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 동상이몽
벨키오르의 입술이 은새의 이마에 닿았다. 그다음은 눈물 젖은 눈가. 그리고 콧등.
마침내 입술까지 닿았을 때 은새는 숨을 흡, 들이켰다. 바로 눈앞에 눈을 감은 벨키오르의 얼굴이 보였다.
벨키오르는 은새가 기대기 편하도록 자세를 바꿨다. 각도가 바뀌며 빈틈없이 입술이 맞물렸다.
은새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무엇보다 지금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어지럽게 생각이 엉켰다.
‘나 울어서 지금 얼굴 엉망인데. 아니 벨키오르 님이 왜 내게 입맞춤을……? 이, 이래도 되는 건가? 밀어내야 하나? 근데 좋은 향기가 나는걸…….’
꿈인가 해서 몰래 손등을 꼬집어 봤으나 자신을 끌어안은 온기와 입술에 닿는 감촉은 사라지지 않았다. 벨키오르가 잠시 몸을 물렸다.
“베, 벨키오르 님……?”
“싫은가?”
벨키오르가 벌게진 은새의 손등을 끌어다 입을 맞췄다. 어찌나 있는 힘껏 꼬집었는지 손톱자국이 나 있었다.
그가 눈동자만 들어 그녀를 보는데, 은새는 사로잡힌 동물처럼 움직일 수 없었다.
자신을 또렷이 응시하는 동공이 샐쭉 가늘어진 파충류의 눈.
그게 섬뜩하다기보단 아름다워서 할 말을 잃었다. 이게 과연 정상인가?
은새는 벨키오르가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걸 눈치채고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요!”
“그럼.”
벨키오르는 은새의 두 팔을 당겨와 자신의 어깨에 올리게 했다. 그 애매한 자세에 은새가 의문을 가지려는 찰나, 벨키오르가 다시 상체를 숙여 왔다.
“싫으면 언제든지 밀어내.”
‘아…….’
간질간질한 기분에 은새가 벨키오르의 옷깃을 그러쥐었다. 언제든지 거부해도 된다는 다정한 배려.
부드러운 입술이 다시 맞닿았고, 이번에는 은새도 눈을 감았다. 시야가 차단되자 다른 감각이 살아났다.
아까부터 나는 이 좋은 냄새는 벨키오르로부터 기인한 것이었다. 술 때문인가 싶었지만 아니었다.
가끔 그와 가까이 붙어 있을 때면 맡을 수 있었던 체취. 내색은 안 했으나 은새는 그게 무슨 향인지 늘 궁금했었다.
향수 같은 인위적인 향과 궤를 달리하는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는 자연 본연의 향.
그리고 지금 은새는 그 풀잎 향을 닮은 싱그러운 냄새에 푹 파묻혀서 벨키오르가 전해 주는 숨으로만 호흡했다.
은근히 몸을 조여 오는 압박감에 은새가 나른한 눈빛을 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벨키오르의 목을 끌어안고 입맞춤을 더 졸랐다.
싫으면 밀어내란 말은 머릿속에서 지워진 지 오래였다.
벨키오르는 그녀의 반응을 살피며 조금 더 깊이 그녀의 입술을 탐했다.
“흐…….”
어느새 은새는 벨키오르의 다리 위에 올라와 있었다. 그걸 인지하지 못한 채로 그녀는 혼몽한 정신을 붙잡기 위해 숨을 몰아쉬었다.
쪽.
가벼운 입맞춤으로 떨어져 나간 벨키오르가 흐트러진 은새의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대는 강하다.”
“……네?”
은새가 느릿하게 속눈썹을 팔랑거렸다. 발긋해진 눈가에 다시 입술을 붙이며 벨키오르가 말했다.
“나는 그대가 가진 슬픔을 온전히 공감하기 어렵지만 이해할 수는 있다. 그런 상황에서 그대가 슬픔에 매몰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을지도 상상이 가.”
“…….”
“잘 버텼군. 그대는 강인해.”
은새가 입술을 깨물었다. 하도 놀라운 일이 벌어져 눈물은 말랐지만 자신을 인정해 주는 말에 괜스레 울컥했다.
각성한 뒤로 그녀는 줄곧 남들을 이끄는 위치에 있었다. 그녀는 당연하다는 듯 기대를 받아 왔고 지나온 과거를 되돌아보는 건 사치였다.
세상은 혼란스러웠고 위기가 닥친 어디에서나 은새를 찾았다. 사람들의 선망 어린 눈빛, 구원을 바라는 표정.
그래서 은새는 불안해도 함부로 내색할 수 없었고 슬퍼도 혼자 삭여야만 했다. 그녀가 흔들리면 두려움에 빠질 사람들을 알기에.
세상에 어떤 사람이 S급 헌터를 걱정하며 위로할까.
그런데 벨키오르가 그녀의 나약함을 알고 보듬어 주었다. 고군분투한 시간을 인정해 줬다.
너무 꽉 깨물어 핏방울이 고이기 시작한 입술을 벨키오르가 살살 빼내며 이마를 툭 부딪쳤다.
“하지만 슬픔은 억누른다고 해소되는 게 아니야. 나라도 괜찮다면 언제든 그대의 말을 들어 줄 테니 편히 말하도록 해.”
“벨키오르 님은 너무 다정해요…….”
은새가 벨키오르의 품을 파고들었다. 쿵쿵 뛰는 심장 소리가 요란했다.
아마 벨키오르에게도 전해질지 모르겠으나 그런 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한 가지 깨달음이 은새의 머리를 강타했다.
‘아……. 나는 벨키오르 님을 좋아하는구나.’
그걸 깨닫는 걸 동시에 서글픔이 밀려왔다. 벨키오르는 반려를 찾고 있었다. 정해진 운명을 평생 기다려 왔다.
은새가 눈동자를 들어 벨키오르를 바라봤다. 바로 그가 시선을 맞춰 왔다.
그게 내가 될 수는 없는 걸까.
“저…….”
왜 제게 키스하신 거예요?
그 말이 혀끝에 맴돌았다. 하지만 선뜻 물어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아무 이유가 없었다거나, 그저 위로했을 뿐이라는 대답이 돌아올까 봐.
이미 한바탕 번뇌를 마치고 은새에게 끌리는 제 마음을 인정한 벨키오르가 들었으면 기가 찰 생각이었다.
심지어 그는 은새와 마음이 통했다고 여기고 있었다. 그게 아니었으면 입맞춤에 응하지 않았을 테니까.
관계를 명확히 규정해야 하는 인간들의 습성을 모르는 벨키오르의 실수였다.
그러니 나중에 참다못한 은새가 ‘제게 왜 이러시는 거예요?’ 하고 눈물을 뚝뚝 흘리며 따지는 건 예정된 미래였다.
혼자 연애를 시작한 벨키오르는 기분 좋은 걸 한껏 티 내며 -평소보다 입꼬리가 약간 더 올라간 수준이었다- 말을 망설이는 은새를 재촉했다.
“왜?”
“……아니에요.”
동상이몽의 밤이 지나가고 있었다.
***
골드스타 길드장 사무실.
히든 던전에 대한 이슈는 골드스타 길드도 피해 갈 수 없었다. 그래서 최근 백찬민은 한층 예민해져 있었다.
그런데 하필 조금 전 그를 찾아온 이들이 근래 들어 그의 신경을 자극하는 멤버였다. 정확히는 맨 앞에 선 남자가.
백찬민이 은단을 입에 털어 넣으며 비딱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매스컴에서 보이는 호쾌한 미소는 티끌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천창현 헌터, 원주의 A급 던전 공략을 네가 가겠다고?”
“예.”
천창현이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뒤로는 오하나와 이아람, 조인준, 진해성이 있었다.
기어코 천창현은 자신의 공략팀을 꾸렸다.
한 달 전 해외로 장기 출장 나간 공략팀이 불의의 사고로 두 명을 제외하고 사망한 일이 있었다. 공략 실패였다.
살아남은 이들은 한국으로 불러들였으나 사실상 팀이 해체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던 차에 천창현이 A급들만 모아 팀 결성을 건의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내부의 의견도 있고, 거절하기 애매했다. 백찬민은 천창현이 의심스러웠으나 객관적으로 봤을 때 스킬 통제 불가의 진해성이나 사고뭉치 이아람 등을 그가 책임진다면 길드에 나쁠 게 없었다.
백찬민의 차가운 시선에도 오하나와 길드원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원래 남의 눈치를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이들이었다.
그래서 천창현이 더 기이했다. 어떻게 이자들을 팀으로 끌어들인 거지? 저 개성 강한 헌터들을.
그런 의문을 곱씹으며 백찬민이 느리게 입을 뗐다.
“원주 던전을 들어가려는 이유는?”
“저희 팀도 슬슬 활동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다른 게 있는 건 아니고?”
백찬민이 파헤치려는 것처럼 천창현의 검게 가라앉은 눈을 직시했다. 아마도 그가 가지고 있을 예지 스킬, 그것으로 뭘 본 게 아니냐는 의미였다.
“그럴 리가요. 데뷔 무대로 적당하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하지만 천창현은 시종일관 덤덤했다. 무표정한 얼굴에서 뭔가를 더 알아내기란 어려웠다.
혀를 찬 백찬민은 이번 기회에 새로 만든 공략팀의 저력을 확인해 봐도 괜찮겠다고 판단했다.
“공략은 3일 후니까 알아서들 잘 준비해. 필요한 거 있으면 지원팀에 얘기하고. 가 봐.”
길드장실을 나온 천창현과 팀원들은 조용했다. 그리고 자리를 옮겨 자신들만 있는 공간에 들어선 뒤에야 조인준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천창현 헌터, 정말 저희가 들어가도 괜찮겠습니까? 원주 던전에서 히든 던전이 발생한다면서요.”
히든 던전이라는 말에 팀원들이 저마다 다른 반응을 보였다. 호전적인 오하나와 진해성은 기대감을 감추지 못했고 이아람은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히든 던전이 어떤 곳인가. 도천 길드의 공략팀 하나를 잡아먹은 곳이었다. 등급 상승은 1~4단계까지 제멋대로였고 지형이 바뀔 경우 그에 대한 대비를 하지 않으면 목숨이 위험했다.
“가야 해.”
천창현이 지독히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 가야만 한다. 원주 히든 던전에서 특별한 게 나오니까.
“우리의 목표가 뭐라고 했죠?”
“히든 보스의 심장.”
그건 강림석을 채울 재료였다. 이미 천창현은 불법 헌터들을 이용해 여러 재료를 모았다.
하지만 원주 히든 던전은 보안 문제로 직접 가야 했다.
이해가 안 된다는 듯 이아람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대체 왜 마수의 신체 부위 같은 걸 모으는 건지.”
“필요하니까.”
강해지기 위해서라면 천창현은 못 할 게 없었다. D급 헌터 출신인 그는 오랜 시간을 굴욕 속에서 살았다.
그건 꿈에서도 잊을 수 없는 지독한 현실. 당시 느낀 비참함과 처절함을 떠올리니 속에서 신물이 올라왔다.
이미 복수는 시작되었다. 그걸 위해 팀원들을 들였으니, 앞으로 더 강해져야 했다.
“그리고 히든 던전 공략에 성공하면 너희 경력에도 나쁘지 않을 텐데?”
“그건 그렇죠.”
이아람이 떨떠름하게 수긍했다. 어쩔 수 없는 이유로 천창현에게 협력하고 있었지만 참, 속을 알 수 없는 자였다.
천창현이 몸을 일으켰다.
“그럼, 사전에 고지한 대로 준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