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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키운 마수가 드래곤을 물고 왔다 (101)화 (101/190)

100화 - 애들 몰래 하는 나쁜 짓

벨키오르는 인상을 찌푸리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기어코 동족들의 반려 타령이 그의 정신을 오염시켰다.

번잡한 속내를 들킬세라 벨키오르가 별이를 안고 앞서 걸었다. 그러다가 조금 진정하고 나서야 은새와 걷는 속도를 맞추었다.

아이들을 방에 데려다 놓고 나온 은새가 100% 생과일 착즙 주스를 벨키오르에게 내밀며 그의 옆에 앉았다.

“그런데 벨키오르 님, 이쪽 세계에 이렇게 오래 머무르셔도 되는 거예요?”

“무슨 뜻이지?”

“벨키오르 님은 위그드라실을 수호하는 존재인데 계속 나와 계시잖아요. 안 위험한가요?”

주스를 넘기는 벨키오르의 목울대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빈 잔을 내려놓는 그의 입술이 젖어 있었다.

그에 시선이 간 은새가 눈을 깜빡이다가 얼굴을 붉혔다.

와……. 일상적인 모습일 뿐인데 뭔가 화보 찍는 것 같네.

벨키오르의 얼굴에는 이제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다. 도저히 익숙해질 수 없는 외모였다.

“이변이 생기면 위그드라실이 나를 부를 테니까. 아무 문제 없다.”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산체스 님은 안녕하시죠?”

“왜 그대가 산체스의 안부를 묻지?”

“어…… 그러면 안 되나요? 그래도 도움을 주신 분인데.”

갑자기 벨키오르의 기분이 저조해진 듯해 은새가 눈동자를 굴렸다. 인간 사회에서 겹지인의 안부를 묻는 건 의례적으로 있는 일이었다.

동족들에게 시달린 것 때문에 스스로가 뾰족하게 반응했다는 자각을 한 벨키오르가 어조를 누그러뜨렸다.

“산체스가 안녕한지, 안 안녕한지는 그대가 전혀 신경 쓸 바가 아니지만 여전하더군.”

“네…….”

“그러니 그쪽엔 무용한 관심 주지 말도록. 되도록 안 만나는 게 이로운 인사니까.”

은새가 푸스스 웃었다.

산체스 님과 벨키오르 님은 정말 친한 사이 같아.

벨키오르가 들으면 속이 뒤집힐 생각을 천연덕스럽게 하면서 은새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런데 정말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에요? 어쩐지 평소랑은 좀 다르신데.”

은새가 손을 뻗어 벨키오르의 이마를 짚었다. 움찔했던 벨키오르는 잠자코 은새가 하는 대로 내버려 뒀다.

“어디 아프신 건 아니죠?”

“……아니.”

“드래곤도 아플 때가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어디 편찮으시면 바로 말씀해 주세요. 무리하지 마시고요.”

떨어져 나가는 온기를 집요하게 응시하던 금색 눈동자가 은새의 희맑은 얼굴을 담았다.

“내가 아프면, 그대는 뭘 해 줄 수 있지?”

“간호요……? 옆에서 수발들어 드리고, 체온 재 드리고, 식사 챙겨 드리고 하지 않을까요?”

은새는 당연하게 와병했을 경우를 가정했다. 드래곤과 잔병치레만큼 어울리지 않는 게 또 있을지 모르겠으나 그녀는 진지했다.

헌터라면 전투 중 부상을 입는 게 더 익숙했지만 벨키오르의 무력을 알아서 그런지 그 모습은 잘 상상이 가지 않았다.

“그런데 웬만하면 안 아프셨으면 좋겠어요. 벨키오르 님이 몸져누우시면 어떡해야 할지 모르겠거든요. 도움을 청할 상대도 없고…….”

“그러지.”

무력한 드래곤이라. 어디로 보나 꼴불견일 게 자명한데 은새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표정으로 멀뚱히 자신을 쳐다보는 그녀에게 벨키오르가 손을 뻗었다. 그의 커다란 손바닥 위에 길쭉하게 뻗은 섬세한 손가락이 얹어졌다.

그가 손가락을 일일이 얽어 깍지 낄 때까지 반응이 없던 은새가 흡, 숨을 들이켰다. 하지만 빼려는 시도는 하지 않는다.

그저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겠는지 ‘어, 어.’ 하고 입을 열었다 다물기를 반복했다. 복숭앗빛으로 물든 뺨이 먹음직스러웠다.

그러고 보면 은새는 그런 사람이었다. 생면부지의 아기를 정성스럽게 돌보고, 아기를 찾으러 온 그 아비에게 아기는 따뜻한 보살핌이 필요하다고 충고하며 대신 속상해하는.

그런 사람이기에 더 지켜보고 싶고 마음이 가는 것이다. 도움을 청하는 누구에게나 상냥한 이라서.

“그대가 걱정할 일이 생기지 않게 주의하지.”

“아니 뭐, 아프고 싶어서 아픈 사람이 있나요. 제가 괜한 말을 했어요.”

은새가 멋쩍어하며 붙잡히지 않은 손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웃음기 띤 눈으로 벨키오르가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를 주시했다.

대화는 흐지부지 마무리되었고, 잠시 후 잠에서 깬 아이들이 배고프다고 칭얼대는 바람에 다 같이 늦은 저녁을 먹었다.

거실에 모여 앉아 티브이를 보다가 꾸벅꾸벅 졸기 시작한 별이와 봄이를 은새가 방으로 안아다 뉘었다.

자리로 돌아온 은새에게 벨키오르가 나지막이 운을 뗐다.

“……선물.”

“네?”

“그대가 멀리 다녀오면서 내 몫으로 가져온 선물 말인데. 뜯어보지 않아도 되겠나?”

잊고 있었던 게 떠오른 듯 은새가 손바닥을 짝, 부딪쳤다.

“아, 술! 오늘 같이 드실래요? 잠시만요, 가져올게요. 마땅한 안줏거리가 있나?”

술 좋아하는 은새는 마다하지 않았다. 주방으로 향하는 은새의 뒷모습을 보며 벨키오르는 조금 자괴감을 느꼈다.

동족들의 술타령이 아무래도 제게 영향을 끼친 것 같았다. 맹세코 술김에 은새와 뭘 해 보려는 속셈은 아니었다.

그건 드높은 드래곤의 긍지를 훼손하는 일이었고, 지극히 이성적이며 합리적인 벨키오르는 충동에 휩쓸리는 걸 격렬히 혐오했다.

그저……. 그저 은새가 선물한 술이 있는데 안 마시는 건 너무 동족들의 말을 의식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위그드라실의 목소리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가 스러졌다.

‘은새는 인간들의 기준으로 아름다운 편에 속하지. 머뭇거리다 놓치고 후회하지 말고 그 아이에게 최선을 다하렴.’

놀리는 게 분명한 그 말이 뇌리에 박혔다. 은새는 음주를 즐기는 편이고, 얼핏 듣기로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 많은 일이 있었던 듯했다.

술을 마신다면 야생이나 다를 바 없는 밖에서보다야 집이 안전하지 않을까? 무슨 일이 생겨도 자신이 수습해 줄 수 있고, 또 언제나 따라붙는 외부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되니.

벨키오르는 복잡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말도 안 되는 변명이라는 걸 인지한 탓이었다.

‘동족들의 말대로 돼 버렸군…….’

그가 좁아 드는 미간을 엄지로 문질렀다. 하필 오늘 그딴 소리를 들어서 심상이 어지러웠다.

벨키오르는 주방에서 부산스럽게 왔다 갔다 하는 은새를 눈으로 좇았다. 한참 동안 냉장고를 뒤적이던 그녀는 안줏거리가 성에 차지 않는지 입을 삐쭉거렸다.

“회를 시킬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아쉬운 대로 한우라도 구울까요?”

“내가 하지.”

“아뇨, 제가 할게요. 벨키오르 님은 식탁에 앉아 계세요.”

은새는 씩씩하게 랩핑된 고기를 꺼내고 가스레인지 위에 프라이팬을 올렸다. 행여 벨키오르에게 고기 굽는 역할을 뺏길세라 아예 등을 돌린 모습이었다.

저렇게까지 하고 싶다는데 못 하게 하면 서운해할 얼굴이 그려져 벨키오르는 순순히 식탁에 가 앉았다.

그가 움직일라치면 소스라치게 놀라는 은새 때문에 그는 숨소리도 죽인 채 치익, 하고 고기가 익어 가는 소리를 들었다.

급하게 차려진 술상은 제법 호화로웠다. 들뜬 기색으로 은새가 한 손에도 다 안 들어오는 커다란 검은색 병의 뚜껑을 돌려 땄다.

화려한 손목 스냅에 잠시 시선을 뺏겼던 벨키오르는 꼴꼴 잔을 채우는 투명한 액체에서 나는 낯선 냄새를 맡았다.

“독특한 향이 나는군.”

“저도 이건 처음 먹어 봐요. 예전에 길드로 선물 들어온 적 있었는데 솔이가 냉큼 독차지해서요.”

은새가 만면에 웃음을 띠고 잔을 들어 올렸다.

“고급이긴 한데 취향 타는 술이라고 하니까 입맛에 안 맞으시면 다른 거 드셔도 돼요. 장식장에 쌓아 둔 술이 제법 되거든요. 짠해요, 우리. 짠!”

“…….”

벨키오르는 눈치껏 은새의 잔에 자신의 잔을 부딪쳤다. 한입에 털어 넣는 그녀를 보고 벨키오르도 똑같이 따라 했다.

다행스럽게도 다른 술을 꺼내 오지 않아도 될 모양이었다. 향은 독특했으나 부드럽게 목을 넘어가는 느낌이 괜찮았다.

아무렴, 가끔 로드가 보내오던 마물의 내장으로 담근 술보다는 낫겠지.

“집에서 벨키오르 님이랑 술잔을 기울이고 있으니까 색달라요.”

“무엇이?”

“낮에는 아이들이 깨어 있잖아요. 안 그래도 별이랑 봄이 호기심 많은데 보고 배울까 봐 조심해야 하고. 그런데 지금은 아이들도, 마수들도 다 자고 조용하니까…….”

뺨이 살짝 달아오른 은새가 활짝 웃었다.

“왠지 애들 몰래 나쁜 짓 하는 기분?”

“…….”

벨키오르는 은새의 이상한 화법을 지적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했다. 하지만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말일 게 분명해 그는 말없이 은새의 잔에 술을 채워 줬다.

“벨키오르 님, 천천히 드세요!”

그렇게 말해 놓고 정작 은새는 벨키오르가 따라 주는 대로 꿀떡꿀떡 잘도 마셨다. 그녀의 속도에 맞추다 보니 술병이 동나는 건 순식간이었다.

검은 술병이 식탁 한쪽에 늘어섰다. 그만큼 많은 이야기가 둘 사이에 오갔다.

너무 급하게 마시는 것 같아 벨키오르가 은새의 잔을 잠깐 빼앗았다. 빼앗긴 잔을 보고 눈을 끔뻑인 그녀가 기분 좋게 풀린 얼굴로 하소연을 했다.

“아니 글쎄, 유하는 아직도 몇 년 전 크리스마스 때 얘기를 하는 거예요. 제가 그때 심적으로 힘든 일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홍시에 얼굴 박고 잠든 게 뭐 대수라고…….”

“무슨 힘든 일?”

“살다 보면 생기는 뻔한 일이요. 잘 풀려서 망정이지……. 거기 얼린 홍시 맛있어요. 다음에 같이 가요.”

“그러지. 그대가 이 대화를 기억한다면.”

“저 술 마시고 필름 끊긴 적은 없거든요. 약속이에요. 약속~”

술 취한 사람이 으레 그렇듯 대화는 중구난방으로 튀었다. 벨키오르는 그녀의 말을 일일이 받아 주는 좋은 청자였다.

빼꼼 내밀어진 새끼손가락을 멀거니 쳐다보고 있던 그는 은새의 재촉에 자신의 손가락을 거기에 걸었다. 그게 정답이었던 듯, 은새가 활짝 웃었다.

그런데 나른하게 풀려 있던 은새의 눈빛이 돌연 예리해졌다.

“벨키오르 님, 이렇게 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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