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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키운 마수가 드래곤을 물고 왔다 (102)화 (102/190)

101화 – 가족

“프랑스 박물관에 전시된 조각 같아요. 누가 벨키오르 님 보고 도난된 조각품인 줄 알고 저 신고하면 어떡하죠? 저 잡혀가면 저희 애들은 누가 돌봐 줘요?”

평범한 주접이었다. 은새가 제 외모를 마음에 들어 하는 걸 잘 아는 벨키오르가 피식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럴 일 없으니 안심해라.”

“단정 짓지 마세요. 벨키오르 님은 본인 얼굴에 대한 자각이 부족해요.”

은새가 엄하게 훈계했다. 하지만 무섭다기보다는 귀여울 따름이었다.

“이 집이 산속에 있어서 예전에는 가끔 정전이 나고는 했는데, 이제는 아무 걱정 없어요. 벨키오르 님이 있으면 빛이 날 테니까요.”

“빛 마법을 사용해서?”

“으응, 그런 의미가 아니라…… 어휴. 벨키오르 님은 등급을 매기면 C급이 아닐까요? 문화재 지정이 시급.”

벨키오르는 묵묵히 그녀가 하는 말을 들었다.

“격변의 시대 전이었으면 걷는 걸음마다 연예 엔터테인먼트 회사에서 명함을 줬을 거예요. 그러면 벨키오르 님을 티브이에서 봤으려나……?”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대가 아니었으면 내가 이 세계에 올 일도 없으니 무용한 가정이다.”

“하지만 벨키오르 님, 그 외모를 보관만 해 두는 건 국가적, 아니 세계적 손실이에요.”

벨키오르가 불쑥 질문했다.

“그대는 다른 사람들에게 나를 보이고 싶은 건가?”

“아뇨!”

은새가 도리질을 치며 극구 부인했다. 그녀는 주먹을 옹골차게 쥐고 당당히 얘기했다.

“꼭꼭 숨겨 두고 저만 보고 싶어요.”

사실 은새는 오랜만의 음주로 알딸딸한 상태였다. 게다가 벨키오르와 단둘이 갖는 자리이니 알게 모르게 긴장한 상태라 급하게 마신 탓도 있었다.

술을 궤짝으로 갖다 놓고 마시는 은새와 친구들이지만 분위기에 휩쓸리는 면이 없지 않아 있었다.

벨키오르가 주는 편안한 느낌, 묘한 긴장감, 그리고 조용한 집. 취기가 도는 게 당연했다.

“그럼 됐군. 꼭꼭 숨겨 둘 것 없이 나는 그대 앞에서만 얼굴을 드러낼 터이니.”

“……!”

나직하게 웃음을 터트리는 벨키오르를 정면에서 본 은새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순간적으로 개안한 것처럼 시야가 확 밝아지며 술이 깨는 기분이었다.

은새는 두 손에 얼굴을 묻고 끙끙거렸다.

벨키오르 님, 유죄. 당신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하겠습니다……. 땅땅.

눈을 감아도 잔상이 어른거려 은새는 고개도 들지 못하고 소리쳤다.

“그런 얼굴로 그렇게 웃으면 범죄예요!”

“이 세계의 언어는 어렵군. 왜 그게 범죄가 되지?”

“그건…… 하여튼 그런 게 있어요.”

은새가 그를 의식하자, 벨키오르는 만족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동족들의 헛소리는 대개 소음 공해에 불과하지만 모처럼 좋은 결과를 불러왔다.

‘이런 것도 나쁘지 않군.’

벨키오르가 술잔을 입에 털어 넣었다. 쭈뼛쭈뼛 은새도 압수당한 술잔을 되찾아 연거푸 들이켰다.

“하는 일이 힘들지는 않나?”

“헌터 일이요? 괜찮아요, 익숙하기도 하고.”

얼굴색이 돌아온 은새가 바나나를 한 조각 입에 쏙 넣었다.

“사람을 지키는 일이잖아요. 힘이 없으면 모를까,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면 계속하고 싶어요.”

잠시 뜸을 들이던 그녀가 작게 덧붙였다.

“저는 가족을 지키지 못했으니까요.”

시선을 피하는 은새를 보고 벨키오르가 허리를 세웠다. 그러고 보니 언뜻 은새에게 가족이 없다는 얘기를 들은 기억이 났다.

그녀가 얘기하지 않길래 벨키오르도 구태여 그 화제를 꺼낸 적이 없었다.

그는 유난스러울 것 없는 담담한 어조로 질문했다.

“가족들은 어땠지?”

“아…… 좋은 분이었어요, 어머니와 아버지는.”

벨키오르가 자연스럽게 화제를 이어 가자 은새는 그의 자상한 배려심을 느꼈다.

가족들의 일은 필름에 갇혀 박제된 빛바랜 추억이자 헌터로서의 그녀의 삶을 지탱하는 토대였다.

가족이나 다름없는 친구들 앞에서도 쉽게 꺼낼 수 없었던 말을 벨키오르에게는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가 인외의 존재이기 때문일까? 한없이 드높은 격을 지닌 초월종이라서?

조금 느슨해진 마음으로 은새가 옛이야기를 천천히 풀어놓았다.

“어머니가 학교 선생님이셨고 아버지가 사진작가셨어요. 인도어파인 어머니와 아웃도어파인 아버지가 어떻게 만나 연애하고 결혼하셨는지는 지금도 미스터리지만 어쨌든 금실이 좋으신 분들이었어요.”

“그런가.”

“아버지는 쉬는 날이면 가족들을 이끌고 여기저기 돌아다니셨어요. 가족들 전용 카메라가 있어서 어딜 가나 그걸 꼭 목에 걸고 다니면서 예쁜 사진을 많이 남겨 주셨어요. 어느 날은 저희만 찍는 게 아쉬워 같이 찍자고 했는데, 사진은 사람의 일대기를 담는 기록이라며 당신의 삶은 가족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굳이 필요하지 않다고 했어요.”

“…….”

“그래서 아쉽게도 아버지 사진이 많이 없어요. 그때 떼를 써서라도 같이 찍자고 했었어야 했는데…….”

은새의 눈빛이 흐려졌다. 애써 묻어 놨던 기억을 끌어내자 방죽이 터지듯 손쓸 새도 없이 수많은 추억이 휘몰아쳤다.

차츰 은새의 호흡이 빨라지고 목소리가 떨렸다.

“어머니는 선생님이었기 때문에 교육에 엄격하셨어요. 그게 사춘기 시절의 저는 답답했었나 봐요. 한번은 과외를 빼먹고 친구들이랑 놀러 간 적이 있었는데 딱 걸린 거예요. 집에 들어오는데 어머니가 호랑이 같은 표정을 하고 기다리고 계셨어요.”

“…….”

“와, 눈물이 쏙 빠지도록 혼났었어요, 그때. 과외를 무단으로 빠진 건 선생님의 신임을 배신하는 것이고 행선지를 제대로 알리지 않은 건 부모를 걱정시키는 일이라고요. 맞는 말이라 말대꾸 한번 제대로 못 했어요. 어머니는 늘 정론으로만 말씀하셔서 말싸움을 하면 늘 제가 졌거든요.”

“…….”

“하지만 그날 이후로 어머니는 제가 엇나가지 않게 더 신경 써 주셨어요. 대화를 많이 하려고 하고 좋은 것도 사다 먹이셨어요. 무엇보다 숨통이 트일 수 있게 건전한 취미 생활을 함께 해 주셨어요. 그때 피아노 치는 걸 배웠는데 솔직히 잘하지는 못해요. 재능이 없어서.”

그때가 생각난 듯 은새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아는지 몰라도 이미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제 남동생 이름은 은혁이에요, 유은혁. 저랑 나이 차이가 좀 나는데, 말 안 듣는 철부지 꼬맹이였어요. 어릴 때는 쪼그맣던 녀석이 중학생이 되니까 키가 부쩍부쩍 크는 거예요. 나중에는 아주 맞먹으려 들더라고요.”

“…….”

“잠깐 소원해졌던 시기가 있는데 어느 날 제가 귀가 중에 질 나쁜 무리한테 붙잡힌 거예요. 그때는 헌터도 뭣도 아니니까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는데 저 멀리서 은혁이가 ‘너희 뭐야! 우리 누나한테 뭐 하는 짓이야!’라면서 성난 코뿔소처럼 뛰어오는 거예요. 저 동생이 그렇게 화난 거 처음 봤어요.”

“…….”

“주위에서 알아채고 사람들이 몰려오기까지 뒤엉켜 싸우다가 은혁이가 몇 대 얻어맞았어요. 그 사람들 경찰이 와서 끌고 가고 은혁이가 다 터진 얼굴로 ‘누나, 괜찮아? 안 다쳤어?’라고 하는데 말이 안 나오는 거예요. 바보 같긴, 제가 더 다쳐 놓고…….”

눈물이 쏟아져 은새는 말을 더 잇지 못했다.

물끄러미 지켜보던 벨키오르는 자리를 옮겨 그녀의 옆으로 갔다.

커다란 손이 은새의 어깨를 쓸어내렸다. 길을 잃은 아이처럼 그녀는 어쩔 줄 몰라 하며 눈물을 주룩주룩 흘렸다.

한동안 그곳에는 흐느낌만이 들렸다. 벨키오르는 침잠한 눈빛으로 묵묵히 그녀를 위로했다.

은새의 눈물은 쉬이 그치지 않았다. 다 이겨 낸 줄 알았는데, 다 흘려보낸 줄 알았는데 아직도 그녀의 마음속에는 가족을 잃은 슬픔이 남아 있었다.

그녀가 감정을 추스를 때까지 벨키오르의 손길은 멈추지 않았다.

눈꺼풀을 깜빡여 눈물을 털어 낸 은새가 한결 차분해진 어조로 꿈에서도 잊지 못할 순간을 입에 담았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작스럽게 던전 사태가 터졌고.”

“…….”

“제가 잠깐 집을 비운 사이에 집 근처에 던전이 생겨났어요. 그때는 모든 게 불안정하던 시기라 나라에서 대처하기도 전에 갑작스레 던전 브레이크가 일어났고, 마침 집에서 쉬고 있던 가족들이 거기에 휩쓸렸어요.”

은새의 목소리가 버석하게 갈라지자 벨키오르가 제 가슴에 은새를 기대게 했다.

“저는 아무것도 못 했어요. 차라리 같이 있을걸, 나가지 말고 집에 있을걸. 그런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더라고요. 그때는 모든 게 원망스러웠어요. 도와주지 않는 사람들이 미웠고, 아무런 힘이 없는 스스로가 한탄스러웠고…….”

“…….”

“내 가족들은 잘못한 게 없는데 왜 이런 일을 당해야만 하느냐고 하늘에 수없이 따졌어요. 그때 제가 제일 싫어했던 말이 착한 사람은 일찍 죽는다는 말이었어요. 사람 놀리는 것도 아니고…….”

후우. 길게 숨을 내쉰 은새가 벨키오르에게 기댄 그 상태 그대로 고개만 올려 시선을 맞췄다.

뺨이 축축이 젖어 있었지만 흑요석처럼 빛나는 검은 눈동자는 슬픔을 털어 내고 후련해 보였다.

그 강인함에 벨키오르가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래도 이렇게 얘기하니 좋네요. 벨키오르 님이 잘 들어 주셔서 너무 주절주절 떠들어 댄 것 같아요. 혹시 불편하지 않으셨어요?”

“아니.”

“아, 이 나이 먹고 엉엉 울어 버렸네……. 조금 창피하다.”

은새가 멋쩍게 웃으며 손등으로 물기를 닦았다.

“은새.”

“네?”

은새가 다시 그를 올려다본 그 순간, 벨키오르가 입술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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