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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키운 마수가 드래곤을 물고 왔다 (100)화 (100/190)

99화 – 스스로 선택하렴

신역으로 돌아온 벨키오르는 아케이아에게서 들은 사실을 위그드라실에게도 알렸다.

[세계의 균형이 흔들리고 있다는 건 일찍이 느끼고 있었단다.]

“그런데 왜 내게 말하지 않았지?”

위그드라실이 느리게 가지를 흔들었다.

[내게 신탁의 드래곤 같은 예지 능력은 없지만 그래도 오랜 세월 존재했기에 알 수 있단다. 벨키오르, 지금은 네게 아주 중요한 시기야.]

“…….”

[너는 지금껏 수호자의 의무를 충실히 이행해 왔어. 그러니 이제 자유로워지렴. 나는 네가 조금만 더 마음 가는 대로 행동했으면 좋겠구나.]

벨키오르의 눈가가 찌푸려졌다.

“후계자가 생겼으니 나는 헌것 취급하는 건가?”

[서운하구나, 내 진심을 이런 식으로 곡해하다니.]

위그드라실이 나직한 웃음을 터트렸다.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는 벨키오르에게 세계수가 속삭였다.

[은새, 그 아이는 네 안식이 되어 줄 거야.]

“…….”

[이미 느끼고 있지 않니?]

속내를 들킨 것 같아 시선을 피했던 벨키오르가 입안에서 맴돌던 질문을 내놓았다.

“은새가…… 진정 내 반려인가?”

[그걸 내게 물어보다니 재미있구나. 반려의 인 때문이니?]

“그녀가 내 반려라면, 처음 만난 그 순간 반려의 인이 생겨났어야 했으니까.”

멀리서 바람이 불어왔다. 싸아아 나뭇잎이 스치는 소리가 잠시 그들 사이에 내려앉은 공백을 채웠다.

벨키오르의 하늘색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원래 삶이란 생각한 대로 흘러가지 않는단다.]

“…….”

[우연과 우연이 쌓이고, 실패와 성공을 거듭하면서 그렇게 사고하는 모든 존재는 성장하기 마련이란다. 그동안 벨키오르, 너는 주어진 사명에 따라 순리대로만 살아왔으니.]

위그드라실이 이제야 좁은 세상을 벗어나기 시작한 이를 향해 다정한 목소리를 내었다.

[모호함 속에서 진실을 찾는 것도 뜻 깊은 일이겠구나.]

“답을 쉽게 내어 줄 생각이 없다는 뜻이군.”

[후후후, 벨키오르. 운명은 기다리기만 한다고 능사가 아니야. 때로는 먼저 찾아 나설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해. 네가 곁을 내주고 싶은 이를 스스로 선택하렴. 그럴 각오가 없다면 미인을 쟁취할 수 없어.]

“……이런 상황에서 농담이 나오나?”

[은새는 인간들의 기준으로 아름다운 편에 속하지. 머뭇거리다 놓치고 후회하지 말고 그 아이에게 최선을 다하렴.]

불현듯 떠오른 생각에 위그드라실이 짓궂게 덧붙였다.

[너는 이제껏 단 한 번도 실패한 적 없으니 그 모습을 보는 것도 재밌겠구나.]

벨키오르가 짜증스럽게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넘겼다. 위그드라실이 뜻하는 바를 모르는 건 아니었으나 속이 껄끄러웠다.

“위그드라실, 네 지혜와 경륜을 존중하지만 방금 한 말은 내 동족들이 하는 시답잖은 소리와 다를 바가 없다.”

[그 아이들은 너를 좋아하니까. 네가 행복하길 바라서 이것저것 조언하는 것이지.]

“살면서 들었던 말 중에 가장 얼토당토않은 소리군.”

매몰차게 몸을 돌린 벨키오르가 신역 곳곳을 돌아다니며 결계를 손보았다. 반쪽짜리 신에 관한 얘기를 들었으니 방비를 단단히 해 둘 셈이었다.

신역은 자격이 없는 자가 발을 들일 수 있는 공간이 아니지만, 혹시 모를 일이니.

“듀.”

[네, 벨키오르 님.]

듀는 여전히 기운이 없었다. 친우를 잃었으니 그 슬픔이 가시기까지 시간이 걸릴 터였다.

벨키오르는 별이와 은새에게 하던 버릇대로 시무룩한 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에게서 다정한 위로를 기대하지 않았던 듀의 입이 벌어졌다.

[베, 벨키오르 님?]

“무슨 일이 생기면 위그드라실이 나를 부를 것이다. 그러니 너는 복수심에 불타서 목숨을 헛되이 쓰지 말고 신역을 잘 지키고 있어라. 너를 잃는 것은 내게 원치 않는 일이니.”

[벨키오르 님……. 네, 알았어요. 명심할게요.]

할 말을 마친 벨키오르가 금빛 마력을 끌어올렸다. 생각보다 시간이 지체돼 은새가 깨어났을 것 같았다.

눈을 떴을 때 곁에 있어 주고 싶었는데.

서두르는 그의 머릿속으로 위그드라실이 잘 다녀오라는 인사를 건넸다.

***

쌓인 피로로 인해 푹 잠들었다가 일어난 은새가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흐릿하던 시야에 익숙한 풍경이 보였다.

으음……. 얼마나 잔 거지.

멍하게 시간을 가늠하던 은새가 옆으로 돌아누워 이불에 뺨을 비비적거렸다. 일어나기 싫다. 침대와 하나가 되고 싶다. 평생 누워만 있고 싶다…….

그런 생각을 줄줄이 이어 가던 은새의 눈앞에 볼이 통통한 아이의 귀여운 얼굴이 바짝 들이 밀어졌다.

아이가 은새가 눈을 뜬 걸 확인하고 꽃봉오리가 피어나듯 환하게 웃었다.

“뉴나! 일어나쏘요?”

“별아?”

별이가 꼬물꼬물 은새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아이에게서 나는 좋은 냄새를 맡으며 은새가 기꺼이 팔을 벌려 주었다.

하늘색 고수머리에 코를 묻고 비비적거리자 별이가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따라 미소 지은 은새가 아이의 등을 쓸어내렸다.

“나 일어날 때까지 기다렸어?”

“네에. 황새랑 백합이랑 같이 기다려쏘요.”

까악!

쉬익.

그러고 보니 머리맡이 푹 꺼져 있었다. 황새가 의기양양하게 양 날개를 펼쳐 보였고 백합이가 둥근 주둥이를 은새의 어깨에 가져다 댔다.

그들과 노닥거리며 완전히 잠을 몰아낸 은새가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별이가 따라서 일어났다.

“봄이는 어디 갔어?”

“봄이 쿠키랑 민들레랑 세계수 보러 가써요!”

“그래?”

마수들이 세계수 근처에 있는 걸 유독 좋아하는 걸 아는 은새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탁상에 올려 둔 시계를 확인하니 거의 하루의 절반이 지나 있었다.

“너무 많이 잤다. 별이 밥 먹었어?”

“우웅. 쪼끔?”

“왜 쪼끔 먹었어. 많이 먹어야 쑥쑥 크지.”

별이가 배시시 웃었다. 사실 벨키오르가 떠나기 전 식사를 준비해 줬지만 은새와 함께 먹으려고 버티고 있었다.

식사는 함께해야 즐겁다는 걸 잘 아는 별이였다.

“어라. 벨키오르 님 어디 가셨지?”

아이와 마수들을 등에 매달고 거실로 나간 은새는 당연히 있을 거라고 생각한 존재가 보이지 않자 당황했다.

주방에도, 방에도, 욕실에서도 그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밖에 나가셨나?”

“아빠 잠깐 원래 세계에 갔어요. 금방 온다구 했는데에.”

“그래? 무슨 일 있으신가.”

은새의 얼굴에 일순 걱정의 기색이 스쳐 갔으나 금방 돌아온다고 했다는 별이의 말을 믿고 먼저 허기부터 채우기로 했다.

냉장고를 여니 랩핑된 음식들이 있었다. 전자레인지에 돌리거나 프라이팬에 데워 식탁에 차렸다.

동글동글한 주먹밥을 별이의 입에 쏙 넣어 주자 아이의 뺨이 불룩 솟아났다. 초롱초롱한 금색 눈동자를 은새에게 고정한 채로 별이가 음식을 꼭꼭 씹어 삼켰다.

절로 웃음이 나는 흐뭇한 광경이었다.

“맛있어?”

“네에. 뉴나가 먹여 줘서 더 맛있어요.”

“벨키오르 님이 만든 거라 그래. 계란국도 호호 불어서 떠먹자.”

“히히, 네.”

알콩달콩 아이와 식사를 마친 후 은새는 별이를 안고 뒷마당으로 갔다. 그녀의 기척을 느낀 쿠키와 민들레가 고개를 들었다.

푸릉.

크르릉.

알은체를 해 오는 마수들의 목을 쓰다듬어 주고 은새가 봄이를 찾았다. 세계수 나무 꼭대기에 앉아 있던 봄이가 시선을 눈치채고 포르르 날아왔다.

삐빗!

“저리 가, 봄이!”

봄이가 은새에게 안아 달라고 해맑게 머리를 비벼 대자 별이가 팔을 휘저으며 툴툴댔다. 은새가 아기 때처럼 별이를 둥개둥개 하며 부드러이 타일렀다.

“착한 별이가 봄이한테 자리 조금만 양보해 주자. 응?”

“우웅. 네…….”

결국 별이는 봄이에게 은새의 한쪽 팔을 내주었다. 한 번에 마수를 둘씩이나 안아 들어 제법 묵직했으나 S급 헌터 은새에게는 별 무리가 되지 않았다.

“와. 얼마 전만 해도 내 키만 했는데 이제 성목으로 불러도 손색이 없네.”

벨키오르의 마력을 양분 삼아 거대해진 세계수가 푸른빛의 입자를 은은하게 흩뿌렸다. 주변에는 봄이가 피운 꽃들이 소담히 자라 있었다.

고작 집 뒷마당이라고 하기에는 아름답고 아늑한 풍경이다. 세계수가 이토록 빠르게 성장한 데에는 벨키오르가 정성껏 돌본 영향도 있지만 봄이의 능력이 작용한 듯했다.

은새가 아공간에서 돗자리를 꺼내 풀밭 위에 펼쳤다.

“우리 여기 다 같이 앉아서 벨키오르 님 기다릴까?”

“네!”

삐-

매번 벨키오르가 퇴근한 은새를 맞아 줬으니 이번에는 그녀가 그를 맞아 줄 차례였다. 그의 반응이 기대돼 은새가 작게 키득거렸다.

그들은 간단한 손장난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금방 돌아온다고 했던 벨키오르는 해가 기울도록 소식이 없었다.

“벨키오르 님이 늦으시네.”

아이들도 많이 지쳤고, 그만 집으로 들어가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 그때 공간이 일그러지고 언제 봐도 현실감 없이 잘생긴 미남이 저벅저벅 걸어 나왔다.

은새가 벌떡 일어나 다가갔다.

“다녀오셨어요, 벨키오르 님.”

“……깨어 있었군.”

그럴 거라고 예상했지만, 막상 일어나 있는 은새를 보니 벨키오르는 아쉬움을 느꼈다. 이게 다 덜떨어진 동족들이 헛소리를 하느라 시간을 끈 탓이었다.

그의 시선이 잔디 위에 깔린 돗자리와 잠든 아이들을 향했다.

“나를 기다렸나?”

“네. 별이가 금방 오실 거라고 해서……. 무슨 일 있으셨어요?”

“그대가 신경 쓸 만한 일은 아니다. 들어가지. 아이들은 내가 안고 가겠다.”

“아니에요, 별이만 챙겨 주세요.”

봄이를 챙겨 안은 은새가 벨키오르를 쳐다봤다. 그 순간, 벨키오르의 귓가에 누군가가 했던 말이 스쳐 지나갔다.

‘아이는 많을수록 좋아. 귀엽잖아.’

벨키오르가 멈칫하자 은새가 의문을 표했다.

“왜 그러세요?”

“……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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