국을 떠날 생각이 없어요.”
“유은새 헌터.”
황자문이 비밀을 말하는 것처럼 상체를 앞으로 숙였다. 샐쭉 휘어진 눈매가 뱀처럼 보였다.
“이 상황에서 버텨 봤자 유은새 헌터만 힘드시지 않겠습니까? 이미 대중은 등을 돌리고 있고 유은새 헌터를 향한 비난 또한 심해지고 있어요.”
그가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듯 눈썹을 아래로 늘어트렸다. 그 면상이 참으로 가증스러웠다.
“그 화살이 유은새 헌터에게만 향할 것 같습니까? 유은새 헌터는 동료들을 끔찍이 아끼시는 걸로 아는데…… 아닌가요?”
황자문이 의뭉스럽게 말끝을 늘였다. 걱정하는 투로 숨기고 있으나 속뜻은 결국 순순히 협조하지 않으면 주변인들까지 다치게 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동료들을 걸고넘어지는 말에 내내 조용하던 은새도 결국 터지고 말았다.
“이보세요, 황자문 씨!”
“이게 끝일 거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다시 찾아올 테니 마음 바뀌시면 그때 말씀해 주세요.”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황자문의 뒷모습을 보며 은새는 생각했다.
아, 중국은.
봄이를 데려갈 때까지 포기하지 않겠구나.
***
은새는 양치를 하다 말고 멍하니 거울을 바라봤다. 며칠 새 그녀는 얼굴이 많이 상해 있었다.
사람들의 원색적인 비난이나 망한 여론 탓이 아니었다. 그녀는 잘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말에 귀 기울이는 성격도 아니었고, 스스로가 결백했으니까.
순전히 봄이와 동료들에 대한 걱정 때문이었다. 중국이 저렇게 나왔으니 그냥 넘어가지 않을 텐데.
그때 욕실 문 두드리는 소리에 은새가 상념에서 깨어났다.
“은새. 안에서 너무 오래 있군.”
“아, 잠시만녀! 금방 나가께여.”
은새는 얼른 입을 물로 헹구고 욕실에서 나왔다. 벨키오르가 빤한 시선으로 은새를 살폈다.
“안색이 좋지 않아. 일정이 없다면 더 자는 게 낫지 않겠나?”
“벨키오르 니임…….”
염려를 담은 다정한 말에 은새는 지금껏 홀로 고민한 게 무색할 만큼 쉽게 흐무러졌다.
그녀는 터벅터벅 걸어가 벨키오르의 품에 머리를 꿍 박았다. 벨키오르는 의아해하면서도 은새를 기꺼이 안아 주었다.
벨키오르에 대한 은새의 고민은 더 큰 고민이 생기자 뒷전으로 밀려났다. 지금은 그저 자신을 지탱해 줄 든든한 팔과 온기가 절실했다.
한참을 말없이 안겨 있던 은새가 맥없이 중얼거렸다.
“어쩌면 좋죠? 저 다른 나라로 가야 할지도 몰라요.”
“왜?”
“봄이가…….”
말을 하다 말고 은새가 우물쭈물했다. 이걸 벨키오르 님에게 상담해도 되나?
근데 못 할 이유도 없잖아.
“그게.”
“앉아서 얘기하지. 다리 아프겠군.”
“네…….”
벨키오르는 은새를 데리고 식탁 의자에 앉혔다. 거실에는 별이와 봄이가 있었기 때문에 조용히 대화를 나누기에 적절하지 않았다.
식탁 앞에 앉아서도 은새는 한동안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좀 생각이 정리되었을 때 그녀가 목소리를 한껏 낮추고 느릿느릿 현재 직면한 상황을 설명했다.
“……이렇게 된 거예요.”
“탐욕스럽군.”
누구라고 말은 하지 않았지만 은새는 알아들었다. 머리만 꾸벅거리며 그의 말에 동조했다.
“결국 저 꽃의 마수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는 건가?”
“그렇게 얘기하지 마세요. 봄이는 아무 잘못 없으니까.”
“하지만 은새. 저 마수 하나를 지키기 위해 그대가 치러야 하는 희생이 크다.”
“…….”
“알 텐데. 무엇이 가장 합리적인지는.”
은새의 눈동자가 떨렸다. 그녀는 봄이가 있는 거실 쪽을 한 번 보고는 고개를 푹 숙였다.
“하지만 봄이는……. 봄이는 이미 제 가족인걸요.”
은새에게 가족의 의미가 어떤 것인지 잘 아는 벨키오르는 말을 더 얹지 않았다.
생면부지의 헤츨링도 데려다 키운 그녀다. 알을 부화시키고 지금껏 돌보았으니 더욱 애틋할 터.
애당초 은새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따를 생각이 있는 벨키오르는 다른 방도를 제시했다.
“그나저나 한 국가가 개인에게 이렇게까지 하는 경우는 처음 보는군. 그만큼 그대의 가치를 높이 평가한다는 거겠지.”
“저는 일개 S급 헌터일 뿐인데요…….”
“은새. 단순히 저 꽃의 마수를 지키고 싶은 거라면 이곳을 버리고 나의 세계로 가는 방법도 있다.”
“네?! 그건 좀 극단적인 방법 같은데요…….”
화들짝 놀라는 은새의 얼굴이 귀여워 벨키오르가 슬쩍 미소 지었다.
“그게 아니라면 과감히 맞서는 것도 있지.”
“중국과 싸우기라도 하란 말씀이세요?”
“꼭 무력으로만 싸움이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그대는 꽃의 마수의 주인이니, 이런저런 걸 배제하고 생각하면 저쪽과의 거래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는 건 그대라고 할 수 있겠지.”
“제가…… 칼자루를 쥐고 있다는 뜻이죠?”
은새의 눈빛에 생기가 돌아왔다. 그녀의 머리가 바삐 굴러갔다.
“그리고 내가 봤을 때 저쪽이 원하는 건 꽃의 마수만이 아닌 것 같군.”
“네? 그럼 뭔데요?”
“글쎄……. 뭘까.”
자세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벨키오르는 중국이 벌인 일련의 과정이 봄이가 아닌 은새 자체를 노린 것처럼 느껴졌다.
묘하게 초점이 어긋나 있다고 할까.
꼭 은새 본인에게 목적이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건 벨키오르만이 알 수 있는 미묘한 감각이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어요. 저, 중국에 다녀올게요.”
은새가 전투적으로 일어섰다.
“가서 결판을 내고 올게요!”
망설일수록 상황이 악화될 뿐이라면 제 손으로 매듭짓고 오는 게 낫겠다는 판단이 섰다.
물론 중국행을 선택하면 억류될 수도 있고 협박을 당할 수도 있다. 그 점은 각오하고 있었다.
‘이래 봬도 난 납치, 감금 경력자라고!’
어떤 식으로든 결판을 지어 확실하게 양육권을 따올 생각이었다.
더는 꼬투리 잡지 못하게, 봄이가 자신의 마수라는 걸 누구도 반박하지 못하게.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협상 테이블에 올라 저쪽의 말을 들어 봐야 했다.
은새가 긴장감으로 침을 꿀꺽 삼켰다.
‘그래, 정 안 되면 벨키오르 님 세계로 튀자.’
때때로 브레이크가 없는 은새의 사고방식은 그녀를 질주하게 만들었다.
“은새, 그대는 혼자가 아니야.”
그때 질주하는 은새의 머릿속을 잠재우는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혼자서 모든 걸 짊어지려 하지 마. 내가 있는 한 그대가 곤경에 처할 일은 없다.”
“벨키오르 님…….”
맞아. 벨키오르 님이 계시지.
은새는 보다 차분하게 사고할 수 있었다. 모르면 몰랐지, 이제는 이 모든 일들의 배후가 누군지 명확하게 안다.
자신들이 누군지, 무엇을 원하는지, 따르지 않을 경우 누구를 다치게 할지까지도 그들은 뻔뻔스러울 만큼 당당하게 밝혔다.
그들은 은새를 협상 테이블에 초대했고, 벨키오르의 말대로 협상의 키는 자신이 쥐고 있다.
더 이상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지금은 벨키오르라는 만능 치트 키도 있었으니 그녀는 무서울 게 없었다.
***
하지만 역시나, 친구들의 반발이 거셌다.
“뭐, 중국으로 가겠다고? 안 돼!”
우리가 드물게 은새에게 정색했다. 다른 친구들의 표정도 그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은새는 차분하게 설득을 시도했다.
“하지만 들어 봐. 이 일은 중국과 내가 끝장을 봐야 할 문제야. 이미 적들은 화살을 쏘고 있고, 가만히 있으면 피투성이가 될 판이야. 지금은 내가 목표지만 언제 너희들까지 휘말릴지 몰라. 그 전에 움직여야 해.”
“웃기지 마. 우리가 위험해질까 봐 너를 사지로 보낸다고? 공증서가 있는 한 명분은 우리에게 있어. 절대 못 가, 안 돼.”
“맞아. 네가 중국으로 가는 것 자체가 그들이 노리는 거야. 몰라서 이래?”
솔까지 길길이 날뛰었다. 미리내가 은새의 손을 덮어 쥐었다.
“은새야, 지금 네가 믿는 건 벨키오르 님뿐이잖아. 무모한 짓이야. 네 일은 우리가 어떻게든 해 볼게.”
“…….”
“지금은 우리를 믿어.”
“하지만 얘들아…….”
우리가 단호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말은 못 들은 걸로 할게. 집에 돌아가 있어.”
“우리야!”
어쩌지? 어떡하지?
친구들이 자신을 걱정하는 마음은 안다. 만약 반대의 상황이라면 자신도 무슨 수를 써서라도 친구들을 말릴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그런데 켜 놓은 티브이에서 뉴스 속보가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